지식의 지평
기획특집
영화가 재난을 소비하는 방식, 그리고 카메라의 가능성에 대하여
코로나 19 이후 세계는 변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전염병을 겪은 뒤 도래할 일상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사전적으로 재난(災難)이란 국민의 생명·신체·재산과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사태를 총칭한다. 여기엔 두 가지 물리적인 조건이 따른다. 첫째, 당연한 말이지만 피해가 발생해야 하고, 둘째,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공동체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다만 재난의 피해는 모든 이에게 평등하지 않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는 반면 사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가올 변화를 관망하는 이도 있다. 간혹 재난이라는 파도의 영향권 바깥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재난의 파급력을 간과하기도 한다. 직접 수해를 입지 않는 자는 쓰나미의 공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그 위험도에 둔감하다. 재난이 구체적인 사태가 되어 내 앞에 도착하기까지 물리적인 간격이 존재한다.
1. 재난 시국에 재난 영화를 보는 이유
재난의 진정한 공포는 이후에 찾아오는 일그러짐이다. 집단이 공동의 체험을 거치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뒤틀림이 발생하고 크고 작은 일상의 공백을 메우는 사이 세계는 변한다. 거대한 지진 뒤에 찾아오는 해일처럼 빠르지만 조용하게 손때 묻은 삶의 흔적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이다. 코로나 19 이후 거리에선 사람들이 사라졌고, 이에 맞춰 사람들의 뇌리엔 ‘사회적 거리’라는 생소한 단어가 익숙해져 간다. 영화 산업 역시 그 파도를 피해갈 순 없다. 코로나 19 이후 두 가지 생소한 풍경을 마주하고 있다. 하나는 텅 빈 극장이다. 이제 극장에 사람이 없다. 간혹 극장을 가도 거리를 두고 흩어져 앉는다. 새로운 개봉작이 드물어지고 오래된 영화들이 여전히 스크린을 채우고 있다. 심지어 이제 극장보다는 OTT(Over The Top: 인터넷으로 영화, 드라마 등 각종 영상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통해 집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 그 덕분에 오래된 영화들이 다시 돌아와 관객들을 새롭게 만나는 중이다.
두 번째 풍경은 꽤 흥미롭다. 전염병으로 인한 재난 시국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모으는 영화는 의외로, 어쩌면 당연하게 재난 영화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2011)이 뒤늦게 검색어에 오르내리며 다시 소환되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단순하게는 재난 시국이니까 재난에 관한 영화가 궁금하다는 즉각적인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사람들은 스크린 바깥에서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왜 굳이 스크린 앞에서까지 재난을 마주하고 싶어 하는 걸까. 요컨대 사람들은 왜 재난 시국에 재난을 소비하고 싶어 하는가.
사실 「컨테이젼」은 이상한 재난 영화다. 맷 데이먼, 귀네스 팰트로, 마리옹 코티야르, 주드 로 등 당대 할리우드 톱 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 영화는 눈물겨운 드라마를 강요하지 않는다. 「컨테이젼」이 여느 전염병 소재의 영화와 다른 점은 ‘컨테이젼’이란 제목 그대로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각 이익집단의 이해관계,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과 그것을 역으로 추적해 가는 과정, 재난 상황에 대한 전문가와 대중의 온도 차 등을 차분하고 공평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핵심은 ‘공평’이다. 영화는 인물들의 사연에 편차를 두지 않고 공평하게 서사를 진행한다.
「컨테이젼」의 서사는 대략 세 축으로 흘러간다. 우선 전염병에 걸려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있고, 전염병의 경로를 추적하는 검사관이 있다. 마지막으로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사이비 기자와 이에 대처하는 질병통제예방국의 상황이 주요한 축이다. 하지만 이 세 서사 모두 극적인 요소는 미미하다. 성격으로 분류하자면 드라마라기보다는 차라리 정보 전달을 위한 뉴스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다. 감염자 가족, 역학조사관, 질병통제예방국, 사이비 기자 등 각각의 자리에 흩어진 사람들의 상황들이 교차하는 서사는 얼핏 파편적이다. ‘교차하는 정보’라는 톤을 유지하기 위해 영화는 한자리에서 회의하는 상황을 찍을 때조차 수시로 장면을 쪼개고 나눈 뒤 붙인다. 그리하여 영화는 인물들이 서로 단절된 상태를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건조하고 객관적인, 그러니까 뉴스나 다큐멘터리의 톤을 유지함으로써 재난의 실감을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간격이다. 「컨테이젼」 속 전염병은 치명적이지만 인류 전체를 놓고 볼 때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 절망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병에 걸린 당사자에게는 사느냐 죽느냐, 말하자면 0과 1의 문제다. 각 인물에게 전염병의 정보가 차단되고 그럴수록 공포라는 또 다른 병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간다. 이쯤 되면 영화는 바이러스의 실체보다 공포의 윤곽을 잡아나가는 데 더 심혈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 파국이 번져가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 생생한 재난 서사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시에 재난의 당사자로서 개개인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건의 전모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불확실한 정보를 취합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상황으로 인한 막막함이야말로 재난의 공포를 지속하는 동력이다.
「컨테이젼」은 모순적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감염의 경로를 통해 세계의 연결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일련의 흐름이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를 화면을 통해 증명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모순된 방식이 충돌할 때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결국 정보의 최종 소비자의 입장에서 전염병의 전모를 파악하도록 허용된 존재는 오직 관객뿐이다. 영화는 최초 감염자가 미국 내에 들어온 시점인 감염 발생 2일째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길고 긴 사투를 겪은 뒤, 제일 마지막 장면에 감염 발생 1일째를 배치한다. 마지막 장면에 1일째가 들어간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관객에게 전염병의 실체를 전달함으로써 상황의 최종 통제권을 넘겨주는 셈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명확함. 이것이야말로 「컨테이젼」이 어디까지나 영화라는 안전망 안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라는 증거이며 재난 시점에서 재난 영화를 보는 이유다. 상황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 선명하고 투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은 물론 언젠가는 상황이 종식할 것이라는 믿음까지 선물하는 친절함. 스크린 바깥에서 재난이 벌어진 지금,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가장 안전한 장소인 스크린 너머에 머물고자 한다.
2. 재난, 재난 영화, 관객 사이의 간격
재난 영화란 무엇인가. ‘재난을 다룬 영화’라고 하면 관객들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몇 가지 형태가 있다. 관객의 인식 차원에서 논한다면 재난 영화는 존재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재난 영화는 장르가 아니다. 재난 영화란 재난 상황을 대규모의 스펙터클을 위해 재현하는 영화들을 총칭하지만, 여기에는 장르가 되기 위한 독자적인 서사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재난 상황을 대규모의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관습이 있을 따름이다. 재난은 그저 수많은 이야기의 소재 중 한 종류에 불과하다. ‘재난 영화’로 인식되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재난은 극복해야 할 위기 상황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정작 재난 영화들이 서사의 뼈대로 삼는 건 재난이라는 ‘상황’이 아니라 이것을 돌파하는 인물들의 ‘관계’다. 어떤 영화는 이를 주인공의 영웅담으로 포장하고, 인물의 성장을 따라가기도 하며, 간간이 로맨스를 양념처럼 버무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재난 영화는 위기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연대에 초점을 맞추며 재난이라는 압력이 더해질수록 관계가 단단해지는 공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서사다.
멜로드라마란 무엇인가. 애틋하고 안타까운 정조다. 애틋함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극복하기 어려운 벽에 부딪혔을 때 마찰의 불꽃이 되어 피어난다. 멜로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인물들의 결합을 가로막는 장애물의 존재다. 서로 갈망하는 두 사람이 있고,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는 구조적인 갈등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꺾을 수 없어 시작되는 것이 바로 멜로드라마 서사의 원형이다. 멜로드라마에서 인물들이 서로 원하는 것은 논리나 인과가 아니라 당위다. 그들은 사랑해야 하고 사랑은 쉽게 이루어져선 안 된다는 점을 대전제로 한다. 반면 멜로드라마 속 갈등, 인물 사이 관계를 가로막는 장벽은 시대를 대변한다. 무엇을 장애 요소로 배치하느냐에 따라 멜로드라마의 주제와 메시지가 바뀌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멜로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이자 핵심은 장애물, 장벽의 형태라고 봐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적극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재난 영화는 서사적으로 볼 땐 멜로드라마의 하위 장르에 가깝다. 재난 상황은 장애물로서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어떤 재난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재난 영화의 종류와 성격은 대개 그걸로 판가름 난다. 요컨대 재난 영화의 주인공은 재난 그 자체다. 우리는 재난의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 재난 영화를 관람한다. 이 순간 재난의 대상과 묘사 방식이 중심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요소로 밀려난다. 예컨대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마겟돈」(1998)은 지구에 충돌할 예정인 행성을 막아내는 영웅들의 헌신적인 희생을 그리지만 정작 관객이 소비하는 것은 행성을 폭발시키는 액션의 스펙터클이다. 롤란트 에머리히 감독의 「투모로우」(2004)은 또 어떤가. 서사의 뼈대는 갑작스레 지구에 도래한 빙하기에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년과 고립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아버지의 희생적인 모험담이지만 사실 이야기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빙하기가 도래한 지구 곳곳의 풍경, 극저온 상태에서 순식간에 사람이 얼어붙는 아찔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될 따름이다.
「백두산」은 2019년 겨울 극장가를 공략하고자 기획된 한국형 블록버스터 중 한 편이었다. 백두산이 화산 폭발을 할 수 있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는 지각변동으로 서울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북한의 요원들이 공동의 목적으로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백두산」에서 화산 폭발은 제한 시간을 거는 그럴 듯한 배경에 불과하다. 과장을 약간 보태자면 핵무기나 군사 위협으로 바꾸어도 별다른 위화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백두산」이고 ‘백두산 화산 폭발’이 영화의 하이콘셉트이자 마케팅 포인트가 되어야 한다. 설사 서사 전체에서 자연재해의 분량과 중량감이 얼마를 차지하건 말이다. 한국형 재난 영화로서 이와 같은 공략이 유효할 수 있었던 건 백두산이 우리 삶의 지근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아닌 어디에서 일어나는 재난이 아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참사. 그리하여 우리가 익숙하게 겪어온 일상이 파괴되는 풍경에 관객은 기묘한 쾌감을 느낀다. 일찍이 앙드레 바쟁은 파괴의 스펙터클에 매몰된 이러한 영화적 쾌락을 ‘네로 콤플렉스’라고 명명한 바 있다.
영화 속 재난은 기본적으로 스펙터클의 도구다. 하고 많은 제약과 갈등 중에 굳이 재난을 배경으로 빌려오는 것은 그만큼 시각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같은 이유로 대다수의 재난 영화들은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통해 재난을 대상화하고 오락의 도구로 삼는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우리는 재난을 두려워하지만 재난의 이미지는 탐닉한다. 극장이라는 안전망, 스크린이라는 간격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마파크에서 놀이 기구를 즐기는 감각으로 스크린이라는 안전장치를 유지한 채 재난의 순간들을 안락하게 관람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순간 아이러니가 피어난다. 재난의 이미지가 구체적이고 사실적일수록 재현된 재난이 실재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스펙터클에 봉사하는 재난 영화는 ‘리얼리티’가 결코 ‘리얼’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장르다.
우리는 재난 영화를 갈망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서로 방향이 다른 감정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는 재난의 이미지를 즐기고자 하는 탐닉과 쾌락의 감정, 다른 하나는 재난에서 탈출하고 도망치려는 불안과 공포의 감정이다. 두 가지는 얼핏 모순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슬처럼 연쇄적으로 작동한다. 재난의 이미지가 재난 영화의 결과물이라면 재난 서사의 동력은 미지에 대한 공포와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다. 재난의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태풍이나 지진, 화산 폭발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한 재난은 기본이고, 미지의 전염병에서 비롯한 판데믹 상황을 그린 재난도 있다. 도심을 위주로 벌어지는 재난은 테러나 화재, 건물 붕괴 등 사람으로 인한 재난이 다수를 차지한다. 범주를 넓히면 외계에서 온 침입, 소행성 충돌 등 SF에 가까운 영화들도 재난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발생 원인부터 대처까지 각양각색인 일련의 재난 영화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안과 공포다. 재난의 서사는 대개 문명의 몰락과 멸망, 이른바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로 이어진다. 더 이상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종말이 도래하는 것이다.
모든 재난 영화의 밑바닥에는 인류 멸망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 영화 산업은 교활하게도 이 불안감을 포장하여 안전한 자리에 배치한 뒤 오락의 도구로서 판매한다. 그렇게 우리는 재난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재난 영화를 보고, 그 끝에서 재난이 해결된 상황을 확인한 후 안도감을 얻는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인한 미증유의 감염 사태를 겪으며 한 가지 의문이 싹튼다. 진정 영화의 자리는 안전한가. 우리는 재난 영화를 단지 오락의 도구로만 소비하는가. 여기 재미난 현상이 한 가지 있다. 「컨테이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재난 영화는 분명 재난 상황에 더 잘 팔린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과 영화 사이의 간격이 좁혀질 때, 예컨대 지구의 생태 환경이 불안해지고 사회의 불안정성이 커져서 진짜 재난에 대한 공포가 가시화할 때 재난 영화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재난 영화가 오락으로서 소비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 간격을 확보하고 있을 때다. 어느 시점까지는 이 간격이 좁혀져도 용인된다. 아니 오히려 더욱 왕성하게 소재를 활용하고 영화를 찍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삶을 덮치는 재난이 발생했을 때, 좀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이 나(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할 때 영화는 좀 더 다양한 양상과 반응으로 쪼개어지기 시작한다.
3. 재난이라는 사태, 재난 이후의 상태
바야흐로 ‘재난의 시대’다. 데이비드 하비가 진단했듯 기술이 ‘시공간을 압축’하고 있는 현재, 세계는 동시적으로 촘촘히 이어지고 있다. 덩달아 재난의 위협은 그 치명성마저 함께 세계화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재난을 실시간으로 전해 듣고 영향을 받는다. 이쯤 되면 재난은 전 지구적 현상이다. 인류는 자연재해부터 테러리즘과 같은 인위적인 사태, 심지어 금융 위기까지 일상이 된 재난 상황을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엔 착시가 끼어있다. 재난은 평등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재난의 정보는 동시적으로 공유될 수 있지만 재난이 불러온 파급효과가 개인에게 당도하기까지는 시간 차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재난이라는 사태와 이를 개인이 받아들이는 상태 사이에는 각기 다른 간격이 존재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난의 당사자라기보다는 번호표를 뽑아 든 예비자다. 우리는 재난의 전조와 변화될 일상까지 뭉뚱그려 ‘재난’으로 명명하지만 대부분은 재난의 불똥에서 상당 간격 떨어져 있다. 이러한 간격은 실제 물리적인 거리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사회적인 신분이나 빈부 격차 등으로 정해지기도 한다. 가령 코로나 19라는 재앙이 닥친 지금, 전염병에 직접 감염된 사람들 외에도 거의 모든 인류가 재난의 상태를 공유한다. 분명 전염병에는 경계도 계급도 없다. 하지만 뒤따라올 거대한 변화의 파도, 예를 들면 경제적 위기엔 격차가 존재한다. 가난한 자는 빠른 속도로 생계에 위협을 받는 반면 부유한 이들에게는 위기가 천천히 다가온다.
재난 영화가 재난을 소비하는 방식에도 시간 차가 존재한다. 첫 번째로 재난을 즉각적으로 소비하는 영화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재난의 발생 과정을 관찰하고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전시하고 상황을 종료한다. 우리가 흔히 대중 상업 영화라고 말하는 영화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할리우드 영화는 이 일을 숱하게 영화의 소재로 활용해 왔다. 물론 9·11 테러가 일어난 직후에는 이런 이야기를 바로 하기 쉽지 않다. 당시 이미 개봉이 정해져 있던 「콜레트럴 데미지」(2002) 등의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잠시 개봉을 미뤄야 했고 대신 「스파이더맨」(2002)과 같은 영웅 서사가 사람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주었다. 하지만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제작되기 시작한 영화들은 재난 상황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데 집중하기 마련이다. 요컨대 재난이라는 사태에 집중한다.
반면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뒤 남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영화들도 있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재난이라는 사태에 카메라를 직접 들이대는 대신 재난으로 인한 파국의 풍경, 남은 사람들의 상태에 주목한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비판적인 거리를 둘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영화는 A부터 Z까지 변화의 스펙트럼을 차례로 선보인다. 재난 바로 곁에 밀착한 시점엔 외려 사태를 제대로 응시하지 못한다.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개 눈을 돌려 희망을 발견하고자 애쓴다. 시간이 약간 흘러 거리를 두고 난 뒤 재난의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재현하려 애쓰는 영화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2006년 개봉한 「플라이트 93」에서는 무역센터에 충돌한 비행기의 납치 과정 전말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휴머니즘 등 드라마에 기대지 않고 최대한 해석을 배제한 카메라를 통해 그날의 악몽을 재현한다. 반면 같은 해 개봉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는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구출한 소방관의 고군분투를 그리며 최대한 드라마를 부각한다. 어느 쪽이든 그날의 기억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가상의 재난을 다루는 여타 영화들과는 차이가 있다.
다시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사태의 진앙에서 조금씩 범주를 넓혀 변두리의 풍경을 다루는 영화도 나오기 시작한다. 재난이라는 사태가 집단의 심리에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어떤 방식으로 일상의 변화를 불러오는지 현미경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세계는 변모했다. 미국인들의 내면도 함께 바뀌었다. 9·11 테러의 후폭풍이 거셌던 건 사상자가 수천 명 발생한 피해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 한복판의 경제적 상징물이 무너졌다는 장소와 성격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것은 내가 있는 이곳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신호였고,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돌이킬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피어나게 했다. 그리하여 황폐해진 심리는 예상치 못한 형태로 영화에 반영된다.
9·11 테러에서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개봉한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나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 블러드」(2007)는 소재만 놓고 보면 결코 재난 영화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하지만 이 두 영화가 집중하는 미국의 황폐한 풍경은 당대 미국 사회가 앓고 있는 트라우마와 불안을 근원적으로 건드린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20세기 초 미국으로 돌아가 피와 폭력, 석유의 노예가 된 미국의 가난한 정신의 기원을 더듬는 영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경우 미국 텍사스 변두리를 무대로 아무도 미래를 꿈꾸지 않는 오늘의 황폐한 풍경을 그린다. 둘 다 해피엔딩 따윈 없고 갈등은 봉합하지 않으며 악당, 아니 좀 더 잔혹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각각 과거와 미래에 시선을 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영화는 결국 불안과 공포가 일상이 되어버린 미국의 상처, 요컨대 오늘을 응시하고 있는 셈이다. 각기 다른 방식, 다른 장르, 다른 시점에서 9·11 이후 익숙해진 절망과 불안의 풍경을 그려나가는 방식은 재난을 소화하는 영화, 정확히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영화 작가의 각기 다른 간격을 확인시켜 준다.
4. 재난 서사와 영화의 자리
이러한 간격과 시간 차는 국가와 문화권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감독들은 지속적으로 재난 이후의 풍경을 영화 속에 끌고 들어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제외하곤 재난을 있는 그대로 찍는 영화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노 시온은 「두더지」(2011)를 통해 현재를 억압하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저항과 젊은 세대의 절박한 외침을 전달했다. “평생 큰 행복이나 불행 없이 평범하게 살면 만족”이라는 주인공에게 목이 터져라 “힘내라”고 외치는 니카이도 후미의 모습은 가슴을 후벼 파는 에너지로 넘쳐난다. 진심이라 불러도 좋겠다. 모든 이를 속박하는 가족이란 사슬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아오야마 신지의 「도모구이」(2013)는 어떤가. 2019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는 도플갱어와 삼각관계 로맨스를 결합한 서사지만 그 속살은 재난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절박한 생존기에 가깝다. 어느 날 사라진 연인과 새로운 연인 사이에서 흔들리는 여자 주인공의 마음은 믿음이 불가능해진 삶을 사는 일본의 현재를 고스란히 표상한다. 일련의 영화들은 아무도 재난의 풍경에 직접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지만 마음속에 재난이 할퀴고 간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개인의 얼굴을 그린다. 재난은 일상을 해체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일본 청춘들의 흔들림과 고뇌를 미학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영화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품은 부채 의식이 각자의 화술로 발현된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한국 역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겪고 난 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세월호를 다룬 영화들은 정확히 파도의 단계를 따라간다. 황망한 사태 앞에서 긴급하게 사태를 단면을 보도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들이 우선 쏟아져 나왔고, 잠시 뒤 재난의 아픔과 공포를 소재로 한 김성훈 감독의 「터널」(2016)과 같은 상업 영화들이 극장가를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들의 상실의 크기를 더듬는 영화 「살아남은 아이」(2017)나 세월호로 자식을 떠나보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생일」(2018)처럼 살아남은 자들의 얼굴을 제대로 관찰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다시 한 번 재난은 평등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재난의 충격이 개인 앞에 도달하는 시간, 상처가 아무는 시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애도하는 시간, 뒤바뀐 일상과 세계를 버텨내야 하는 시간까지 서로 다른 시간들이 스크린 위에 재현된다. 재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간격이 서로 다른 시간들을 목격하는 행위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다. 시간을 늘리거나 압축하여 또 다른 시간을 창조하는 이 작업은 시간이 필요하다. 애도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재난이라는 사태에서 출발하여 재난을 당한 이들의 상태로 넘어오기까지 존재하는 시간 차를 기억해야 한다. 재난의 사태는 동시적으로 공유되지만 각 개인의 상태는 각기 다른 속도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재앙의 그날을 기점으로 시계가 멈추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없었던 일인 양 빠르게 흘려보내 버리기도 한다. 영화는 이러한 각기 다른 시간과 간격을 물리적으로 되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모든 영화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재난을 재현하고 재난 이미지를 소비하는 대신 재난 이후에 황폐해진 일상들을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재난이란 상황을 이야기로 설명하는 대신 재난으로 인해 불안해진 이들의 얼굴을 담아내는 것. 텍스트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지만 영화는 그 침묵과 무표정들을 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재난 영화에 반대한다. 재난 서사 끝에 다다르는 깔끔한 엔딩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얼룩들마저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그 순간 생략되어선 안 되는 것들, 대상에 대한 신중한 관찰과 이해의 시간마저 함께 쓸려 내려간다. 하지만 카메라는 도리어 그 얼룩을 찍기 위해 존재한다. 설명하는 대신 응시하는 것. 해석하는 대신 동참하는 것. 재난 앞에 마련된 영화의 자리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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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문강형준, 2011, 『파국의 지형학』, 서울: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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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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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망각과 싸우라, 세월호 이후 한국의 재난영화를 본다는 것은,” 2016, 10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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