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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 페스트 300주년] 마르세유 페스트 300주년
1. 선진적 검역 체계를 갖춘 항구도시 마르세유
1720년 5월 25일 상선 그랑생탕투안(Grand-Saint-Antoine) 호가 레반트 지역에서 고가의 화물을 선적하고 남프랑스 최대의 항구 마르세유에 도착하면서 이 대도시에서는 상상하지 못하던 재앙이 시작되었다. 이 선박이 입항한 지 채 한 달이 못 되어 도시민 중 사망자가 나왔고, 이어 도처에서 희생자들이 발생하면서 도시는 거대한 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었다. 약 2년에 걸친 역병으로 마르세유 시민 약 10만 명 중 4∼5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프로방스 지역 약 40만 인구 중 12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 도시는 선진적인 검역 체계를 발전시켜 온 덕에 그동안 전염병의 위험을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당시 지중해 항구들은 전염병, 특히 페스트의 발병에 민감했다. 페스트가 중세 말 이래 중동에 풍토병적 성격으로 정착해 그곳과 빈번히 교역하는 지역들에 항구적인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마르세유와 프로방스 지역은 1580년 전후로 여러 차례 페스트로 인해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다(Biraben 1975: 382-388). 마르세유 시는 이런 위기를 겪을 때마다 해양을 통한 감염을 막기 위해 공중보건 제도와 검역 체계를 보완하고 시설도 확장했다. 검역 조치는 본래 베네치아에서 1377년에 처음 도입하였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에 속한 라구사(현재 두브로브니크) 항구에서는 역병이 발생하였거나 발생이 의심되는 지역에서 오는 선박에 대해 30일 격리 기간을 의무화해 역병이 이탈리아로 유입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선박을 엄격히 통제한 상태에서 사람들을 격리하였고 화물을 햇볕에 쏘이고 환기하여 정화했다. 그런데 30일이 지난 후에도 발병한 사례를 확인하자 법적 검역 기간을 40일로 연장했다. 수전 스콧이 16세기 말 영국 펜리스의 교구 기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페스트의 잠복기는 32일이었고, 첫 증상을 보인 지 5일이 지나면 통상 사망에 이르렀다(스콧·던컨 2005: 175). 이와 같은 통계자료를 감안하면 40일 격리 기간의 설정은 경험에 토대를 둔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베네치아 시스템이 효력을 발휘하자 점차 유럽의 주요 항구도시들도 이를 도입했다.
마르세유는 프랑스 남부에서 선박과 승객에 대한 검역 시설과 공중보건 규정을 구비한 최초의 항구였다. 1557년 도시의 남동쪽(검역소 1)에 검역소를 처음 건설한 이래 북서쪽(검역소 2)과 항구에 가까운 서쪽 해안(검역소 3)까지 각각 하나씩 추가하여 18세기 초에는 도시로 향하는 입구에 세 곳이나 설립하였다. 검역소는 부두 시설, 진료소, 거주 시설, 창고 등을 갖추었고 주변을 높은 벽으로 둘러쌓아 전염병이 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봉쇄했다(Devaux 2013: 172).(<지도 1> 참조) 마르세유에서는 통상 항구에 들어오는 모든 선박에 대해 검역을 실시했는데, 검역소에는 시의회에서 권한을 위임받은 공중보건 위원 16인이 상주하며 업무를 봤다. 이 위원들은 상인, 교역업자, 선장, 의사 등 시민 중에서 선발되었고 시의원도 두 명 포함되었다. 이들은 선원, 승객, 화물 등에 대해 검역 기간을 결정했고, 선박에서 역병의 감염이 의심되면 선원과 화물을 도시에서 상당히 떨어진 남쪽의 자르(Jarre) 섬에 격리하였다. 위원들은 전염병 발병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곳을 지나온 선박들을 확인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16세기 이래 지중해 전역에서는 선박이 방문한 항구에서 전염병의 발생 여부를 기록한 보건증 발급도 점차 의무화되었는데, 이 증명서를 근거로 격리 과정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Gensini, Yacoub and Conti 2004: 259). 이와 같은 감시 체제는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페스트가 1698년에서 1702년 사이에 알제에서 발생했고 그 후에도 지중해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병했지만 마르세유는 오랜 기간 역병의 피해를 크게 겪지 않았다.
2. 전쟁보다 위험한 선주의 탐욕과 지배계층의 이해관계
그랑생탕트완 호는 1719년 7월에 마르세유를 떠나 그리스와 레반트 지역의 항구들을 경유했다. 그리고 도중에 배의 정비를 위해 트리폴리(레바논)에 정박했는데, 거기서 화물을 일부 실었고 키프로스에서 온 터키인이 다수 승선했다. 그 후 항해를 계속하던 중 1720년 4월 5일 트리폴리에서 탑승한 한 터키인이 앓다가 사망하였고 이어 일부 선원들도 목숨을 잃었다. 전염병의 발병을 어느 정도 인지한 선장은 5월 17일에 이탈리아 리보르노에 입항을 시도했다. 선장은 검역 과정에서 승객 한 명과 선원 열한 명이 사망한 사실을 밝혔는데, 심지어 입항하던 날에도 추가로 선원 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검역소의 의사들은 사망 원인을 악성 열병(malignant fever)으로 판정하고 선박의 정박을 허용하지 않았다. 5월 25일 드디어 본거지 마르세유에 다다르자 선장 장-크리스토프 샤토(Jean-Christophe Chataud)는 마르세유 서쪽 프리울 열도의 포메그(Pomegues) 섬으로 향했고 그곳에 배를 정박했다. 이틀 후 배를 점검한 검역관들은 선원들이 사망하거나 아픈 이유가 열병이라고 판단하고 선박과 선원들에 대해 자르 섬에서 40일간 격리할 것을 결정했다. 그렇지만 얼마 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그 결정을 번복했다. 그리고 선박은 그곳에 둔 채 고가의 직물을 도시 입구의 제3검역소 라졸리에트(La Joliette)로 이송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본래 전염병이 의심되기만 해도 자르 섬에 격리되어야 했으나 유독 이 상선에 대해서만 비정상적인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선주인 마르세유 시의 부시장 장-바티스트 에스텔(Jean-Basptiste Estelle)이 검역소의 결정에 직접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선주는 7월 마지막 주 마르세유 북서쪽 보케르에서 열리는 남부 유럽에서 가장 큰 정기시에 선적한 화물을 차질 없이 공급하고자 한 것이다(Zysberg 2007; Devaux 2013: 173에서 재인용).
그 후 이 상선의 선원, 화물을 운반한 짐꾼, 심지어 검역관까지 연이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역소의 의사는 여전히 상한 음식으로 인해 전염성이 없는 열병이 발생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시 정부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계속되자 다른 의사 두 명에게 사망 원인에 대한 소견을 부탁했다. 7월 8일 이 의사들은 사망한 짐꾼들의 서혜부에서 종기를 비롯해 림프절 페스트의 증상을 명백하게 확인했으며, 그들이 화물 중 면화 꾸러미를 개봉해 운반하는 과정에서 페스트에 감염되었을 것으로 판단했다(Naphy and Spicer 2001: 134-135). 위원회는 서둘러 상선을 자르 섬으로 이동하고 사망자의 시체와 의복을 불사르고 선박의 화물을 봉인하는 등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이미 무방비 상태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페스트균은 라졸리에트 검역소에 하역한 화물들과 그것을 운반한 짐꾼들을 통해 도시로 확산하였으며, 선박의 승객들도 20일 이하의 단기간만 격리되고 도시로 들어갈 수 있었기에 그들을 통해서도 감염이 이루어졌다.
마르세유 시민 중에는 6월 20일에 전염병으로 인한 첫 번째 희생자가 나왔고, 6월 28일 이후로는 그 수가 현저히 늘어났다. 시의회 구성원들은 교역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우려해 가급적 페스트 발병 사실을 함구하려 했다. 도시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교역과 이해관계가 있어서 그들 중 누구도 교역의 단절로 인해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일단 페스트가 발병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유언비어까지 퍼지고 있었다. 주변 도시 엑상프로방스 의회는 이미 7월 2일에 마르세유와의 접촉을 차단해 버린 상태였다. 도시 정부는 뒤늦게 페스트의 발병 사실을 인정하고 지사와 국왕의 섭정[1]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웃 도시의 차단으로 마르세유 내에서 식량 공급이 원활치 않아 기근 사태가 벌어졌고 취약 계층에는 견딜 수 없는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도시의 질서가 점차 와해되었고, 일부 시민은 심지어 반란을 일으켰다. 감염자의 증가 속도도 점점 더 빨라져 7월 말에는 페스트가 도시 전체에 확산하였으며 8월에는 인명 피해가 절정에 이르렀다. 도시의 상황이 점점 악화하자 도피를 선택한 사람도 크게 늘어났다. 이 도피자들로 인해 페스트는 널리 프로방스 지역까지 퍼졌다.
도시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이 상황에서 군대가 개입되었다. 마르세유 군사령관 슈발리에 드 랑즈롱은 9월 초에 왕국의 섭정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엄격한 법 집행을 다짐하며 무력으로 질서를 회복했고, 죄수들을 징집해 거리에 쌓여 있던 시체들을 치우고 대규모 무덤구덩이에 매장했다. 과감한 조치들로 인해 마르세유의 상황은 10월 말에 비로소 진정세로 전환되었다. 반발이 있었으나 군대는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방역선을 사수해 페스트가 왕국의 중심부로 확산하는 것을 방어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마르세유 시에서 페스트가 재차 발생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1722년 말에야 비로소 종식되었다. 주변의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는 다음 해까지 산발적으로 역병이 이어졌다.[2]
마르세유 페스트는 대다수가 이 역병의 위험에 대해 망각하고 있던 시점에 발생했다. 상업적 이해관계가 있는 마르세유 부시장의 압력으로 인해 안전의 보루이던 공중보건위원회는 소임을 다하지 못했고 안일한 처신으로 방역망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검역소의 담당 의사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를 주저함으로써 혼란을 부채질하였다. 베르트랑을 비롯해 도시 내에는 페스트 발병을 경고한 의사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런 견해들을 무시함으로써 공동체적으로 대응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고 도시 전체를 최악의 재앙으로 몰아넣었다.[3] 1720년 마르세유 페스트를 키운 주범은 방심에 기반을 둔 탐욕과 부패였다.
3. 전염병의 질곡 – 페스트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국제보건기구(WHO)가 ‘판데믹(Pandemic)’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정립한 것은 최근이지만, 세계적 규모의 대유행을 의미하는 판데믹은 한동안 페스트와 동일시되었다. 페스트가 역사상 세 차례나 세계적 차원으로 확산하였기 때문이다.[4] 그중에서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라는 악명이 붙은 제2차 판데믹은 1347년에서 1353년 사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였다. 의견 차가 있지만 페스트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유럽 인구의 45%인 약 4,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5] 그리고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유럽 못지않게 인구의 1/3이 희생되었다(Borsch 2005). 1720년의 마르세유 페스트로 제2차 판데믹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1743년에는 메시나에서 페스트로 4만 80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1770∼1771년 사이 모스크바에서도 이 전염병으로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제2차 판데믹의 초기 국면이 지나간 후 이 전염병은 대체로 풍토병적으로 성격이 바뀌어 광범위한 영역보다 지역적·국지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로 인해 역병의 전모나 피해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기록이 꾸준히 남아 있고 인구통계를 파악할 수 있는 곳에서는 중세 말기는 물론 근대 초에 이르기까지 역병이 유럽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발병했음이 확인된다(박흥식 2007: 28-29). 유럽 내에서 유일하게 일국 단위의 통계가 있는 잉글랜드에서는 14세기에 적어도 페스트가 4차례 (1348∼1349년, 1361년, 1369년, 1374년) 대규모로 발병했다. 그리고 15세기에도 1413년, 1434년, 1439년, 1464년에 전국적인 규모로 이 역병이 발생했다. 캔터베리의 크라이스트처치 수도원 등의 기록에 따르면 그 사이에도 10년에 한 번 꼴로 16세기까지 계속 발생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전체 통계는 없지만 개별 도시의 통계가 가장 풍부하다. 당대 대표적인 도시인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사례는 역병의 피해를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피렌체는 1348년의 경우에도 피해가 컸지만, 그 후로도 1363년, 1374년, 1383년, 1390년, 1399∼1400년, 1411년, 1417년, 1430년, 1448년, 1456년, 1478년, 1495∼1498년 등 15세기 말까지 총 13회 발생했다. 베네치아의 경우 1348년 이래로 300년간 20회 이상 페스트가 발병했다. 게다가 16세기 이후에도 심각하여 1575∼1576년과 1630∼1631년 사이 발생한 페스트로 각각 당시 인구의 약 1/3이 감소하였다. 특히 후자는 베네치아 해상 권력이 쇠락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처럼 페스트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중세 말과 근대 초 내내 유럽 역사의 구조적 속성을 이루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뒤에 발생한 전염병의 피해가 제1차 페스트의 피해에 못지않았다. 이 역병이 근대 초 유럽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었더라도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은 분명하다.
페스트에 대한 당대인의 기록으로는 런던 페스트 때 새뮤얼 페피스(Samuel Pepys)가 남긴 상세한 일기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 전염병이 발병하던 시기 런던의 상황을 세밀하고 체계적으로 기술했다(Pepys 1970-1983). 그의 기록에 따르면 1665년 4월 말부터 시작된 페스트는 집단적인 죽음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역병으로 교역이 중단되었고, 부유한 시민들은 도피를 선택했으나 빈자들은 떠날 수도 없어 처참하게 생활하다 죽음을 맞이했으며, 일상은 단절되었고, 거리에 날마다 쌓여간 시체는 일일이 신분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 대규모 구덩이에 매몰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가족들조차 사제 없이 진행되는 고인의 마지막 길을 동행할 수 없었다. 통계에 따르면 1665년 흑사병으로 런던에서만 68,597명이 사망했다. 이는 당시 도시 인구 46만 명의 약 15%에 해당했다. 이는 도피해 사망한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은 통계이다.
4. 사회의 근본적인 전환을 촉진하는 판데믹
유럽 사회는 반복된 페스트로 인해 인구가 크게 감소했을 뿐 아니라 이어진 국지적인 역병으로 상당 기간 인구를 회복할 수 없었다. 이 역병이 지속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유럽의 인구는 1300년 이래 급격히 감소해 1460년 무렵에 최저점에 이르렀고, 그 후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1300년의 인구를 회복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인구의 대대적인 감소는 모든 방면에 걸쳐 연쇄적인 변화를 초래했으며, 무엇보다도 심각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낳았다. 그로 인해 농촌에서는 소작인들의 지위가 개선되어 이들이 영주에게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할 수 있었다. 경작되지 않는 땅이 늘어나면서 버려진 폐촌들도 많아졌다. 위기에 직면한 영주 중 일부는 시대착오적으로 예전의 무거운 부역을 다시 부과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농민들의 반발로 인해 관철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꾸준히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는데, 이는 소작인의 노동력에 의존하던 장원제의 위기를 뜻했다. 농경지를 양을 방목하는 목초지로 전환하고 그곳에 울타리를 두르던 인클로저는 그전에도 조금씩 진행되었지만 흑사병 이후 본격화되었다. 양모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던 것도 이유였지만, 농경에 비해 적은 노동력을 투입해도 된다는 점이 더 본질적인 요인이었다(Hatcher 2009).
도시들도 역병으로 인한 희생자가 많았지만 농촌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어느 정도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과거에 비해 노동자들의 임금이 크게 상승했다. 잉글랜드에서는 고용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법으로 임금을 제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한편 임금노동자들의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시 정부나 고용주와 분쟁이 발생했고, 때로는 봉기나 폭동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해짐에 따라 몇몇 길드에서는 여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중세 말에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길드도 출현했다. 이 시기에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한 것은 이런 변화된 상황 때문이다. 농촌과 도시 공히 사회적 유동성이 증대하면서 중간 계층과 하층 계층의 자유와 기회가 확대되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위기를 관리해야 할 필요 때문에 집중화된 정치권력도 필요해졌고, 검역 제도를 비롯해 환경과 위생도 개선하였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진행되었다.[6]
그런데 유럽 문명은 자칫 절멸할 수도 있던 치명적인 위기에서 어떻게 근대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페스트로 인해 사회와 경제에 본질적 변화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특히 하층민이 크게 희생됨으로써 사회가 구조 조정이 되는 효과를 누렸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생겼고, 유럽 사회는 오히려 도약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개인의 삶의 질도 크게 개선되어 1300년과 1500년을 비교하면 도시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약 3배 증가했다. 이처럼 판데믹에 준하는 대규모 전염병은 언제나 사회의 근본적인 전환을 촉진했다. 유럽의 경우 공교롭게도 고대에서 중세, 중세에서 근대, 근대에서 현대로 변하는 이행기가 모두 이 세 차례 페스트 판데믹 시기와 겹친다. 판데믹이 끝난 뒤 생존자들은 언제나 이전과는 다른 사회와 다른 시대를 맞았다.
전염병은 여전히 인류에게 커다란 도전이다. 마르세유 페스트가 발병한 지 300년이 지난 현재 지구촌 전역은 코로나 바이러스와 힘겹게 싸우고 있다. 초기에 은폐와 통제로 인해 작은 피해로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감염자들이 세계 곳곳으로 이동함으로써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세계보건기구는 공식적으로 판데믹을 선언했고, 나라마다 국경을 폐쇄하고 이동을 통제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경제는 멈춰 섰고, 사람들은 일상을 빼앗겼으며, 얼마나 지나야 이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결국 이 위기도 지나갈 것이다. 전염병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관찰하지 못하던 시기에도 결국 난관을 극복해 냈다. 하지만 단 한 차례도 전염병을 의술의 힘만으로 이겨낸 경우는 없었다. 그것은 의학이 최고조로 발달한 현재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앙정부의 현명한 판단과 통솔력, 효율적인 공중보건 제도와 충분한 의료 인력, 절제되고 성숙한 시민 의식 중 하나만 결여되어도 역병은 늘 그 취약한 틈을 헤집고 번창했다. 2020년 봄을 위협하는 코로나 19는 지구촌에 초연결 사회를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지 준엄하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국경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 단위의 대응으로는 어림없고 세계적인 공조와 협력을 통해서만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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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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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2015, “중세 말기 이탈리아 도시들의 흑사병 대응,”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편, 『역사 속의 질병, 사회 속의 질병』, 서울: 솔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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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er, Christopher, 2009, An Age of Transition? Economy and Society in England in the Later Middle Ages,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Gensini, Gian F, Magdi H. Yacoub, and Andrea A. Conti, 2004, “The Concept of Quarantine in History: From Plague to SARS,” Journal of Infection 49(4): 257-261.
Hatcher John, 1977, Plague, Population and the English Economy 1348-1530, London: Macmillan.
_____ 2009, The Black Death. The Intimate Story of a Village in Crisis, 1345-1350, London: Phoenix.
Levine, David, 2001, At the Dawn of Modernity. Biology, Culture, and Material Life in Europe after the Year 1000,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epys, Samuel, 1970-1983, The Diary of Samuel Pepys : A New and Complete Transcription, Robert Latham and William Matthews (eds.), London: G.Bell & Sons.
Spicer, Andrew, and William Naphy, 2001, The Black Death: A History of Plagues, 1345-1730, Stroud: Tempus.
Zysberg, André, 2007, Marseille at the Time of King Louis XIV: The City, the Galleys, the Arsenal, Marseille: Jeanne Laffitte.
- [1]
루이 15세는 1715년 5세에 왕위에 올랐으니 마르세유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10세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섭정을 담당했다.
- [2]
위에 서술한 마르세유 페스트의 상세한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참조하라. C. Carrière, M. Coudurié et F. Rebuffat, Marseille ville morte, la peste de 1720(1988).
- [3]
마르세유 의사 장-바티스트 베르트랑(Jean-Baptiste Bertrand)은 『1720년 마르세유 페스트에 대한 역사적 보고서(Relation Historique de la Peste de Marseille en 1720)』를 작성해 도시에서 벌어진 흑사병의 참화와 그에 따른 혼란에 대해 상세히 서술했다. 이 책은 1721년에 초판이 출판되었고, 1779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재발행되었다
- [4]
역사상 최초의 판데믹은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라고도 불리는데 541년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2년 내에 비잔티움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며, 그 후 750년경까지 지중해를 기반으로 주변 지역에 퍼지면서 큰 피해를 입혔다. 세 번째 판데믹은 1855년 중국 후난에서 시작되었으며 1900년 전후로 인도, 홍콩, 만주 등은 물론이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까지 확산하며 크게 유행했다. 인도에서만 1250만 명이 사망했다(박흥식 2015: 35-36).
- [5]
실질적인 자료를 토대로 인구통계를 검토한 존 해처(Hatcher 1977)의 연구가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 [6]
이 주제와 관련해 통찰력을 제공하는 중요한 연구로는 다음 두 권을 추천할 수 있다. David Levine, At the Dawn of Modernity. Biology, Culture, and Material Life in Europe after the Year 1000(2001); Christopher Dyer, An Age of Transition? Economy and Society in England in the Later Middle Ages(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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