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지평
기획특집
Editor’s - 위기의 시대, 희망의 내러티브를 성찰해 보다
1. 내러티브와 인간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곧 ‘슬기로운 동물’이라고 부를 때, 그 슬기로움은 어떤 성격일까? 무엇보다 개별 존재를 뛰어넘는 집단적인 슬기로움일 것이다. 지구 반대편 국가에서 개발한 과학기술의 성과를 우리가 배우고 우리 사회가 이루어낸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세계 각지에 전달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또 먼 과거에 선조들이 얻어낸 다양한 물질적·정신적 성취가 우리에게 전달되어 현대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이처럼 어떤 이가 이루어낸 성과를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격절(隔絶)한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탁월한 능력이다. 그와 같은 능력이 없다면 진보와 발전은 불가능하고 모든 사회는 매번 문화적 영점(零點)에서 다시 출발해야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사항은 지혜의 전달은 대개 이야기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생경한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것을 이야기 안에 담으면 훨씬 편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이야기의 본능이 있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탐닉한다. 이것이 어느 사회든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는 소이이다. 신화와 전설이든 문학이든 그림이나 영화든 과학 논문이든 이야기는 지극히 다양하고 풍부하다. 인간이 지혜로운 존재고 사회적 존재라고 한다면 사실 그것은 ‘이야기꾼 인간’, 다시 말해서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기에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문자를 몰랐기에 구술 문화(oral culture)에 의존했다. 오랫동안 문자는 소수 엘리트 지식층이나 종교인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민중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중요한 문화 수단으로 삼았다. 아마도 가장 원초적인 내러티브 형태는 다름 아닌 ‘옛날이야기’일 것이다. 「흥부와 놀부」, 「혹부리 영감」 같은 이야기들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문화 컨텐츠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현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로 자리 잡았지만 과거에는 어른들이 나누는 오락거리였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 조상들의 집단 심성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이며 인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각지에는 실로 엄청난 수의 민담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이야기들 중 다수가 전 세계 각지에 비슷한 형태로 퍼져 있다. 신데렐라 계열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이 이야기가 세계 각지에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은 일찍이 서유럽 연구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19세기 말에 메리언 콕스라는 연구자는 전 세계의 신데렐라 이야기 345편을 수집했고, 20세기에 행해진 후속 연구를 통해 유사한 이야기를 1000종 가깝게 수집했다. 이처럼 유사한 이야기들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는 ‘지리적 보편성’과 함께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이 이야기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다는 ‘시간적 장구함’이다. 1911년, 일본학자 미나카타 쿠마구스(南方熊楠)가 9세기의 문헌인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실려 있는 예셴(葉限) 이야기를 학계에 처음 소개했다. 이것이 완전한 형태의 텍스트(full text)로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신데렐라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완전한 텍스트는 아니라 해도 신데렐라의 이야기 요소, 예컨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것이 계기가 되어 배우자를 찾는 요소가 보이는 사례들은 고대 이집트의 문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도 신데렐라와 같은 이야기는 역사 초기부터 존재한 인류의 근원적인 사고의 표현물일 것이다.
19세기 이래 줄곧 지속된 중요한 가설은 현재의 민담이나 옛이야기가 원래는 신화였으며, 또 그 신화는 종교 의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 이런 이야기들은 지하수처럼 면면히 이어져 전승되면서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고 해석해 주는 기본 틀이 되었다. 오랜 기간 구술되어 전해오던 이야기들을 근대에 들어와서 문필가들이 채록하고 부분적으로 가필 수정한 판본들로 출판했다. 이 판본들은 태고의 종교적 내용은 많이 탈각했지만, 대신 인간의 내면적 성숙을 탐구하는 진지한 텍스트 역할을 했다. 그 안에는 오이디푸스적인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고, 인생의 고비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을 이기기 위한 용기를 내어야 하며, 평생을 함께 살아갈 사랑의 대상을 찾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겼다고 연구자들은 강조한다.
2. 내러티브의 기능
구술문화에 머물던 내러티브는 근대 이후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거쳤다. 무엇보다 인쇄술의 발전으로 지식과 정보의 보급·확산이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유럽의 경우 1450년경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나온 이후 15세기 말까지 책이 1500∼2000만 권 출판되었고, 다시 1500∼1600년 한 세기 동안 1억 5000만 권이 출판되었다. 인류의 정신적·지적 성취는 더 널리 확산되고 더 확고하게 보존되었다. 또한 정본(正本)의 확립이라는 방식을 통해 과거보다 더 엄밀한 방식으로 지식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매체는 역사의 큰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술 문화 단계에서 사람의 상상력은 직접 만나는 사람들 수준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부산과 광주에 사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교감하는 기회는 지극히 적다. 그런 상황이라면 지역주의 이상의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직접 만날 기회가 없는 광범위한 지역의 주민들 간에 우리가 한 민족이며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의식은 결국 상상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근대 민족국가는 ‘상상된’ 공동체이다. 그것을 가능케 한 중요한 매체는 신문과 국민문학이다. 신문을 통해 우리는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접하고 이해하고 공감한다. 또한 근대적인 문학작품들은 정서적으로 우리가 한 공동체에 속한다는 공감대를 제공한다. 거대한 허구가 민족을 창안해 낸 것이다. 한 개인이 기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듯 한 민족은 집단 기억을 강화하면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한다. 장구한 시간 동안 함께 살아왔고 함께 고난을 이겨내 오늘에 이른 운명 공동체라는 의식은 바로 그런 사실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그 의미를 거듭 확인해야만 유지된다.
현대에 들어와 문자가 아닌 또 다른 내러티브 수단들이 등장했다. 19세기 말에 선보인 영화야말로 대중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강력한 매체다. 구술 민담이나 문자 텍스트와 달리 영화는 강렬한 이미지와 그에 수반한 요소들을 동원하여 우리 내면에 메시지를 직접 각인하는 효과를 낸다. 더구나 많은 사람이 함께 감상하면서 감정을 공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집단적으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극영화, 다큐멘터리, 뉴스, TV 드라마 등 무수히 많은 영상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영상을 제작하는 집단―국가든 대자본을 가진 회사든 특정 목적이 있는 사회 조직이든―이 부과하는 이데올로기에 자신도 모르게 중독될 위험도 있다. 영화뿐 아니라 만화, 웹툰, 게임 등 또 다른 매체들이 널리 확산되고 있고 광범한 대중에게 특유의 내러티브들을 부과한다. 오늘 우리는 가히 내러티브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옛날이야기나 문학작품, 연극·영화, 웹툰에 이르기까지 내러티브를 담아내는 모든 수단은 여전히 같은 기능을 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읽어내고 인간 내면세계에 대해 성찰하는 소재이자 분석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의롭게 규칙이 적용되는가, 행복은 무엇이며 어떨 때 그것이 가능한가, 우리 모두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단순하면서도 실상 지극히 소중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질병이 세상을 위협하고 경제적 곤궁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는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일이리라. 우리 삶과 사고와 감성의 결을 구성하는 내러티브를 재점검하고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새로운 내러티브들을 찾는 일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천일야화』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왕비가 자신을 배반한 사실에 절망한 샤흐리야르 왕이 매일 밤 처녀를 불러다가 잠자리를 같이하고는 이튿날 아침에 목을 베어 죽여 버리는 참담한 일을 계속했을 때 그의 마음을 돌린 것은 이야기의 힘이었다. 샤흐라자드는 매일 밤 왕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되 일부러 이야기를 끝마치지 않음으로써 왕이 다음 날 밤에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했다. 샤흐라자드가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는 대개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천 날 밤 동안 이야기에 빠진 왕은 마침내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이야기의 힘’이 왕의 잔혹한 광기를 치유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기에 빠진 현대사회에서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내러티브의 가능성이 있을까?
3. 위기에서 희망으로
이번 호에서는 위기의 시대를 맞아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내러티브를 점검해 보기로 했다. 4개 분야의 전문가들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통찰해 보고 순정한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김기봉 교수의 「‘이야기꾼 인간(Homo Narrans)’과 역사」는 역사의 내러티브가 오늘날 어떤 의미인가, 또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를 묻는다. 김 교수가 인용하듯,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본성적으로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정의했을 때 그 의미는 인간은 오직 폴리스 안에서만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고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이야기를 통해 다른 개체와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하며 선한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이성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2500년 전의 폴리스에서 현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인간 사회 집단은 실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상상의 공동체’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학습하고 세대를 넘어 축적되어 집단 기억으로 작용하는 서사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한순간 살다 사라지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초월적인 위대함 속에 몸과 영혼을 맡긴 역사적 존재, 곧 호모 히스토리쿠스(Homo historicus)라고 자각하게 되었다.
김기봉 교수가 강조하는 바는 역사적 사실이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해석이라는 점이다. 과거에 관한 세세한 지식으로 현재의 우리를 옭아매는 게 아니라 그 자료들에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일구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는 과거의 발자국을 참조해서 미래의 나아갈 길을 찾게 해 주는 삶의 지도로 오랫동안 유용하게 사용됐다. 하지만 이전의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야만 하는 21세기 인류에게 과거의 사례를 기반으로 해서 제작된 삶의 지도가 무슨 쓸모가 있는가?” 새로운 시대의 역사학은 지난 시대에 대한 강고한 집착이 아니라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그리는 상상”에 가까우며, 그것을 내비게이션 삼아 경험한 적이 없는 미지의 길을 미리 가보려는 시도이다.
홍성욱 교수의 「과학과 내러티브」는 통념상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조합인 과학과 내러티브 간의 관계에 대해 고찰한다. 사실 과학계의 일반적인 관습은 내러티브에 대해 부정적이다. 잘 맞지 않는 데이터를 이리저리 꿰어서 흡인력 있는 내러티브를 만든다는 것은 훌륭한 과학자라면 오히려 피해야 할 함정이다. 이 지점에서 홍성욱 교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과학이 내러티브와 무관하다’는 언명 자체가 일종의 내러티브가 아닐까? 달리 말하면 “과학은 스스로 내러티브와 무관하다는 내러티브를 마치 사실인 언명처럼 만듦으로써 내러티브를 성공적으로 잘 사용한 학문은 아니었을까?” 홍성욱 교수는 과학의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등장한 세 가지 내러티브의 사례를 제시해 보인다. 첫 번째는 과학이 종착점에 가까워졌다는 내러티브, 다시 말해 과학에서 의미 있는 발견은 이제 모두 이루어졌고 과학 연구에는 권태로운 측정만이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서로 다른 도량형(weights and measures)의 존재를 서로 다른 언어와 비교하면서 이런 상황이 과학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는 내러티브이다. 세 번째는 진화론이 사실이면서 동시에 이론이라는 내러티브로서, 창조론과 벌이는 논쟁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러티브다.
이 사례들을 통해 필자가 확인하는 바는 과학 역시 공동체의 활동이라는 사실이다.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려면 공동체를 설득해야 하며, 결국은 유력 정치인들의 후원을 얻어내고 연구비를 수주해야 하고 반대자들과 효율적으로 싸워나가야 한다. 이때 필수적인 일이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서 자신과 타인을 설득하는 일이다. 과학이 종착역에 이르지 않았는지, 도량형의 통일이 언어의 통일과 흡사한지, 진화가 사실이면서 동시에 이론인지를 반복해서 고민하는 것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일들이다. 홍 교수는 과학이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활동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내러티브에 대한 더 깊은 관심과 후속 연구를 통해 과학을 조금 더 우리에게 가까운 것으로 다가오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송경원 기자의 글 「영화가 재난을 소비하는 방식, 그리고 카메라의 가능성에 대하여」는 이론적인 탐구를 기반으로 하여 전염병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을 예리하게 살펴본 글이다. 위기의 시대에 영화는 통상적으로 어떤 기능을 해왔던가? 영화 산업의 속성으로 인해 많은 재난 영화가 익숙한 일상이 파괴되는 파괴의 스펙터클을 제공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기묘한 쾌감을 느끼게 하는 이른바 ‘네로 콤플렉스’ 사업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재난을 두려워하지만 재난의 이미지는 탐닉한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재난 상황은 실제로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전하게 즐기는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재난을 소비하는 대신 영화가 다른 기능을 할 수는 없을까? 영화는 재난을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재난 이후에 황폐해진 일상들을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재난이란 상황을 이야기로 설명하는 대신 재난으로 인해 불안해진 이들의 얼굴을 담아내는 것”이 한 예다. 텍스트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지만 영화는 침묵과 무표정들을 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으며, 대상에 대한 신중한 관찰과 이해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살려낼 수 있다. “설명하는 대신 응시하는 것. 해석하는 대신 동참하는 것.”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재난에 처한 사회의 아픔을 전하고 치유의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윤택림 소장의 「경계 넘기와 마이너리티의 구술사」는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내러티브 활용 가능성을 타진하는 구술사(oral history)를 소개한다. 구술사의 기본 임무는 “개인의 과거 경험을 기억을 통해 현재로 불러와서 서술하는 것”이다. 그 장점은 명백하다. 기존의 역사학이 외면해 온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을 녹취함으로써 그 사람들을 역사의 지평으로 데려온다는 것이다. 많은 역사학자가 잘 인식하는 바처럼 기존 역사학은 문헌 기록에 기초를 둘 수밖에 없는데, 그 문헌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지배층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학은 지배층 편향적인 시각을 면하기 어렵다. 구술사는 이와 같은 한계를 돌파하는 효과적인 방법론을 제공한다. 빈민,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 난민 등 삶의 흔적을 남길 수 없는 사회적 소수자에게 말을 걸어 역사의 무대로 초대하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야말로 이런 적극적 자료 개발과 역사 인식의 확대, 새로운 내러티브의 생산이 절실히 필요한 사회다. 광주 5·18 희생자들, 제주 4·3 피해자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처럼 역사적 상흔이 있는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통하여 “억압된 기억을 소환하고 침묵된 목소리를 발화”하게 함으로써 이들의 역사를 기록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국가, 민족, 사회라는 거대 주체에 가린 개인들의 목소리야말로 인간의 특수한 경험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 즉 인권과 생명 존중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는 윤 소장의 주장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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