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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60주년] 4월혁명의 다양성
4월혁명은 1960년 경자(庚子)년에 발생했고, 올해 다시 경자년이 돌아왔다. 60주년, 회갑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올해 봄 세계를 휩쓴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 사태로 말미암아 관련 기념행사들이 성대하게 진행될 수 없었다. 한편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며 5·18광주민주항쟁 40주년이다. 딱히 두 사건에 비해 4월혁명을 더 주목하는 분위기도 아닌 것 같다.
4월혁명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적인 민주항쟁으로 집권자를 몰아낸 사건이다. 이러한 ‘민주 승리’의 기억은 그 후 군사정권의 장기 지속하에서도 끊임없이 한국인들이 민주화를 위해 저항할 수 있는 희망의 근거로 작용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향해가는 출발점이었다면, 1960년 4월혁명은 그 이상을 현실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였다.
한국은 최근 투명성과 개방성, 시민의 자발성에 기초를 두어 효과적으로 전염병을 통제함으로써 민주적인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사재기 현상 같은 것도 발생하지 않는 등 성숙한 시민 의식도 돋보였다. 또 지난 4월 15일 한국은 예정된 총선을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연기하지 않고 순조롭고 안전하게 높은 투표율까지 기록하며 치러냈다. 4월혁명 60주년을 맞이하여 각종 기념행사는 저조했지만, 4월혁명이 추동한 한국의 민주주의와 성숙한 시민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빛이 났다.
1. 부정선거 반대 운동에서 정권 퇴진 운동으로
4월혁명은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의 등교 조치에 분노한 10대들의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이날 오후 대구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 유세가 있었다. 그 전날인 2월 27일에는 여당인 자유당의 유세가 있었는데, 이날 학교 당국은 학생들을 일찍 귀가시켰다. 학생들이 빨리 가서 집을 봐주어야 부모들이 자유당 유세에 더 많이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28일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켰다.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 이후 3월 초에 대전 등 여러 도시에서 중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3월 15일 마침내 정부통령 선거 날이 왔는데, 마산에서 노골적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일대 민중 봉기 사태가 일어났다(1차 마산항쟁). 이날 경찰이 총탄을 발사하여 처음으로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후 중고등학생들의 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곳곳에서 이어졌지만 다소 소강상태를 보였다.
이때까지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서 주로 외친 구호는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등이었다. 흥미롭게도 최근 촛불시위에서 외쳐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호도 가끔 등장했다. 당시 중고등학생들의 시위는 어떤 정치적 쟁점에 대한 구체적 요구를 담기보다는 학원과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다 보니 부정선거를 자행한 기관이나 책임자를 직접 거론하면서 퇴진을 요구하는 등의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승만 물러가라” 같은 구호가 나올 리도 없었다. 당시 민주항쟁은 처음부터 이승만 정권 퇴진을 목표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점차 정권 퇴진 운동으로 전환된 것이다.
4월 11일 1차 마산항쟁 과정에서 실종된 김주열 군의 참혹한 시신이 떠오르자 마산 시민들의 분노가 다시 폭발했다. 마산에서는 13일까지 3일 연속으로 민주항쟁이 전개되었다(2차 마산항쟁). 4월 11일 밤 마산의 시위에서 다수의 참여자가 “이승만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던 대학생들도 항쟁에 합류했다. 4월 18일 일제히 시위에 나섰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다가 정치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분노한 대학생들은 4월 19일 대거 거리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였다. 이날 많은 대학교 학생들이 각종 성명서를 발표했지만, 이승만 퇴진을 명시적으로 요구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를 향해 갔는데, 일부 사람들이 “이승만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이는 대부분의 시위 참여자들이 공유하고 계속해서 외치는 구호는 아니었다. 마침내 시위대가 경무대 바로 앞까지 오자 경찰은 실탄을 발사하였다. 이날 서울에서만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부산과 광주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4월 19일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5대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막았다.
4월 19일 대규모 유혈 사태가 발생하자 이때부터 각종 시위에서 정권 퇴진 구호가 자주 출현하기 시작했다. 폭력을 휘두른 집권 세력에 대해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승만 퇴진을 주된 목적으로 내세우는 본격적인 시위도 역시 마산에서 시작되었다. 4월 24일 마산의 할아버지들이 “책임지고 물러가라, 가라치울 때는 왔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25일에는 마산의 할머니들이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같은 날 서울에서는 대학교수단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때 학생과 시민이 몰려들어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날 시위는 사실상 철야로 진행되었고, 4월 26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시위대가 광화문과 종로 거리를 메웠다. 마침내 이날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사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당시 민주항쟁이 정권 퇴진 운동으로 전환하는 과정에는 김주열을 비롯한 국가 폭력 희생자에 대한 시민들의 연대 의식, 폭력을 행사한 집권자에 대한 책임 묻기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2. 4월혁명의 다양한 주체들
4월혁명은 흔히 학생혁명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학생들, 그중에서도 중고등학생들이 4월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제일 먼저 거리에 나섰고,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저항의 공간을 열었다. 이후 군사독재 정권기에도 양상은 마찬가지였는데, 주로 대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하여 공간을 열고 다수의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면서 대규모 민주항쟁이 폭발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4월혁명 과정에서 학생과 더불어 시위에 주로 참여한 사람들은 실업자, 일용직 노동자, 구두닦이, 상점 점원 등 도시 빈민층이었다. 학생들은 주로 낮에 질서 정연한 대열을 형성하여 시위를 벌였고, 밤에 벌어진 폭발적인 봉기는 주로 도시 빈민들이 주도하였다. 1·2차 마산항쟁의 밤 시위, 4월 19일 경무대 발포 이후 전개된 밤 시위, 4월 25일 교수단 시위를 계기로 폭발한 밤 시위에 다수의 도시 빈민들이 참여하였다. 최근의 4월혁명 관련 연구들은 도시 빈민층의 참여 양상과 역할에 주목한다. 이들은 경찰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하고 파출소를 습격하고 자유당 인사들의 집을 불태우는 등 폭력적인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행태와 저항의 전통을 형성하였다.
예컨대 4월혁명 때 마산의 밤 시위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이른바 “등화관제(燈火管制)”라 해서 시위 중에 자동차가 전조등을 켜고 다니거나 집에 불이 켜있으면 돌을 던져 불을 끌 것을 요구했다. 깜깜한 밤에 경찰이 자동차 전조등을 켜고 시위대에게 사격을 가했기 때문에 시위대가 서로 보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로부터 무려 19년이 지난 1979년 10월의 부마 민주항쟁 과정에서도 마산에서 똑같은 행동이 다시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이때에도 마산의 시위대는 자동차와 집의 불을 끄라고 요구하고 다녔다.
4월혁명 과정에서 도시 빈민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무엇을 위해 저항을 했는지에 대해 지금도 여전히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별로 주목받지도 못했기 때문에 잘 기록되지도 않았다. 설사 이들이 문자든 구술(口述)이든 어떤 기록을 남겼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해관계와 생각을 스스로 명확히 대변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4월혁명사 서술에서 배제된 사람들로 여성도 들 수 있다. 3·1운동 때에도 그러하고 5·18광주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 등 중요 민주항쟁 때마다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이들이 차지한 비중을 고려할 때 두드러지고 인상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4월혁명 때에는 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성의 역할이 별로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2·28 시위 때부터 경북여고, 대구여고 등 여학생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 시위를 주도한 경북고 학생 이대우는 수기에서 “한 가지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겨운 것은 가로에서 두드려 맞는 남학생들을 바라보던 여학생들이 순경에게 달려들어 결사적으로 비난하며 말리던 모습들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학교의 여고생과 여중생이 항쟁에 참여했으며, 부산 데레사여고의 경우 여러 차례 시위를 전개했고, 4월 19일에는 시위 도중 총격을 받아 학생들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여대생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시위 참여는 항상 부차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으로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 또 여성들은 항상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울음을 터트리고 남학생에게 보호받거나 인도되어 시위에 나오거나 물을 떠주고 돌을 날라주는 등 보조적인 역할만 한 것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의 활동이 주목받지 못하고 매우 심하게 기록에서 배제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4월 25일 마산 할머니 시위이다. 이 시위는 “리대통령”의 실명까지 직접 거론하며 4월혁명 중 발생한 그 어떤 시위보다 명확하게 이승만 퇴진 요구를 했다. 현재 남아있는 사진을 볼 때 시위가 처음 벌어질 무렵에는 여성이 시위대에서 수적으로 다수를 형성하였다. 3·1운동 때에도, 군사정권기 민주화 운동에서도 여성들이 주도하고 다수를 형성한 대규모 시위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또 이 시위는 시민이 수만 명 합세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이에 당시 서울과 지방의 신문들이 할머니 시위를 보도하였지만, 4월혁명 관련 각종 수기, 서사기, 역사서술에서 마산 할머니 시위는 놀라울 정도로 한 줄도 서술되지 않는다. ‘3·15의거’를 다룬 마산에서 발간된 책에서조차 본문 서술에는 할머니 시위에 대해 언급이 전혀 없고 다만 화보에 사진만 게재하였는데, 그것도 시위 날짜를 25일이 아닌 26일로 오기(誤記)하였다.
역사는 기록을 매개로 사실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도시 빈민, 여성 등 소외된 사람들은 대부분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이들의 행적은 기록되지도 않는다. 어떻게 이들의 이름과 목소리, 활동을 드러내고 이를 역사서술에 포함할 것인지가 향후 연구의 중요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는 역사서술의 문제이기도 하고 민주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외되고 침묵을 강요받는 사람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3. 연결된 세계와 사람들
4월혁명에는 국제 관계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2차 대전 이후 현대사의 특징으로 이야기되는 것이 “연결된 세계”이다. 근대 이후 교통·통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세계가 하나 되는 현상이 진행되었지만, 2차 대전 이후 조성된 냉전이라는 국제 질서와 정보통신 혁명은 세계의 연결성을 비약적으로 강화했다. 냉전은 비록 약소국에서 벌어지는 일도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주목받도록 만드는 측면이 있었다. 특히 대규모 시위 사태 같은 것이 발생하면 국제적으로 주목을 끌고 신문·방송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보도되었다. 4월혁명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4월 19일부터 이승만 퇴진까지 벌어진 상황은 서구의 중요 언론들도 거의 매일 비중 있게 보도하였다.
2차 대전 이후 각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국제 여론의 동향, 국제적 지지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한국전쟁으로 냉전의 최전선, 자유민주주의의 진열장이 된 한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와 부정선거 반대 운동을 취재하기 위하여 많은 외신 기자들이 방한하였다. 대부분의 외신 기자들은 부정선거의 실상을 비판적으로 폭로하고 학생들과 시민의 저항을 동정적으로 보도하였다. 해외 언론의 한국발 기사는 대부분 국내 언론이 번역해 다시 보도하였다. 이는 항쟁에 나선 사람들을 고무하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예컨대 4월 11일 마산에서 발생한 시위에서 이승만 퇴진 구호가 나왔을 때 국내 언론은 처음에는 이를 직접 보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외신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보도했고, 이를 다시 번역하여 게재함으로써 국내 언론도 간접적으로 이를 보도한 셈이 되었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한국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던 상황이었다. 국제 여론의 동향과 냉전 변수는 당연히 한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미국 관리들은 처음에는 한국에서 발생한 부정선거 반대 운동에 대해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내정 문제이기에 미국이 개입하거나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4월 11일 2차 마산항쟁이 발생하자 입장이 바뀌었다. 주한미국대사를 비롯한 미국 관리들은 당시 진행 중인 부정선거 반대 운동이 한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나 북한의 영향력과는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태가 더 악화할 경우 내부의 공산주의자와 북한이 이를 활용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이후 미국 관리들은 예방 혁명 차원에서 사태를 방관하기보다는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사태 수습을 위해 이승만 정부에 필요한 개혁 조치를 취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또한 4월 26일 이승만이 사퇴하는 과정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최근 미국 정부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이를 활용한 새로운 연구를 통해 이러한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여러 차원에서 4월 11일의 2차 마산항쟁은 4월혁명의 중요한 고비이자 전환점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4월 19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저항을 탄압하려 했지만 당시 한국군 지도자들은 이승만 정권을 적극 옹호하기보다는 거리를 두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시위대도 이를 눈치채고 계엄군이 다가오면 만세를 부르고 계엄군 탱크가 가로막아도 오히려 그 탱크 위에 대거 올라타 버렸다. 이것이 4월혁명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가 되었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 사령관에게 있었고 군대의 유지를 위한 보급도 대부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형편이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군대 장악력은 한계가 있었고 한국군은 1950년대에도 경찰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정치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한국군의 정치적 자율성은 한편으로는 5·16 쿠데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냉전과 한미 관계의 변수가 4월혁명에 깊숙이 작용한 것이다.
최근 전 세계적 위기를 일으킨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를 보면 연결된 세계를 실감하게 된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무리 잘살고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혼자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이었음이 드러났다. 또 각 개인도 혼자만 잘살 수는 없고 나의 삶이 타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어떤 이가, 특히 소외된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면 자신도 그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월혁명이 부정선거 반대 운동에서 정권 퇴진 운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시민들이 김주열 등 국가 폭력의 희생자 및 유족들과 연대감을 형성하고 함께 항의하고 저항에 나선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코로나 위기 사태에서 4월혁명 60주년 기념 분위기는 다소 소원해졌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되고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재확인해 나간다면 이것이야말로 4월혁명 60주년을 가장 바람직하게 기념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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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강현 편, 1960, 『민주혁명의 발자취-전국각급학교 학생대표 수기』, 부산: 정음사.
오제연, 2014, “4월혁명의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들: 고학생과 도시하층민,” 『역사비평』 2: 136-172.
홍석률, 2010, “4월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과정: 민주항쟁과 민주당, 미국, 한국군의 대응,” 『역사문화연구』 36: 147-192. (허은 편, 2012, 『정의와 행동 그리고 4월혁명의 기억』, 서울: 선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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