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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사망 100주년] 레닌 사망 100주년에 부쳐: 반제국주의자 레닌

37호 - 2024
서울대학교 역사학부 교수
노경덕

1. 들어가며

  1999년 12월 31일, 지구촌이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을 생각에 모두 들떠 있을 때, 국내의 한 주요 언론사는 지난 세기 전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선정하는 특집을 실었다. 민주주의와 대중 사회, 대규모 전쟁과 국가 폭력, 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시대였던 20세기를 그 마지막 날 되새겨 보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결과는 록밴드 비틀스와 더불어, 러시아혁명의 주도자이자 소련의 창설자 레닌이 공동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레닌을 추종하는 진영과 맞서며 강력한 반공 의식을 함양했던 한국에서, 주요 언론사가 이런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레닌이 건설한 소련 공산주의 체제가 지난 세기 내내 그 지지자나 반대자 할 것 없이 전 세계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체제의 유산이 앞으로도 세계에 계속 남을 것이라는 전망을 외면할 수는 없었나 보다.

  하지만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흘러, 레닌은 여러모로 잊힌 인물이 되었다. 그의 조국 러시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 2024년 1월 24일 러시아 공화국의 붉은 광장 레닌 묘 근처에는 불과 두 자리 숫자의 인파만이 그의 사망 100주년 기념식에 모였다. 대부분 러시아 공산당원인 이들은 마야콥스키의 유명한 시구, “레닌은 살았고, 레닌은 살아 있으며, 레닌은 살아 있을 것이다”를 새긴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조촐하게 그를 기억했다. 현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이와 관련해서 어떤 공식 발언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러시아 신문도 기념일 소식을 1면에 싣지 않았으며, 비중 있는 특집으로 삼은 경우도 거의 없었다. 이런 무관심은 소련의 유산이 현재 러시아 지배층에게 달갑지 않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소련은 공장, 광산, 농토 등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금하는 체제였으며, 이 사적 소유권자들, 즉 소련식 표현으로는 자본가들이 추진한 제국주의와 이에 관련된 전쟁에 반대하는 국가였다. 푸틴을 비롯한 현재 러시아 정치 지도자들이 이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 불편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이 소련의 역사에서 기억하고픈 것은 초강대국의 지위일 뿐인데, 이를 레닌에게서 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1990년대 말의 ‘외국’ 한국이 오늘날의 ‘조국’ 러시아보다 레닌을 더 잘 기억하고자 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 체제 건설은 러시아 민족사의 범위를 넘어서는 세계사적 사건과 변동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운동의 구심점을 만드는 계기였다. 세계 자본주의에 편승하다 결국 우파 포퓰리스트 독재 체제로 망가지고, 나아가 주변국에 전쟁까지 일으킨 작금의 러시아가 레닌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반면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방 선진국이라는 새 이름을 달고 주도하는 세계 경제와 정치, 그에 따른 국가 간 불평등 및 사회 내 빈부격차 심화의 모순을 IMF 외환위기 이후 더 뚜렷이 느낄 수 있었던 1990년대 말 한국은 달랐던 것이다.

2. 레닌의 성장

  레닌은 1870년 심비르스크라는 볼가강 유역의 지방 도시에서 태어났다. 지역 중등학교들의 교육 장학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곳의 터줏대감은 아니었지만 꽤 명망 있는 지역 인사였으며 레닌이 태어난 직후 세습 귀족 자격까지 획득하기도 했다. 한편 유대계 의사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신교, 특히 루터파의 가르침에 따라 금욕적이고 성실한 생활 태도를 자식들에게 심어주었다. 이들 부부는 교육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자식의 입신양명과 사회의 점진적 발전을 함께 꿈꾸는 19세기 유럽의 개명된 중간계급의 가치관을 신봉했다. 이런 부모의 배경 및 성향 아래서 레닌, 그리고 그의 형을 비롯한 아이들 모두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자라났다.

  평탄할 것만 같았던 레닌 가족의 삶은 1886년 아버지 일리야가 갑자기 죽고 그 이듬해 페테르부르크 대학생이던 그의 형 알렉산드르가 차르 알렉산드르 3세 암살 시도 혐의로 처형당한 후부터 변했다. 이제 반역자 집안이 된 그들은 사회적 따돌림을 겪었고 결국 오랫동안 지켜온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물론 여느 통속 소설의 전개처럼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빠른 대처와 수습 덕에 적어도 재정적으로는 온전할 수 있었다. 자식들의 모범생 기질도 온전했다. 큰누나 안나가 억울하게 투옥되기도 했지만, 자식들 모두 속된 말로 삐뚤어지지 않았다. 특히 레닌은 명문 카잔대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김나지움 생활을 성실히 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런 성실함은 레닌이 학내 시위에 가담했다가 카잔대학교에서 퇴학당했을 때도 없어지지 않았다. 곧 그는 형이 다녔던 페테르부르크대학교의 법학사 학위 취득 시험을 우등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3. 레닌과 부채 의식 

  명문대 졸업 자격을 얻은 레닌은 당시 그의 가족이 머물던 사마라로 내려와 변호사로 일하게 되었다. 반역자 집안의 오명을 쓴 레닌 가족에게 아들의 변호사 지위는 그들이 다시금 지역 명문가의 생활로 돌아가는 문의 열쇠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레닌은 변호사 사무실을 그만두고 페테르부르크로 떠나버렸다.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혁명운동에 뛰어들던 19세기 말 수많은 러시아 젊은이들처럼, 레닌도 자기 동네의 변호사 자리가 가져다줄 안정과 윤택함을 내던진 것이다. 러시아의 수도에서 레닌은 그처럼 체제 전복을 꿈꾸는 지식인들과 어울렸고, 그들이 전복의 주체라 믿는 노동계급을 위한 지하운동에 참여했다. 

  레닌이 이처럼 무모해 보이는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서방의 일부 보수적인 역사가들은 레닌의 권력욕을 강조했다. 그는 시골 변호사 노릇에 만족할 수 없었으며, 차르 정권 전복이 가장 빨리 그의 권력욕을 채워주는 길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닌이 투신했던 지하운동은 대개 미국의 평화로운 교외 출신인 저 서방 역사가들의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언제라도 체포, 투옥되거나 심지어 처형될지도 모르는 삶을 미래의 권력만을 기대하며 택할 이는 없을 것이다. 

  레닌의 선택은 권력욕보다는 부채 의식이라는 특수한 관념 속에서 내려졌다. 이 의식이 그를 비롯한 당대 러시아 혁명가들의 가슴에 닿는 전형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대부분 유복한 유년의 그들에게 세상은 평화로워 보였다. 가끔 시위나 폭동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무식한 하층민들이 분노 조절을 못한 탓으로 여겼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국토를 여행하던 어느 날, 기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농민들의 모습에서 갑자기 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뙤약볕 아래 새카맣게 탄 농민들이 고된 농사일을 하고 있다. 체구는 바싹 말라 왜소하고, 어떤 이는 반복된 중노동 탓인지 허리가 굽었다. 갑자기 ‘저들은 왜 저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적어도 저들 개인의 무지몽매나 나태함 탓은 아닌 것 같다. 저들에게 애초부터 다른 기회가 있기나 했을까. 반면, 나는 저들과 다르게 왜 편안하게 살았나. 내게 응당히 주어진 걸로만 알았던 풍요로움은 원래 그들에게 돌아갈 몫이 내게로 오면서 생긴 결과는 아닐까. 그렇다면 현재 나의 안위는 내게 주어진 몫 이상을 내가 가졌기에 가능했으며, 저들의 고역은 자기 몫을 나 때문에 덜 가지게 된 탓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삶이 그들에게서 꾼 빚 덕분에 안락했다면, 이제부터의 삶은 이 빚을 그들에게 갚는 데에 바쳐야 하지 않을까(『한국일보』 2016. 8. 25일자). 그렇다면 이 부채 상환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공직자나 종교인으로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충분한 상환이 될까. 귀족과 지배층만 감싸고 민중을 착취하는 차르 체제가 전복되기 전에는 항상 부족하지 않을까. 레닌도 이런 판단에 이른 여러 젊은이 중 하나였다.

4.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과 제국주의의 결합

  레닌의 판단에 영향을 끼친 첫 번째 집단은 바로 부채 의식을 정의했던 라브로프 등의 인민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농민을 체제 전복의 주체이자 수혜자로 꼽았으며, 이를 위한 폭력 사용을 점차 용인하기 시작했다. 레닌은 후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가는 폭력 사용을 위해 강철과 같은 규율과 도덕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이른바 품성론까지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자 문제를 놓고 레닌은 결국 인민주의자들로부터 멀어졌다. 그 결별은 그가 서구 수입 사상인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후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권 폐지 정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민주의처럼 사회주의 이념의 범주에 속했지만, 독특한 역사관을 주장하였다. 역사는 단계적으로 진보하며 그 단계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토대라 부르는 경제 체제에 조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는 역사적 단계를 거친, 이미 꽤 발전된 경제 체제가 전제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봉건제 단계를 지나 자본주의 단계도 겪어야 하며, 후자가 충분히 성숙했을 때만이 비로소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주역은 자본주의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붕괴할 농민 계층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급격히 성장할 노동계급이 되어야 한다. 역사유물론이라 불린 이 신조는 인민주의자와 같은 여타 사회주의자들이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못되었다. 만약 현재 자기 나라가 자본주의 경제를 현재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하고 여전히 농촌 사회에 머물러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당장에 도모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본주의 성숙을 기다리고 심지어 촉진해야 한다고 답할 것이다. 이것은 보통의 사회주의자라면 자신의 적으로 규정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자, 즉 자본가와의 협력을 의미하는 충격적인 논리였다.

  하지만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장점에 더 주목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유물론에 근거한 사회주의 운동이 가난한 민중에게 부채를 상환하는 것을 넘어, 인류 문명의 진보라는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세기말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로 거듭난 레닌은 그 법칙에 따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실현을 꿈꾸었다. 다만, 자신의 조국은 농촌경제가 압도적이고 자본주의 발전이 더딘 후진적 단계에 머물러 있기에 그 시점이 멀어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를 앞당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레닌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지하운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을 때, 그를 사로잡고 있던 난제였다. 그리고 이 난제는 러시아혁명기까지 계속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레닌이 경험한 시베리아 유형은 흔히들 상상하듯 강추위 속에 강제노동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는 나치의 강제수용소 생활보다는 조선의 귀양살이에 더 가까웠다. 집안에 재력만 있다면 살 만한 집도 구할 수 있었고, 책도 받아볼 수 있었으며, 동료 유형수와 이를 함께 학습할 수도 있었다. 러시아 급진주의자들이 시베리아 유형을 ‘혁명 학교’로 불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레닌은 그의 가족의 지원 덕에 많은 장서, 특히 ‘불온’ 서적을 확보하고 자신의 집에서 독회나 토론회를 개최하는 호스트가 되었다. 이런 논쟁은 그가 유형에서 벗어난 후에도, 특히 유럽 망명 중에도 계속되었다. 레닌은 긴 논쟁 과정에서 줄곧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하며 자신의 혁명 사상을 다져가는 꼬장꼬장한 논객의 모습을 보였다.

5. 역사유물론의 재해석과 10월 봉기

  비타협적인 레닌에게 논적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그중 주요 상대는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내에서 그가 이끌던 볼셰비키의 경쟁 정파 멘셰비키와 그 이론적 지도자 율리 마르토프였다. 그들 사이의 논쟁은 여러 사안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핵심은 혁명을 도모하는 정당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있었다. 이 논쟁 끝에 레닌 중심의 공산주의 운동은 대중 정당보다는, 이른바 전위 당원을 핵으로 하는 엘리트주의 정당을 모체로 삼게 되었다. 이 전위들은 자신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대지만 적으로 판단된 세력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결적인 자세를, 그리고 과업 추진에서 배려나 타협보다는 냉정함을 지닐 것을 요구받을 것이었다.

  또 다른 주요 논적은 당시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자,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20세기 초 몇몇 열강에 의한 전 세계의 식민화, 즉 제국주의 문제가 그들 사이에서 쟁점 중 하나였다. ‘마르크스주의 교황’ 카우츠키와는 달리 레닌은 제국주의를 열강의 대외 정책 수준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단계, 즉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최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전반적 국면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투쟁, 특히 유럽 소수민족의 자결주의 움직임이나 식민지 독립운동 등은 반제국주의적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붕괴를 촉진하고 역사유물론상의 진보, 즉 사회주의 실현을 앞당긴다는 점에서 혁명적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과 반제국주의를 결합하면서, 레닌은 식민지 독립 지지를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이는 문화적 자치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던 많은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과 대비되었다. 레닌에게 식민지 독립은 자치 수준이 아니라 오로지 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분리를 의미했다. 바로 이 분리를 통해서만 제국주의, 즉 최고 단계까지 온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레닌의 사고는 역사유물론을 일국에서의 발전 과정으로 추상화했던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파와는 달리, 이를 국제적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이었다. 그 사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현재의 자본주의는 특정 국가의 개별적 수준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서로 엮여서 발전하며, 따라서 그 발전은 국가별, 지역별로 불균등하다. 둘째, 역사유물론의 가르침을 일국적 시각에서 적용하는 시대는 지났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라는 이름의 전 세계적 그물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 그물의 해체는 상대적으로 후진 지역의 저항에서 시작될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선진 지역의 노동자는 제국주의의 수탈로 벌어들인 이익에 매수당해 혁명성이 흐려질 수 있지만, 착취와 수탈에 시달리는 후진 지역의 민중은 더욱 날카로운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 의식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넷째, 나아가 후진 지역의 혁명 물결은 선진 서구 노동자들의 혁명 의식을 다시 자극할 것이다. 따라서 후진 지역은 세계 혁명의 진원지다.

6. 반제국주의 혁명

  레닌은 이런 역사유물론의 국제주의적 재해석을 바탕으로 1917년 10월 봉기, 즉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켰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재해석이 비단 사회주의 혁명으로서만이 아니라 반제국주의 운동으로서 러시아혁명의 위치를 규정해준다는 점이다. 레닌 생각에 그것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를 자르는 시발점이었다. 이제 아시아, 아프리카 등 후진 지역을 포함한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같은 기능의 정치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기대에서 10월 봉기의 성공 이후 레닌과 볼셰비키는 독립운동을 독려하는 메시지를 전 세계 식민지에 보냈다. 그 해 12월 그들은 “전쟁 이전 독립을 유지했던 민족 집단에게는 그들의 독립 문제 결정을 위해 그 민족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국민 투표가 허용되어야 한다”며 민족자결주의 지지를 분명히 하면서, 이 같은 원칙은 ‘식민지 문제’에도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고 외쳤다(노경덕 2020: 79).  

  이 호소 후에 1년여가 지나기는 했지만 1919년 한반도, 중국, 이집트, 인도 등 식민지 세계에서는 대대적인 반제국주의 시위가 펼쳐졌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이에 크게 고무되었다. 제2인터내셔널을 대체하기 위해 그들이 주도해서 만든 새로운 세계 사회주의 운동 조직 코민테른은 1920년 그 제2회 대회의 주요 의제를 식민지 문제로 정했다. 대회 개막 회의에서 레닌은 식민지 문제와 제국주의, 사회주의 혁명의 결합을 재확인하며 이를 세계사의 담론으로 표현했다. 그에 의하면, 제국주의의 그물은 ‘국제 관계의 근간’을 형성하며 그것은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가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식민지 지배는 특정 국가의 특정 민족에 대한 정치적 지배만이 아니라, ‘재정 및 경제적 종속의 일련의 관계들’을 의미한다. 식민지 처지에 놓인 인구가 전 세계 70%에 달하는 국제 환경 속에 레닌은 식민지인들의 투쟁은 자국의 독립을 넘어선 세계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제국주의 전쟁’은 그동안 ‘역사 밖에 서 있던 이들’을 ‘세계의 역사’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의 주역으로 삼았던 유럽 노동 계급의 역할에 견줄 만한 세계사적 행위자들이 되었다. 레닌이 보기에,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 체제는 이 둘을 연결하는 고리다(노경덕 2020: 81-82).

7. 나오며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했을 때, 그는 이미 민주주의가 뚜렷이 후퇴하고 반인권적 폭력이 자행되는 국가를 후계자에게 물려주었다. 경제 역시 러시아 제국에서 내려온 뿌리 깊은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향후 소련 경제를 특징짓게 될 관료제적 비효율성을 벌써 드러내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그의 성향들, 즉 폭력 사용에 대한 관대함, 비타협주의, 적대 의식, 냉정함, 엘리트주의 정당관 등이 이런 소련의 문제에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이 모두가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부의 성향 탓만이 아니라, 소련을 고립시키고 압박했던 유럽 정치가와 자본가들의 ‘노력’ 때문이기도 했음은 기억할 필요가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체제의 비민주화와 경직화 속에서도, 레닌이 세운 소련은 열강의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식민지 독립 지지, 민족자결주의 주장 등을 중단한 적은 없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내부 분열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에도, 레닌의 메시지는 계속 식민지 세계를 자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소련은 즉각적인 탈식민화를 지지하는 사실상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전후, 과거 제국주의 열강이 이제는 서방 선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불공정 무역 체제를 재생산하며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제 종속을 강요했을 때, 소련은 이에 대항하는 진영의 구심점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말 이들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새 옷으로 다시 한번 갈아입고 과거 식민지 교역 구조와 문화 우위를 지켜나가려 했을 때, 레닌의 소련은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반대를 전 세계 극우 세력이 주도하는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 당시 레닌의 반제국주의 메시지를 상기하는 일은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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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노경덕, 2020, “현대사의 기점으로서의 러시아 혁명,” 『역사와 현실』 115: 57-87.

  • 자료

    『한국일보』, “사회 지도층과 부채의식”(노경덕), 2016. 8. 25일자.

저자 소개

노경덕
서울대학교 역사학부 교수

소련사, 이념의 역사, 냉전사 등을 공부한다. 미국 시카고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GIST대학,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