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지평
기획특집
Editor’s - 포퓰리즘의 도전과 극복
18세기 말 미국과 프랑스에서 등장한 민주주의는 19세기를 걸쳐 전제주의에 도전하며 서유럽 각지에 자리를 잡았다. 20세기 전반 제국주의 전쟁과 파시즘·나치즘과의 전쟁, 그리고 20세기 후반 공산주의와의 냉전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수차례에 걸친 민주주의의 물결은 과거 식민지 나라들에 도입되었고, 군부가 통치하던 나라에서도 권위주의를 몰아냈다. 민주주의의 규범은 글로벌 가치가 되었으며, 미국 소프트파워의 핵심이 되었다.
21세기의 역사적 전개는 수많은 희생을 치른 극단과 갈등의 시대를 넘어 평화와 화합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희망을 무참하게 깨버렸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글로벌 팬데믹을 겪고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전쟁의 와중에 세계는 다시 혼란에 빠져 긴장과 대립, 폐쇄와 갈등의 재등장을 향해 가고 있다. 전 세계 각지에서 대화와 협력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천보다는 분열과 혐오를 통한 민주주의의 파괴가 잇따르고 있다. 한 세기 이전의 극단적 대립과 혼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거부당하는 만큼 포퓰리즘의 기세는 오르고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고 불안정한 신흥 민주주의 국가들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산이자 중심이라고 자부했던 미국과 서유럽에서도 포퓰리즘은 맹위를 떨치고 있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 영국의 브렉시트, 서유럽 각 나라의 극우정당 부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났다. 강력한 정치적 팬덤에 기반한 혐오의 언사들이 난무하고, 당면한 문제의 해결보다 지지층에 영합하는 적대적 공격과 갈등으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21세기 벽두에 민주주의의 전 세계적인 승리를 이야기하려던 순간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의 급작스럽고 전방위적인 파도에 밀리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왜 이처럼 무기력하게 후퇴하게 되었나? 포퓰리즘은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기세를 올리게 되었는가? 포퓰리즘의 본질은 무엇이고 포퓰리즘의 확산을 가져온 배경과 원인은 무엇인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면 포퓰리즘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식의 지평 이번 호의 특집은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는 정치학을 비롯한 여러 사회과학 분야에서 연구되었고 다양한 답변들이 제출되었다. 특히 포퓰리즘의 득세가 민주주의의 위기와 직접 관련이 되었다는 점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그러면 민주주의 위기의 어떤 측면들이 포퓰리즘의 대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깊을까? 크게 두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민주주의 대표성의 위기이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지는 체제라면, 국민의 뜻을 어떻게 정책결정에 반영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정당정치와 선거제도를 통해 국민이 선거로 선택한 정당과 정치인들이 민의를 대변한다. 만약 정당이 자신의 이권에 몰두하여 민의를 소홀히 하고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집단의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면 정당과 정치인들은 대표성을 의심받게 된다.
또 하나는 민주주의의 신뢰 위기이다.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이 자신의 권력을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믿고 맡긴다. 정치 엘리트들은 전문성과 경험을 토대로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지만, 일단 당선되면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 결정과 정책을 집행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 엘리트들의 위선적, 독선적 행태가 늘고 국민이 간절히 염원하는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국민은 개별 정당이나 정치 엘리트만이 아닌 정치 전반에 대해 실망하고 불신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대표성과 신뢰에서 위기를 맞아도 곧바로 포퓰리즘의 도전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대표성과 신뢰의 위기를 이야기하던 20세기 후반에도 국민의 주된 반응은 정치참여에 대한 자신감인 정치적 효능감 하락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에 따른 정치적 참여의 감소였다. 그렇다면 포퓰리즘은 무엇이며, 21세기 들어 포퓰리즘이 급속히 대두된 배경과 원인은 무엇인가?
포퓰리즘의 개념에 대해서는 강우창과 홍철기의 글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포퓰리즘은 정치적 이념의 일종이지만 다른 이념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우선 포퓰리즘은 정당이나 정치인이 스스로 내세우기보다는 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비판할 때 등장한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긍정적인 칭찬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비방에 더 가깝다. 또한 포퓰리즘은 그동안 이념적 대립을 주도한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구도를 뛰어넘는다. 좌익 포퓰리즘과 우익 포퓰리즘 모두 가능하다는 말이다. 포퓰리즘은 말 그대로 다수의 힘에 의존하지만 이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조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은 근대적 혹세무민의 이념이다.
포퓰리즘 세력은 기존 정당과 정치 엘리트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을 때 이들의 부도덕과 부패를 비판하며 자신들이 진정한 민의를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무기력하거나 변질된 대의 민주주의를 대신해 국민과 직거래하는 정치세력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세력은 대부분 정당을 만들고 선거에 나서는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점거처럼 정치제도와 과정을 무시하고 실력행사에 이르기도 한다. 기존 정당과 엘리트만이 아니라 민주적 정치제도 자체를 위선과 부패의 이름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단지 비판할 뿐만 아니라 파괴하는 이념이다.
포퓰리즘 세력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시켜 선과 악의 이분법적 틀에 집어넣고 악으로 규정한 소수집단 혹은 엘리트에 대한 대중적 분노의 에너지를 동원한다. 포퓰리즘은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며 소수 의견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를 거부하고 다수의 지배만을 강요하는 배타적 집단주의에 함몰된다. 다양성이 점점 높아지는 현대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실현될 수 없거나 실현된다면 비극일 수밖에 없는 순수한 집단주의를 내세운다. 그 결과는 종교이건, 민족이나 종족이건, 혹은 어떤 형태이건 소수 정체성 집단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과 혐오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위험한 포퓰리즘이 하필 21세기 들어 부상하고 득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민주주의의 위기는 포퓰리즘 등장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20세기 후반부터 줄곧 이어졌지만 포퓰리즘이 본격적으로 득세한 시기는 21세기 들어서이다. 21세기에 포퓰리즘이 확산된 배경과 관련해서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글로벌화의 광범한 영향 특히 경제적 양극화이다. 강우창은 경제적 양극화와 포퓰리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글로벌화는 인구와 상품,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촉진한다. 인구 이동은 사회마다 종족과 문화의 다양성을 확대하고, 상품과 자본의 빠른 이동은 경제적 불안정과 함께 격차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사회문화적 다양성과 경제적 불평등이 상대적으로 낮고 안정적일 때에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국민의 대응이 무관심과 냉소, 정치적 참여의 하락 정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다양성과 이질성에 따른 갈등과 혐오의 증가, 불안정 및 불평등 격차의 확대에 따른 불만의 증가는 민주주의 위기에 대해 포퓰리즘과 같은 적극적 반응이 나타날 조건을 제공하였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다양한 소수자 지원에서 소외된 백인 하층민들을 적극 동원한 결과 집권했고, 유럽 통합 이후 영국에서 유색 이주민들에 밀려 경제적 곤경에 처한 기성세대의 불만이 브렉시트로 표출된 것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디지털화에 따른 정치적 양극화와 정치적 동원 가능성의 증가이다. 나은영은 디지털 미디어와 포퓰리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논한다. 사회적 불만이 쌓여도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동원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디지털화와 함께 등장한 소셜미디어는 일대일, 일대다의 커뮤니케이션만이 아니라 알고리즘을 통해 성향과 의견이 서로 비슷한 사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했다. 인터넷이 등장한 1990년대 중반과 디지털 플랫폼이 등장한 2010년 무렵에는 커뮤니케이션이 가속화되고 확대된 결과 다양한 의견을 접할 기회가 늘고 개개인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어 민주주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타난 결과는 판이했다.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비슷한 성향의 주장만을 접하게 되면서 확증편향이 강화되었고 그 결과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또한 온라인에서 유유상종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동하고 동원함으로써 소셜미디어는 포퓰리즘의 온상이 되었다.
글로벌화와 디지털화는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흐름이다. 따라서 어떤 사회에는 포퓰리즘이 심각한 반면 다른 사회는 그렇지 않은 차이를 설명하려면 또 다른 요인을 찾을 필요가 있다. 다양한 정치제도는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관후의 글은 정치제도의 다양성과 포퓰리즘의 관계를 다룬다. 비교적 소규모로 시작된 포퓰리즘 세력이 제도권 정치로 진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도로 비례대표제가 언급된다. 비례대표제를 이용해서 극우 민족주의나 인종주의 세력이 유럽 여러 나라의 의회에 진출한 것이 그 예이다. 반면 포퓰리즘에 잠재된 여러 부정적 가능성들, 예컨대 개인 숭배, 대규모적 동원, 다수의 지배와 소수에 대한 무시와 혐오 등을 극대화하는 데에는 대통령제와 같은 승자독식 권력구조가 더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사회운동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 제도의 허용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민주주의의 실패 혹은 후퇴가 포퓰리즘을 낳고, 포퓰리즘이 또다시 민주주의를 파괴한다면 민주주의를 재생하고 회복하려면 포퓰리즘을 극복해야만 한다. 포퓰리즘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이 문제는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난제이다.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적어도 큰 방향을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은 혁신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주체의 혁신이다. 이에 대해서는 모경환의 글에서 다루고 있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국민 모두이다. 포퓰리즘은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고, 현실을 단순화해서 흑백논리로 제시한다. 이처럼 반지성적인 이념이 교육 수준도 향상되고 정보에 접근하기도 쉬워진 지금 득세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하지만 그간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교육은 개인의 성공을 위한 투자로 여겨졌고, 비판적 사고능력과 함께 인류애를 갖춘 민주시민 교육에 대한 관심은 크게 줄었다. 포퓰리즘에 빠지지 않는 성찰과 사고능력을 키워주도록 교육자와 시민이 힘을 합쳐야 한다.
둘째는 제도의 혁신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관후의 글에서 주로 논한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제도의 빈틈을 노려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고 극단적 주장과 감정적 호소에 기반한 정치적 동원으로 세력을 확대한다. 포퓰리즘은 자유주의가 옹호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종종 악용하기도 한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대표성을 강화하고, 포퓰리즘 세력이 손쉽게 세력 확대를 꾀할 수 있는 제도적 허점을 보완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자기방어와 함께 빠르게 변하는 환경과 현실에 대한 적응력을 높일 수 있는 혁신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미디어의 혁신이다. 나은영의 글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소셜미디어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는 커뮤니케이션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 문화 전반에 지각변동을 야기했다. 포퓰리즘의 부상은 그 정치적 파장의 대표적인 예이다. 새로운 미디어가 지닌 영향력의 긍정적 측면을 제약하지 않으면서 부정적 영향력의 가능성은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알고리즘을 개선하여 정치적 양극화를 줄이고 미디어가 포퓰리즘의 선전과 동원의 장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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