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지평
메모랜덤
[의화단운동 120주년] 120주년에 돌아보는 의화단운동(1899~1901)
2020년은 경자년이다. 역사상 경자년에 일어난 사건을 돌아보니 국내에서는 4·19혁명이, 중국에서는 의화단운동과 아편전쟁이 있었다. 올해 120주년을 맞은 의화단운동은 1900년 중국 북부 지방 민중이 외세와 기독교에 반대한 운동으로, 8개국 열강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런 만큼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에까지 끼친 영향이 컸다.
이 사건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개혁·개방 이후 크게 달라졌으나 그 기원과 전개 과정이 워낙 복잡해서 제각각이다. 공동체를 지키려는 민중운동이라는 견해와 무지몽매한 배외 폭동이라는 견해가 좌우의 극단이라면, ‘찬양할 수는 없지만 비난할 수도 없다’는 견해가 그 사이에 있다. 우리는 의화단-교회-정부-제국주의 열강의 상호 관계에 유의하면서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의화권의 형성과 성장
의화단(義和團)은 권법을 훈련하여 신통한 무술을 익힘으로써 자신과 향촌 공동체를 스스로 지키려는 비밀결사에서 유래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권회(拳會)로 통칭되었으며 의화권, 매화권, 대도회 등이 모두 이 운동에 합류한 권회들이다. 이들이 관방문서에서 의화권(義和拳)으로 불린 것은 1808년이다.
청대 중국의 농촌에는 각종 비밀결사들이 활동하였는데 1860년대를 지나면서 종교형 결사가 쇠퇴하고 권회형 결사가 급증하였다. 이는 미륵불의 하생을 믿는 백련교 계통의 팔괘교 봉기가 진압된 데 따른 현상인 동시에, 태평천국 이후 사회가 군사화 되고 토비 집단이 횡행함에 따라 하층민들이 권회에 가입하여 가족과 향촌을 스스로 지키려 한 결과이다. 이때 하층민들이 의지한 또 한 조직이 기독교 교회이다. 1860년 기독교 포교가 허용되자 외국인 선교사가 불평등조약의 특권을 이용해 중국인 교민(敎民)을 토호나 관청의 수탈에 대해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권회와 교회는 19세기 말 중국의 향촌 민중이 자위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두 길이었지만, 한 마을에 동거하기는 어려웠다. 교회가 전통문화를 부정하였기에 1860년대부터 각지에서 양측 간에 교안(敎案)이란 이름의 충돌이 빈발하였다. 이때마다 정부와 지방관은 교회의 행태에 반감을 품었지만 열강의 위세에 눌려 교회 편을 들면서 다수의 권민을 체포해 처형하였다. 원래 권회가 반관적 비밀결사로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권회는 마을 단위로 도장을 설치해 권법을 익히는 한편 제단을 설치해 특정 신상을 숭배하면서 신내림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을 공유하였다. 권민이 급격히 불어남에 따라 백련교는 물론이고 옥황상제부터 관우와 항우에 이르는 각종 수호신을 모시는 민간신앙이 권회에 섞여 들어갔다. 그중에서도 신통한 무술 능력이 있는 권사(拳師)들이 조직을 이끌게 되었다. 참가자는 가난한 농민, 파산한 수공업자, 실직한 노동자와 상인 등이다.
권회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참여하는 이들의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우선 누구든지 권법을 익히면 신통력을 갖게 되어 총칼에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제단에서 행하는 ‘강신부체(降神附體)’라는 신내림 의식을 통해 그것이 가능해진다고 여겼으니, 더 이상 의지할 곳 없는 하층사회에 조성된 일종의 공동환상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안에서는 남녀와 노소를 차별하지 않았기에 소년과 여성의 의화단이 따로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한 마을 안에서 권회와 교회의 경쟁은 단순한 세 대결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양측이 각기 따로 섬기는 신과 신의 경쟁이었다. 양측의 대립이 맹신적 충돌로 비화하기 쉬웠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화북 지방의 권회는 청일전쟁 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현 단위를 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 배경은 다음 몇 가지이다. 우선 민생의 파탄이다. 전쟁에서 잇달아 패하면서 물게 된 천문학적 액수의 배상금은 결국 농민의 몫이 되었다. 관세가 낮은 외국 상품이 쏟아져 들어왔고, 공장·광산·철도 등의 자본 투자가 본격화하였는데 주로 화북과 남만주에 집중되었다. 기차와 기선이 기존의 운하 체계를 대신하자 직예·산동성에 걸쳐 있는 대운하의 운수 노동자와 이들을 상대하던 상인들이 대량으로 실직하였다. 재정난과 내정의 문란은 관료의 농민 수탈을 가중하였을 뿐 아니라 수리시설을 방치하게 하여 황하의 범람을 초래하였다. 1890년대에 황하는 거의 매년 범람하였고, 1899년 한 해에만 직예·산동성에서 16만 명 이상이 죽었다. 그런데 민생의 파탄은 교회가 급성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권회의 성장을 떠받친 또 다른 배경은 교회에 대한 민간의 깊은 분노와 반감이다. 교회가 도시에서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개혁 지식을 보급하기도 하였지만, 향촌에서는 조약상의 특권에 기대어 토지를 매입해 교세를 확장하고 소송사건에 개입해 교민을 비호하였다. 이런 이득을 노려 교민이 된 지주도 있다. 교민은 향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활동(마을 수호신 제사, 비용 분담, 노동력 출연 등)을 거부함으로써 공동체 질서를 위협하였다. 현이나 향촌 단위의 교안이 빈발하였고, 교회를 비호하는 열강의 침략이 가속화하자 위기감과 함께 반감이 극대화하였다. 산동성 서부의 관현(冠縣)에서 선교사와 교민이 마을 수호신 사당인 옥황묘를 헐고 교회를 세우려 함으로써 권회와 충돌한 교안은 10여 년 지속되다가 결국 의화단운동으로 이어졌다.
의화권에서 의화단으로
이상의 두 가지가 의화권이 급성장한 배경이라면, 의화단운동을 초래한 원인은 무술정변의 권력투쟁이다. 서양의 군사기술을 도입하는 양무운동이 30여 년간 진행되었으나 청일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국가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와중에 수구파 대신들이 최고 실권자 서태후의 환갑잔치를 위해 해군 건설 예산까지 끌어다 탕진하였다. 이에 1898년 6월 강유위(康有爲) 등이 광서제와 손잡고 근대국가를 향한 제도 개혁인 무술변법을 일으켰으나 100일 만에 수구파의 정변으로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구파의 핵심인 서태후와 그 추종 세력인 후당이 광서제 중심의 제당과 개혁파를 숙청함으로써 양측의 분열·대립을 가속화하였다. 더구나 살아남은 개혁파가 열강의 도움으로 해외로 망명하자 서태후와 후당은 그들의 권토중래를 경계하면서 수구배외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 무렵 지방관들이 의화권을 의화단으로 불러 자위단으로 인정하고 이용하자고 조정에 주청하였다.
이때 서태후와 후당은 개혁파와 제당의 구심점을 아예 제거해 버리려고 광서제의 폐위를 기도하였으나 열강과 양무파 지방장관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에 그들은 열강의 압력을 막아내면서 제당을 척결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의화단을 이용하는 도박에 나섰다. 1899~1900년 의화단이 급속히 확산되어 베이징과 톈진 등 대도시로 진입한 것은 정부와 지방관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맥락에서 일찍이 양계초(梁啓超)가 『중국역사연구법』(1922)에서 역사적 인과관계를 논하면서 무술정변이 없었으면 의화단운동이 그때 그런 형태로 일어날 수 없었다고 본 것이다.
의화단 조직은 강신부체 의식을 거행하는 마을 단위의 제단인 단구(壇口)를 기본으로 한다. 권민 수는 마을 크기에 따라 20명에서 수백 명, 수천 명으로 달랐다. 그 위에 총단구가 있으나 상하 간의 통속 관계는 없고 분산적이며 느슨한 조직이다. 이는 그 지도자를 권회의 권사를 따라서 사형(師兄)이라 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들의 주관하에 권법을 익히고 신내림 의식을 거행하여 정신력을 단련하였다. 그들 중에는 창과 칼로 무장하고 관현 교안의 지도자 조삼다(趙三多)처럼 신출귀몰하면서 관군을 격파한 사형도 있었다. 지방장관이 관군의 무능함을 슬쩍 가린 채 의화권을 자위단으로 인정하자고 한 것도 이런 장면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권민들은 사형의 영도하에 단구나 총단구별로 움직였다. 반청 구호를 내건 경우도 있지만, “청조를 도와 양놈을 몰아내자(扶淸滅洋)”는 구호를 내걸자 지방장관이 식량과 금전을 지원하였고 그 규모는 급속히 커졌다. 1900년 초부터 그들은 “모현 모촌 의화단”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교회와 외국인을 공격하면서 이를 정당화하는 각종 형태의 선전물을 제작해 배포하였다. 전통 질서의 수호자로서 교회에 반감을 품은 신사(紳士)들이 이들을 후원했다. 그러나 열강이 이를 당장 진압하고 관련자를 처벌하라고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기에 정부는 열강과 권민의 눈치를 살피면서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하였고, 지방관의 대책도 묵인과 토벌 사이를 오갔다.
의화단의 베이징 입성과 의화단 전쟁
의화단은 1900년 초부터 베이징과 톈진에 입성하더니 이윽고 관군과 함께 열강의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이는 서태후와 후당의 배외주의적 책략의 소산이다.
우선 청일전쟁 직후 산동성 순무(지방장관)가 의화권을 묵인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열강이 항의하자 서태후는 1898년 순무를 교체하였다. 신임 순무도 같은 정책을 이어갔기에 열강이 다시 항의하였다. 이듬해 3월 그 후임자 육현(毓賢)은 한발 더 나아가 의화권을 후원하면서 자위단으로 공인하자고 주청하였다. 이로써 잇달아 배외적 인물을 임명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분노한 열강이 그를 즉각 파직하라고 요구하면서 열강에 협조적인 원세개(袁世凱)를 후임으로 추천하였다. 서태후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1899년 말 원세개는 곧바로 휘하의 신식 군대를 동원하여 의화단 진압에 나서 마을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다. 여기에는 반(半)식민지 중국의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산동성에서 화를 면한 의화단은 1900년 초부터 이를 피해 북상하여 직예성으로 이동하였고 이윽고 수도 베이징과 톈진에 입성하였다. 중앙의 배외적 후당 대신들도 권민을 흡수해 이용하자고 건의하였다. 5월에는 서태후가 친히 의화단을 궁성 안에 불러들여 강신부체 의식을 시연해 보게 한 다음 권사를 칭찬하면서 궁 안의 대소신료들도 권법을 연마하고 권민을 호위병으로 삼도록 지시하였다. 후당은 ‘의화단 단규’를 제정해 의화단과 관군이 서로 돕고 연합할 것과 출정해서는 명령을 준수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이렇게 공식화된 의화단과 관군의 연합 세력이 각국 공사관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베이징 주재 각국 공사들은 그해 초부터 청조가 나서 당장 의화단을 진압하라고 요구하더니 4월에는 서로 연합하여 최후통첩을 보냈다. 2개월 안에 진압하지 못하면 각국이 연합군을 보내 토벌하겠다는 것이다. 의화단을 앞세운 청조의 배외 정책이 강화되자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 8개국 열강은 6월 초부터 공사관 호위를 명분으로 400여 명을 파병하였고 얼마 후 2차로 2000여 명을 베이징으로 진군시켰다.
이에 서태후와 후당은 전쟁이 개시된 것으로 보고 6월 21일 어전회의에서 광서제와 제당의 반대를 일축하고 선전포고를 내렸다. 이 과정에서 후당 대신들은 열강이 광서제의 실질적 친정을 회복하라는 요구를 해온 것으로 문서를 조작하여 서태후를 격분시켰다. 이 점에서 서태후의 선전 조서는 단지 황위 쟁탈을 위한 국내용이었다. 실제로 선전 조서는 각 성의 장관들에게 의화단을 “의병”으로 칭하면서 이들과 함께 “모든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라고 촉구할 뿐 어느 나라를 상대로 왜 전쟁을 하는지 명시하지 않았다. 이 조서를 외교 경로로 각국에 전달하지도 않았다. 그사이 동남 지역 지방장관들은 선전 조서가 가짜라며 무시하고 서로 연대하여 열강과 협조해 의화단을 토벌하였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강제로 이끌고 변장한 채 서안으로 피신하였다.
반면 열강의 연합군은 폭도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8월 초 3차로 증파된 1만 8000명이 의화단과 관군을 제압하고 수도를 점령해 포위된 공사관의 관원들을 55일 만에 구출하였다. 연합군은 황궁 안의 각종 보물과 은화, 진귀한 고서 등을 약탈하고 병사들에게 3일간 마음껏 약탈과 겁탈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 후에도 열강은 오히려 군대를 대거 증파하여 병력이 10만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이 13개월간 각 지방에 80여 차례 출동해 보복성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 보복 작전을 관군과 각지 교회의 교민들이 도왔으며, 그들에 의해 의화단으로 지목돼 몰살된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산동의 난민들은 바다 건너 조선으로 나와 부두 노동자나 상인으로 살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산동 화교는 상당수가 이렇게 생겨났다.
청조가 불과 2주 만에 강화를 요청했음에도 8개국 군대는 작전을 계속하면서 자국의 이해를 극대화하려고 경쟁하였기에 우여곡절을 거쳐 합의에 이르렀다. 1901년 7월 신축조약에서 청조는 배외 운동과 무기 수입을 금지하며 외국 군대를 수도에 주둔하게 할 것과 거액의 배상금(원리금 합계 청조의 10년 세입에 해당)을 지불할 것 등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열강의 요구에 따라 배외적 후당 대신들을 처형하고 파직하였으나 최종 책임자 서태후는 살아남았다. 이 조약으로 열강에 대한 중국의 종속과 굴욕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영향과 역사적 의미
이 사건이 중국사에 끼친 가장 주목되는 영향은 뜻밖에도 혁명 세력의 급성장이다. 신축조약으로 청조는 중국인의 조정이 아니라 “양인(洋人)의 조정”이 되었기 때문에 혁명파의 청조타도와 공화혁명 구호가 자연스럽게 민간에 수용되었다. 그런 청조가 살아남은 서태후의 지시로 뒤늦게 수구배외 정책을 포기하고 우리의 갑오개혁에 해당하는 근대적 제도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정권 연장을 위해 마지못해 나선 개혁이어서 민심의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개혁이란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과거제가 폐지되고 개혁 비용이 세금으로 부과되자 각지의 신사와 농민이 집단적으로 저항하여 혁명 정세를 조성하였다. 이런 변화들의 귀착점이 청조의 멸망을 초래한 신해혁명(1911)이다.
시야를 동아시아로 넓혀보면 러일전쟁(1904~1905)의 계기를 제공한 점이 주목된다. 8개국은 파견 병력의 규모와 역할에 따라 배상금을 나눠 갖기로 하고 철수하였다. 그중 러시아는 따로 군대를 보내 만주를 점령한 상태에서 철수를 미루고 있었다. 가장 많은 군대를 파병해 군사력을 과시한 일본은 러시아에 맞서 영일동맹(1902)을 맺고 개전 준비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만주의 러시아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신식 학교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으니, 이로써 중국인의 근대적 내셔널리즘이 출현하였다. 그런데 청조 정부가 신축조약에 따라 이를 배외 운동으로 간주해 진압함으로써 청조타도의 혁명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부패하고 무능한 청조 치하에서 민생이 피폐해지자 일부는 향촌의 자위 수단인 권회의 전통에, 다른 일부는 밖에서 들어온 교회의 특권에 기대어 살길을 찾았다. 국가권력은 열강의 눈치를 보면서 교회 편을 들었으니 권민은 봉기할 이유가 있어 봉기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의화단운동은 제국주의 시대의 원초적 내셔널리즘의 한 표현이다. 다만 무차별적이고 우매한 방법의 ‘수구적 배외’여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을 뿐이다.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개혁적 자주’를 추구한 학생들의 근대적 내셔널리즘과 비교된다.
이러한 권회의 한계는 그들의 낙후한 사회문화적 조건을 반영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국의 국정을 담당하는 자들이 그것을 부추기고 이용해 정권 안보를 꾀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청조는 권민을 토비로 여겨 소탕하다가 잠시 의병으로 간주해 이용하였을 뿐 끊임없이 권민(동시에 교민)을 배출하는 구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의화단운동은 결과적으로 그러한 국가에 대해 아래에서 가한 치명적인 일격이었으니, “부청멸양” 구호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국가와 민중의 관계를 다시 묻게 되는 경자년이다.
© 대우재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참고문헌
이은자, 2004, 『의화단운동 전후의 산동: 민간 종교결사와 권회』, 서울: 고려대학교출판부.
트위체트, 데니스 (김한식 외 역), 2007, 『캠브리지 중국사 10권 하: 청제국 말』, 서울: 새물결.
郭廷以, 1994, 『近代中國史綱 上』, 臺北: 曉園出版社.
鶴闌刪, 2015, 『天朝的狂歡:義和團運動興衰史』, 桂林: 廣西師範大學出版社.
李時岳, 1998, “義和團運動,” 馮林主編, 『重新認識百年中國 上』, 北京: 改革出版社.
자료
中國史學會主編, 2000, 『義和團』 1∼4권, 上海: 上海書店出版社.
저자 소개
기획특집 프런티어 메모랜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