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지평
기획특집
경계 넘기와 마이너리티의 구술사
1. 들어가며: 잊힌 기억과 침묵된 목소리
최근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한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단지 문화·예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치는 개인적 차원에서 조명될 때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개인적이고 특수한 것을 다루는 학문이 바로 구술사(oral history)다. 개인의 과거 경험을 기억을 통해 현재로 불러와서 서술하는 것이 바로 구술사이기 때문이다.
녹음기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구술사는 발화와 함께 사라지는 목소리를 기록함으로써 기존의 역사학이 외면해 온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을 역사의 지평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기실 역사학은 문헌 기록에 기초를 두는데, 문헌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지배층이었다. 따라서 구술사는 문헌 고증학에 기초를 둔 역사의 배타성에 주목하였다. 역사 시대 이래로 피지배 계층은 종이와 문자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하물며 하층민,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 난민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은 더욱 삶의 흔적을 남길 수 없었다. 따라서 구술사는 자신의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사람들을 역사의 무대로 초대한다.
1990년대부터 사람, 자본, 정보, 기술이 빠르게 세계적으로 이동하는 전 지구화의 흐름이 강화되어 많은 사람이 본국을 떠나 이주하게 되면서 현대인의 삶은 경계 넘기(border crossing)의 연속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경계 넘기는 항상 위험한 일이었는데, 경계는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고 사회적으로 지배 집단과 소외 집단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에는 식민 본국의 강제에 의해 타국으로 이주하는 디아스포라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조선 사람들이 만주, 연해주, 러시아, 일본 등지로 이주하였고, 대부분은 해방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탈식민 시대에도 전 지구화로 인해 세계적으로 이주가 일어나고 있다. 사회학자 김귀옥(2011)은 전자를 구 디아스포라라고 하고, 후자를 신 디아스포라라고 명명하였다. 현대사회에서는 구 디아스포라로 인한 해외 한인뿐 아니라 신 디아스포라로 인한 다양한 이주민 사회가 생기고 있다. 이러한 경계 넘기를 통해서 또 새로운 마이너리티(minority)들이 생겨나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구별은 차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주하면서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짊어지고 가는데, 이것들은 그 사람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자주 더 빨리 이동하면 할수록 자신이 누구인가가 중요해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붙잡고 있기 위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해진다(윤택림 2016: 56). 또 전 지구화는 국경의 경계를 약화시키는 초국적인(transnational) 문화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기억은 개인들, 집단들,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윤택림 2016: 39).
따라서 현대와 같이 미디어와 통신기술이 발전한 상황에서도 경계를 넘는 사람들과 경계 넘기를 통해 마이너리티가 된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자신의 삶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권력화의 한 방법이다. 영국의 구술사가인 폴 톰슨(Paul Thompson)의 대표적인 저서의 제목처럼 구술사는 “과거의 목소리(The Voice of the Past)”이고 구술사는 잊힌 것들에 대한 기억과 발성되지 못한 목소리들을 현재로 소환한다. 이렇게 구술사는 기존의 공식적인 역사에 균열을 내고 기억의 소환을 통하여 저항의 서사를 들리게 한다. 따라서 구술사는 개인의 역사이며 동시에 개인의 이야기로서,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해준다.
2. 구술사: 역사와 서사
한국 사회에서 구술사는 1980년대 말 사회적·정치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문헌 기록으로 규명될 수 없었던 5·18 민주항쟁과 제주 4·3 사건,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구술 증언(oral testimony)은 공식적인 역사에 균열을 내고 목격자들의 기억을 대항 기억(counter memory)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으로 인해 구술사는 사회적·정치적 효과를 인정받았고, 지속적인 기억 투쟁의 결과로 주요한 과거사들이 공식 역사에 편입하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주요한 대항 기억들이 공식 기억으로 인정되었지만, 여수순천 10·19 사건이나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 사건 등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과거사들이 남아있다(김득중 2009; 노영석 2015).
구술사 연구 초기에는 피해자·희생자들의 구술 증언을 통하여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구술의 내용이 중요했고, 규명의 근거로서 구술의 정확성이 중요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은 증거 수집에 필요한 구술 증언에 초점을 두었으며, 구술 증언은 문헌 기록의 부재를 채워주었고 새로운 증거 자료로서 채택되었다. 이때 구술 증언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은 내용, 즉 경험이 중요했다. 즉 구술 방식보다는 구술 내용이 중요했다. 예를 들면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구술 증언은 일본군의 강제 동원과 성폭력을 드러내는 증거 자료로서 신뢰성이 필요했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01). 필자의 한국전쟁 연구(2003)에서도 구술사 인터뷰 자료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동안 ‘빨갱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구술사는 역사적 경험을 서사(narrative)를 통해서 전달한다. 구술 자료는 구술성(orality), 주관성(subjectivity), 서사성(narrativity), 공동 작업적 성격을 지닌다. 구술은 문어가 아니라 구어이기 때문에 구술자(narrator/interviewee)의 언어적인 특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연행적인 성격이 있어 몸짓과 표정 등과 같이 비언어적인 특징을 동반한다(윤택림 2019: 82-83). 구술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서술이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주관성은 바로 개인적 특징을 드러낼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구술은 또한 이야기다. 개인들은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로서 서술하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서술의 형식들을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구술은 구술사 인터뷰를 통하여 구술자와 면담자(interviewer) 간의 공동 작업으로 생산된다(윤택림 2019: 89). 그래서 구술자와 면담자는 공동 저자(coauthor)가 되어 ‘권위의 공유(shared authority)’가 일어난다(Frisch 1990). 이러한 특징들이 있는 구술은 통계적 대표성은 없지만 다른 종류의 신뢰성(reliability)이 있다(포르텔리 2010).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해 수집된 구술은 사실적 진실(factual truth)을 밝히기 위해서 증거 자료가 되면서 구술자들에게는 문헌으로는 증명할 수 없거나 문헌과는 다른 서사적 진실(narrative truth)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윤택림 2019: 91).
구술을 통하여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구술 생애사(life history)다. 구술 생애사는 구술사 인터뷰를 통하여 한 사람이 태어나서 현재까지 살아온 삶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윤택림 2019: 176). 이것은 개인적 삶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역사이면서 자기표현으로서 삶 이야기이기도 하다. 구술자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 경험은 사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떤 개인도 자신이 태어난 시대, 세대, 지역, 계층, 젠더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 개인의 특수한 삶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이 개인적 경험의 구성성(constructedness)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Scott 1988). 그람시(Gramsci 1971: 353)에 따르면 “각 개인은 관계들뿐만 아니라 이들 관계의 역사의 종합(synthesis)이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과거의 요약체다.” 따라서 한 인간의 생애사는 그 개인이 살아온 시대적 특수성을 담으면서 매우 개인적이며 역사적이다.
그런데 구술자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할 때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즉 정체성(identity)에 대해서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하여 특정한 서술의 형식(narrative form)을 채택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생 할머니들의 경우 삶 이야기는 주로 고난 극복의 이야기나 바리공주 이야기, 여성 전사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는 반면, 동시대의 할아버지들은 주로 영웅담이나 모험담의 형식을 취한다(윤택림 2011b: 12). 구술자가 선택하는 서술의 형식도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한국 구술사 연구는 초기의 구술 증언 중심의 연구에서 구술 생애사 연구로 변화하여 왔다. 구술 생애사는 특히 여성, 하층민, 소외 계층의 삶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연구 방법이다. 구술 생애사 연구는 이제는 구술이 드러내는 경험적인 차원, 즉 이야기하는 내용뿐 아니라 이야기의 방식과 이유에 대해서도 분석한다. 구술 생애사 연구를 통하여 들리지 않았던(unheard) 사람들의 서사가 사회적으로 어떤 함의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3. 마이너리티와 구술사
초기 한국의 구술사 연구가 구술 증언을 통한 과거의 주요한 사건에 대한 연구였기 때문에 가장 많이 연구된 주제는 한국전쟁이었다.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민간인 학살들도 모두 한국전쟁과 관련된 구술사 연구들이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구술 채록은 여성 구술사라는 학문 분야를 열었고, 그 뒤로 다양한 여성 구술 생애사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구술사를 활용한 지역사 연구들도 활발히 되고 있고, 해외 한인에 대한 구술사 연구도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구술사 연구자들은 연구의 영역을 계속 확장하여 사회적 소수자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4년 한국구술사학회[1] 하계 학술 대회는 “사회적 소수자와 구술사”라는 주제하에 시각장애인, 성적 소수자, 미혼모, 결혼 이주 여성, 북한 이탈 주민, 외국인 노동자들의 마이너리티로서 겪는 삶의 경험을 구술사로 접근해 보았다. 이들은 통계적 기록의 대상, 사회복지의 대상으로 대상화되어 있어서 자신이 서술의 주체가 되는 기록을 남기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구술사는 이들이 서술의 주체가 되어 역사의 무대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실 구술사가 문헌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사람들을 역사의 뒤편에서 무대로 이끌어주었지만, 사회적 소수자나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연구는 또 다른 차원의 방법론적·이론적 논의가 필요하다. 첫째, 연구자(면담자)와 구술자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주요 사건의 피해자나 희생자, 평범한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와는 다르다. 성적 소수자와 미혼모는 가시화되는 것이 어렵고, 장애인, 결혼 이주 여성, 북한 이탈 주민, 외국인 노동자들은 접근이 어렵다. 구술사와 같은 질적 연구(qualitative research)에서 연구자는 라포르(rapport)를 통해 연구 참여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마이너리티에 대한 접근과 관계 맺기에 대한 더 섬세한 방법론적인 고민이 필요하다(조영주 2012; 이나영 2012).
둘째, 마이너리티 구술사 연구에서는 언어의 문제가 있다. 구술은 청각 자료이기 때문에 청각장애인의 구술은 구화로 되어야 하고, 결혼 이주 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 난민의 경우 외국어로 인터뷰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구술사 인터뷰가 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이루어질 때 통역의 문제가 따르기 때문에 한국어 인터뷰와는 어떤 다른 방법론적·이론적 쟁점이 있는지 더 논의가 필요하다.
셋째, 마이너리티 구술사 연구에서는 연구 윤리의 문제가 더 첨예하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접근하기도 힘들지만, 그들의 취약한 사회적 위치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더욱 연구 윤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개인 정보가 유출되어 사회적 낙인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연구 과정과 연구 결과물에서 세심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2]
좀 더 나아가서 2020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는 누구인지 질문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초국적인 문화 상황에서 경계 넘기를 하는 많은 이주자들이 새로운 마이너리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19와 같이 국경을 넘는 감염병이나 세월호 사건과 같은 재난의 피해자도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마이너리티가 될 수도 있다. 새로운 마이너리티들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과정과 구조, 전 지구적인 상황이 이들의 구술과 함께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구술사는 마이너리티와 친화적인 연구 방법이면서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이너리티가 구술사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이제는 마이너리티가 연구의 주체가 되는 ‘마이너리티의 구술사’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구술사를 통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서술의 주체가 된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마이너리티가 사회적 주체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서술의 주체에서 시작하여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의 삶이 변화할 수 있는 동력으로서 ‘마이너리티의 구술사’가 되어야 한다. ‘마이너리티의 구술사’가 되기 위해서 기존의 구술사 연구가 어떻게 진화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4. 구술 생애사를 통한 마이너리티의 서사들
필자는 역사인류학자로서 분단과 한국전쟁, 이산과 관련된 구술사 연구를 해왔다. 필자가 직접 인터뷰한 사람들은 빨갱이 마을 사람들과 미수복 경기도 실향민들이다. 이들은 탈식민 시대에도 구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구술 생애사는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잊힌 기억들과 침묵된 목소리들을 들려준다.
1) 빨갱이 가족의 서사
충남 예산군 시양리는 1989∼1990년 필자가 박사 학위 논문 작성을 위하여 현지 조사를 한 마을이다. 이 마을을 조사지로 선택한 이유는 ‘민중’이라고 할 수 있는 평범한 농촌 사람들이 어떻게 일제 식민 지배와 해방, 한국전쟁을 경험하였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양리는 좌익 사상가인 유찬길[3]이 예산군이 인민군 치하가 되었을 때 예산군 내에서 대표적으로 좌익 활동을 한 곳이다. 유찬길은 일제강점기부터 좌익 사상가였는데 해방 이후 남로당원이 되고 한국전쟁이 나자 보도연맹에 들어간 인물이다. 이 사상가의 영향으로 이 마을은 인민공화국 시기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좌익 활동을 하여서 ‘예산의 모스코바’로 불렸다(윤택림 2003).
현지 조사 시 유찬길의 가족은 필자의 주요 제보자(major informant)가 되었고 이들의 가족사는 이 마을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한국전쟁은 유찬길 가족이 남북으로 해체되는 사건이었다. 유찬길은 국군이 예산을 수복하기 전에 지방 우익에 의해 죽었고, 7남매 자식들 중 장남은 민청활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사형당했고, 차남은 의용군으로 가서 생사를 모르고, 장녀는 수복 후 경찰에 의해 유린당해 자살했다. 유찬길의 아내와 어린 네 자녀는 당진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와서 마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지주였던 유찬길이 해방이 되자마자 자신의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수복 후에 경제적 토대인 남은 토지를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찬길의 큰형과 자식들이 월북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 가족은 ‘부역자의 가족’, ‘월북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연좌제 때문에 사회적 진출이 불가능했다.
유근찬: (중략) 수복 후 경찰이 들어온 후 집안은 풍비박산되었죠. 남은 동네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빨갱이 가족을 탄압했어요. M면 치안대의 목표가 시양리였어요. 농사철이 되어 귀향했는데, 형사가 와서 서까지 갔죠. 1주일 동안 유치장 생활을 했어요. M면 지서장 정만옥이 누님에게 행패를 했는데 누님 덕을 본 것 같아요. 밤에 유치장에서 순경과 함께 나오면서 ”일생 동안 사상을 초월해 살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윤택림 2003: 211)
살아남은 유찬길의 아내는 필자의 현지 조사 시에도 결코 자신의 남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삼남인데 장남이 되어버린 유근찬은 자신의 구술 생애사를 통하여 분단과 전쟁의 희생물이 된 가족사를 전해주었다. 유찬길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M면의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반일 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 이후 좌익 활동으로 인하여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받지 못했다. 유근찬은 부친에 대해서 “민족주의자인데 해방 후 그만 죄익 활동을 하다 6.25 때 돌아가셨다”라고 말했다(윤택림 2003: 218). 그의 가족사는 ‘항일운동가의 가족’이면서 동시에 ‘빨갱이 가족’이라는 모순된 정체성을 드러낸다. 또한 그의 가족사는 분단과 전후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침묵되고 억압된 기억의 서사다.
2) 미수복 경기도 실향민의 서사
경기도 개풍군은 필자의 부모님의 고향이지만 필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경기도 개풍군은 현재 북한의 개성직할시와 개풍군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필자의 부모님은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다. 경기도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은 해방 당시 38선 이남이었다가 한국전쟁 후 북한이 되어버린 곳으로 미수복 경기도라고 불린다. 필자는 아버지와 같은 실향민 1세대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즉 미수복 경기도민의 역사가 없어지기 전에 구술사 인터뷰를 통하여 이들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다.
필자는 미수복경기도민회를 중심으로 미수복 경기도 실향민들의 역사를 구술 생애사 인터뷰를 통하여 재구성하였다. 필자는 미수복 경기도민들을 디아스포라의 한 유형으로 보고 현재 존재하지 않는 옛 경기도 지역을 기억함으로써 형성된 기억 공동체로 보았다. 그리고 이들의 한국전쟁 이후의 삶의 궤적을 이동식 문화기술지적 방법(mobile ethnogrpahy)를 통하여 추적하였다(윤택림 2019: 61).
해방이 되자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으로 이분되어 군정하에 들어갔다. 38선이 개성, 개풍군, 장단군의 북쪽을 지나가게 되어 미수복 경기도민들은 해방과 동시에 분단선, 즉 38선을 가장 먼저 경험하였고, 그로 인하여 한국전쟁 전에 이미 전쟁 전야에 있었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6월 25일 당일에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해서 이 지역 사람들은 거의 다 피난을 가지 못했다. 이들의 피난은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고향이 38선 이남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이 결코 북한 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 늙은 부모와 젊은 아내,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피난하였고, 한 달 정도 후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미수복 경기도 지역은 한강과 예성강이 만나는 지역이고 38선이 지나는 곳이어서 휴전이 될 때까지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이곳 지역민들의 삶은 이제 38선이 아니라 전선에 의해 운명이 정해졌다. 인민군과 중공군이 점령했던 곳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국군이 오면 부역자로 의심을 받았고, 국군의 후퇴와 함께 많은 사람이 피난을 떠났다. 한국전쟁 시 전선이라는 경계는 이들의 목숨을 결정할 수도 있었다.
휴전이 되자 고향이 북한이 되어버려 월남민이 되어 버린 이 지역 피난민들은 전후 남한에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지연과 혈연이 사회적 네트워크의 매개인 한국 사회에서 피난민들은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월남민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짊어지고 생존해야 했다. 이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의 경제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1992년 미수복경기도민회를 창립하면서 자신들의 ‘장소 만들기(place making)’를 해왔다(Gupta and Ferguson 1999).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미수복 경기도민의 존재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들의 서사는 ‘실향의 서사(narrative of displacement)’다(윤택림 2016: 388). 실향의 서사는 경계를 넘은 사람들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둔 남한 사회에서 자신들의 갈등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서사다. 개풍군 실향민인 곽종섭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하였다.
곽종섭: 근데 나 솔직히 우리 여기 이…… 여기 개풍군 사람들은요 이북 사람들은 아니예요. 다 이남 사람이지. 근데 시방 미수복이 됐지 이북 사람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삼팔(38) 이남 사람이지 이북 사람은 아니예요. 다만 우리가 미수복이라는 명칭을 붙여줘야지 이북 사람이라고 하는데 자꾸 이북 사람, 이북 사람 하는데 이북 사람은 아니예요. 우리는 사실. 이북 사람은 아니고요. 미수복 사람이죠. 우리는 사실. (윤택림 2016: 305)
개성 토박이 이미경은 “그 휴전으로 인해서 개성 사람은(강조하면서) 또 ― 두 번째 인제 영원한 실향민이 된 거죠“라고 말했다(윤택림 2016: 274). 미수복 경기도민이라는 기억 공동체는 분단과 이산 속에서 경계에서의 삶을 보여주고, 경계 넘기를 통해 사회적 소수자로서 정체성을 드러낸다.
5. 나오며: 치유를 위한 자기 서사
한국 근현대사는 질곡과 파행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역사적 상흔이 있다. 구술사 연구에 크게 기여한 초기의 구술자들, 5·18 광주민주항쟁의 희생자들,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은 대개 트라우마가 있다(윤택림 2011a: 384-385). 구술사는 역사적 상흔이 있는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통하여 억압된 기억을 소환하고 침묵된 목소리를 발화하게 하여 치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윤택림 2019: 355; 김귀옥 2013). 마찬가지로 사회적 소수자인 마이너리티의 구술사는 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일 뿐 아니라 이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역사적 상흔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트라우마의 치유는 사실상 구술사 인터뷰에서 시작될 뿐이며, 진정한 치유는 사회적 애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구술사를 통해 들리는 개인들의 삶은 역사이며 동시에 서사다. 국가, 민족, 사회라는 거대 주체에 가린 개인들의 목소리야말로 인간의 특수한 경험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 즉 인권과 생명 존중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모든 개인의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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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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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 2011b, “여성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시집살이 이야기를 통한 여성 서사 분석,” 『구비문학연구』 32: 14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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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pta, Akhil and James Ferguson, 1999, “Beyond Culture: Space, Identity and Politics of Difference,” in Akhil Gupta and James Ferguson (eds.), Culture, Power and Place,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Scott, Joan, 1988, Gender and the Politics of Histor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Thompson, Paul, 2000, The Voice of the Past: Oral History, 3rd e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 [1]
한국구술사학회는 2010년에 창립되었고, 『구술사연구』라는 등재 학술지를 발간한다.
- [2]
최근에 기관연구윤리심의위원회(IRB, Institutional Review Board)가 활성화되면서 연구 윤리가 강화되고 있다. 구술사와 같은 질적 연구에는 실상 생명과학에서 기원한 IRB의 연구 윤리 규정을 적용하기 어렵다. 2019년에 미국에서는 역사학, 문학, 저널리즘, 생애사 등과 같은 질적 연구에 대해서는 IRB를 적용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구술사학회는 구술사 연구 윤리 규정을 두어 IRB의 심사 없이도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하고 있다.
- [3]
이 글에 나오는 구술자의 이름과 시양리라는 마을 이름도 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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