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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30주년] 독일 통일 30주년
독일이 분단된 지 45년이 지난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동독의 재통일(German reunification)이 이루어졌다.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원래 서독은 이렇게 급진적인 통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한 직후 헬무트 콜(Helmut Kohl) 서독 총리는 통일을 목표로 우선 동·서독 간의 교류·협력을 강화하자는 ‘10개 항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그러나 상황은 훨씬 급박하게 흘러갔다. 1990년 초에 열린 동독의 자유선거에서 서독의 여당인 기민당이 지원하는 로타어 데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의 연정이 승리하자 동독 주민들이 서독과 신속하게 통일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1990년 5월 동독과 서독이 ‘통화·경제·사회동맹’을 맺어 서독 마르크가 동독에서 사용되는 등 경제·사회 통합이 급속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어 1990년 10월 3일자로 발효하는 통일조약을 동·서독 의회가 통과시킴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졌다.
올해는 독일 통일 후 30년이 되는 해이다. 독일 통일에 대한 평가는 시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통일 직전 동독인들은 “우리는 한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외쳤다. 통일된 지 얼마 지나지 않자 동·서독 주민들은 “과연 우리가 하나인가”라고 반문하기 시작했다. 1990년 독일 통일 후 30년이 지난 지금의 독일 정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래도 하나다.”
1. ‘우리가 국민이다’
1989년 9∼10월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동독 정권에 저항하던 주민들의 슬로건은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였다. 동독 주민들의 주권 의식이 드러난 구호였다. 게슈타포 등으로 철권통치를 했다고 알려진 동독에서 어떻게 이런 의식이 자랄 수 있었을까. 이는 당시 국제 질서의 변화와 큰 관련이 있어 보인다.
변화의 시작은 1985년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의 등장이었다. 고르바초프 연구자인 옥스퍼드대학교의 아치 브라운(Archie Brown)은 자신의 저서 『고르바초프 요인(The Gorbachev Factor)』에서 고르바초프는 “진화적 수단에 의해 혁명적 변화(revolutionary change by evolutionary means)”를 도모했다고 서술한다(Brown 1997). 고르바초프가 취한 진화적 수단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였다. 그는 경제개혁과 정치 변화를 동시에 추진해 소련 사회주의 갱생이라는 혁명적 변화를 이루려 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실패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이행으로 이어졌다. 1988년 고르바초프는 동유럽 위성국가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한 브레즈네프선언의 폐기를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소련의 경제 여력과 자신의 대내외적 이미지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할 당시 소련 경제는 장기적인 경기 침체와 심각한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동유럽 위성국가에 대해 개입하기를 꺼렸다. 더욱이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천명하며 개혁가의 이미지를 부각하려던 의도도 이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소련의 정책 변화는 동유럽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폴란드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Solidarity)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소련의 개입은 없었다. 이를 지켜본 동독 주민은 ‘우리가 국민이다’라는 자신감을 가졌다.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은 30만 명을 웃돌아 동독 자체 군대보다 병력이 많았다. 만약 소련의 개입 가능성이 컸다면 대규모 시위는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위뿐 아니라 서독으로 탈출도 이어졌다. 베를린을 통한 탈출 경로를 동독 정권이 막아버리자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로 몰려갔다. 소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헝가리는 이들을 받아들였으며 동독인들은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렇게 ‘발을 통한 투표(vote with feet)’가 이루어지자 동독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독 교회도 동독 주민의 주인의식을 일깨우는 데 기여했다. 기독교는 독일의 오랜 전통이자 문화였다. 동독 주민의 90% 이상이 개신교나 가톨릭 교인이었기 때문에 동독 정권도 교회를 없앨 수 없었다. 교회는 장애인, 노약자 등을 위한 사회복지 기관 역할을 했으며 서독 교회는 동독 교회의 이런 사업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동시에 동독 주민들은 교회라는 일정한 자율성이 있는 기관의 울타리 안에서 인권 의식과 시민 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1989년의 라이프치히 시위도 1980년부터 시행된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기도회에 영향을 받았다. 평화기도회는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일어나는 반(反)인권적인 문제들을 논의하는 대화의 장을 주민들에게 열어주었다. 그 영향으로 동독 교회 목사들은 1989년의 반정부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기도 했다.
서독과 동독의 지속적인 교류도 동독 주민의 의식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동·서독은 통일 직전까지 교역을 지속했다. 1980년 중반에는 동·서독 교역, 즉 수출과 수입이 각각 80억 서독 마르크(약 44억 달러)에 달했다. 동독은 경제적 목적으로 서독과 교역하기를 원했다. 서독은 동·서독 간의 경제적 의존성을 증가시키고 동독 경제가 지나치게 소련에 기대지 않도록 견제하고자 동독과 교역하였다. 그뿐 아니라 서독은 스윙(swing)이라 부르는 제도를 통해 1985년의 경우 총 8.5억 서독 마르크 이내에서 동독이 무이자로 서독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했다. 상호 방문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80년대 중반에는 동독 주민 약 200만 명이 서독을 방문했고 서독 주민 500∼600만 명이 동독을 방문했다. 서독 정부도 동독 방문자들에게 환영금(1980년대 말에는 1인당 1년에 100마르크)을 지급함으로써 서독 방문을 장려했다. 정부의 성격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시행된 서독의 대(對)동독 정책은 동독 주민이 ‘우리는 하나다’라는 의식을 갖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우리는 하나인가?
독일인들은 큰 흥분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통일을 맞이했다. 당시 콜 총리도 3~4년 후에 독일이 통일 덕분에 ‘번영하는 경제’가 될 것이라며 통일 이후 경제를 낙관했다. 그러나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이런 부푼 희망과 낙관적 전망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과연 하나인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문제는 경제였다. 독일 연방 정부와 서독 지역의 연방주에서 구 동독 지역으로 가는 재정 이전 지출은 통일 이후 2010년까지 약 2.1조 유로(2760조 원)에 달했다(통일부 2015: 127). 이는 2000년대 초 독일의 총국민소득과 비슷한 액수였다. 즉 매년 독일 국민소득의 4∼5%가량의 액수가 동독 주민과 경제를 위해 지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경제 규모는 통일 후 2년 동안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동·서독 간 격차도 지속되었다. 1992년 동독 지역 실업률은 16.1%에 달해 같은 해 서독 지역 실업률이었던 5.8%보다 훨씬 높았다. 이와 같이 높은 실업률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2005년 9월 말에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18.4%에 달했다. 그리고 통일된 지 15년이 흐른 2005년에도 동독 지역의 일인당 생산성은 서독 지역의 64% 수준에 그쳤다. 이러한 동·서독 간의 경제적 격차는 동독 지역 주민과 서독 지역 주민 간의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기대와 현실의 괴리는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는 서독과 동독 주민 사이의 갈등이었다. 많은 서독 주민은 동독 주민을 ‘평등주의 가치관 뒤에서 도덕적 해이를 즐기는 자’로 여겼다. 즉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를 상실한 게으른 자로 본 것이다. 반면 동독 주민은 자신들을 이류 시민으로 인식하는 서독인을 ‘거만하며 인색하며 잔인한 자’로 믿는 경향이 생겼다. PEW 조사에서 통일 후 1년 지난 1991년에 동독인들에게 삶에 만족하는 정도를 ‘0(완전히 불만족)∼10(완전히 만족)’으로 표시하라고 했을 때 7∼10, 즉 만족한다는 응답자의 비율은 15%에 머물렀다(Pew Research Center 2019). 또 서독인들도 1989년 이후 1991년까지 독일 변화가 생활수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묻는 질문에 46%의 응답자가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응답해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응답 비중인 30%를 크게 웃돌았다.
두 번째 반응은 통일을 위한 경제 정책, 특히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의 1:1 전환 비율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이었다.[1] 실제 화폐통합 전 여러 분석 결과는 동독 마르크의 가치는 그보다 낮다고 추정했다. 이와 같이 서독 마르크의 가치 대비 동독 마르크 가치를 고평가한 1:1 화폐통합은 동독 기업의 가격경쟁력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화폐통합 때문에 생산성을 웃도는 임금을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했던 많은 동독 기업이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반(半)만 맞는 말이다. 먼저 동독 화폐를 고평가하여 서독 마르크로 전환했다고 하더라도 노동시장이 유연했다면 그 충격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 2000 동독 마르크를 월급으로 받던 근로자가 1:1 화폐 교환이 이루어져 2000 서독 마르크를 받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근로자의 생산성이 2000 서독 마르크보다 낮을 경우 노동시장이 유연하다면 기업주는 임금을 낮추어 생산성 이하로 지급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환율 충격은 기업 파산, 실업 등의 실질적 충격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즉 핵심적인 문제는 노동시장의 경직성, 더 구체적으로 생산성을 훨씬 상회하는 최저임금제였다. 독일은 동독 근로자에게 적용되는 최저임금을 생산성 수준 이상으로 결정했다. 서독의 임금 결정 체계를 본받아 동독의 최저임금도 서독 노조 대표와 동독 노조 대표, 기업 대표들이 결정했다. 그런데 서독 노조와 기업 대표의 주된 고려는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대거 이주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기업 사유화 이후 자신이 계속 경영을 맡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동독 기업 대표는 최저임금이 높게 결정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 근로자의 노동생산성을 훨씬 초과하는 수준에서 최저임금이 결정되었다. 예를 들어 1991년 동독 근로자의 노동생산성은 서독의 35%에 불과했지만 임금은 51%에 달했다(von Hagen et al. 2002).
동독 경제 수준에 맞는 화폐 전환율이 결정되어야 했다는 주장은 경제적으로는 합리적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거의 실현 불가능했다. 1:1보다 동독 마르크에 불리한 수준에서 화폐통합이 결정되었다면 동독과 서독의 후생 격차가 더 크게 벌어져 동독 주민의 서독 이주가 더 늘어났을 것이다. 통일 이후 물가는 크게 올랐지만 소득수준이 그에 상응해 오르지 못한다면 동독 주민의 불만은 훨씬 커졌을 것이다. 이 문제는 독일이 취했듯이 화폐 전환을 통한 보조금 지급 형태가 아니라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보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인가’라는 반문은 경제 수준 차이가 큰 상태에서 두 지역이 통일될 경우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이다. 경제적 격차가 클수록, 사회 통합 역량이 낮을수록 불만은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서독 간 경제 수준 차이가 줄어들었고 이러한 불만도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3. 그래도 우리는 하나다
지금의 독일은 어디에 있을까? 앞에서 언급한 PEW 조사에 따르면 동독 주민이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는 비율은 1991년의 15%에서 크게 증가해 2009년에는 42%, 2019년에는 58%를 기록했다. 이는 2019년 서독 주민의 만족 비율인 64%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수치이다(Pew Research Center 2019). 동독의 가계소득은 이제 서독의 85% 수준으로 상승했다. 2019년의 실업률도 6.9%로서 2005년의 18.7%에 비해 크게 감소했고 같은 해 서독의 실업률인 4.8%와 비교하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제 독일인은 ‘우리는 하나’라고 견고히 믿는 듯하다.
이렇게 나아진 이유는 무엇인가? 통일이 완성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다는 점이 아마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정치적 통일은 단숨에 이룰 수 있지만 경제적 격차를 줄이고 통합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사람의 통합은 더욱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동·서독 주민은 45년 동안 다른 체제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치 규범과 인적 자본의 차이가 생각보다 많이 벌어졌을 것이다. 한 경제학 연구에 따르면 통일 후 15년이 지나도 서독 주민에 비해 동독 주민은 국가가 소득재분배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평등 지향성이 강하다는 것이다(Alesina and Fuchs-Schundeln 2007: 1507-1528). 이 논문은 이 차이가 완전히 없어지려면 20∼40년이 걸린다고 주장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서독 주민 간 인적 자본의 차이도 줄어들었다. 고연령층은 퇴장하고 서독 교육 체계에서 교육을 받은 새로운 세대의 비중이 늘었다. 동시에 영양 상태도 개선되었으며 시장경제의 이해도도 증가했다. 이는 동독 근로자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 최저임금보다 생산성이 더 높은 근로자가 많아진 것이다. 그 결과 2018년 동독 지역의 경제성장률은 1.6%로서 서독의 성장률인 1.4%를 앞섰다.
시간만이 긍정적인 성과에 기여한 것이 아니다. 독일 경제가 반전의 기회를 찾은 것은 2005년 하르츠 개혁(Hartz reforms)이라 불리는 노동시장 개혁이었다. 그전까지 독일은 ‘유럽의 병자(the sick man of Europe)’로 칭해지기도 했다. 하르츠 개혁의 주된 목적은 노동시장을 더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개혁 후인 2005∼2008년의 실업률은 이전에 비해 3.5%P 하락했다. 독일 통일 이후 지속되던 노동시장 경직성이 완화하자 동독의 경제적 잠재력이 더욱 부각된 것이다.
독일 통일은 완전한 의미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2019년 독일 정부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동독 주민의 57%는 자신들이 아직도 이류 시민으로 인식된다고 응답했다.[2] 이 수치는 앞으로 점차 줄어들 가능성이 높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데는 앞으로 30년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독일 통일은 한반도 미래에 많은 교훈을 준다. 독일의 경험은 경제적 격차가 큰 두 지역이 갑자기 통일할 경우 천문학적인 액수의 통일 비용이 소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른 체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함도 보여준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를 견디어 내면서 올바른 정책과 건강한 시민 의식이 합쳐진다면 통일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고 ‘하나 됨’에서 오는 안정과 행복을 선사할 가능성도 제시한다.
독일 통일은 우리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남한과 북한의 통합과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 경험은 보석같이 빛나는 교훈이다. 독일 통일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참고문헌
김병연, 2018, “체제이행과 독일 통일: 남북한에 주는 함의,” 『학술원논문집(인문·사회과학편)』 57(2): 313-335.
통일부, 2015, 『통일비용 분야 관련 정책문서: 10 독일통일총서』.
Alesina, Alberto and Nicola Fuchs-Schündeln, 2007, “Good-Bye Lenin (or Not?): The Effect of Communism on People’s Preferences,” American Economic Review 97(4): 1507-1528.
Brown, Archie, 1997, The Gorbachev Factor, Oxford: Oxford Univ. Press.
Pew Research Center, 2019, Global Attitudes Survey(2020.2.26 접속).
von Hagen, Jürgen, Rolf Strauch and Guntram Wolff, 2002, “East Germany: Transition with Unification, Experiments and Experiences,” ZEI Working Paper B19. University of Bonn, ZEI - Center for European Integration Studies.
- [1]
독일 통일의 경제 정책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김병연(2018: 313-335)을 참조하라.
- [2]
https://www.bundesregierung.de/breg-en/news/stand-der-deutschen-einheit-1675200(2020년 2월 26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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