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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초연 200주년] 「합창 교향곡」, 시대를 초월한 희망과 환희

37호 - 2024
서울대학교 음악학과 교수
민은기

 

  1824년 5월 7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일명 「합창」이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0년 전의 일이다. 이것은 베토벤 개인이나 교향곡이라는 장르를 넘어 세계 음악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작품 그 자체로 교향곡의 획을 긋는 위대한 작품이다. 구상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14년이 걸렸을 뿐 아니라 전곡 연주 시간이 70분에 달한다. 베토벤이 한 음 한 음에 심혈을 기울여 곡을 신중하게 쓰는 작곡가였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긴 작곡 기간은 그에게조차 이례적인 것이며, 전체 마디 수가 2,000개가 훨씬 넘는 규모는 당대 어떤 기악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블록버스터급 대작이다. 

  그러나 작품이 훌륭하다고 항상 인기를 얻는 것은 아니다. 인기에는 시대 상황이 늘 한몫을 하기 마련이다. 교향곡이란 오케스트라를 위한 대규모 형식의 기악 음악으로 순수 음악 예술의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대략 1730년에 형성된 교향곡은 하이든과 모차르트라고 하는 두 거장의 손에서 가장 완숙한 형태인 이른바 고전주의 교향곡으로 발전했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규범화된 교향곡 양식을 흡수한 후 자신만의 개성을 더해 교향곡을 더욱 호소력 있고 감동적이며 강렬한 장르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당시 시대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1. 영웅의 시대

  베토벤이 빈에서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당시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직후였다. 유럽 역사상 최초로 시민들이 왕권과 신분제에 도전한 이 혁명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엄청난 변혁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의 혁명 사상이 자국으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변국들은 대프랑스 동맹을 맺어 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맞서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나타나 유럽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였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강렬하고 투쟁적인 베토벤의 음악은 혼돈의 시기를 겪는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다가갔고, 격정적인 승리의 서사는 그들에게 불안을 잊게 하고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대조적인 프레이즈들로 빈틈없이 설계된 그의 교향곡은 거침없이 질주하며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넘치는 열정과 폭발적인 에너지는 엄청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며 마침내 승리하는 영웅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그 당시는 나폴레옹이 정복지의 사람들에게조차 추앙받던 때였다. 베토벤의 영웅적인 교향곡들은 나폴레옹과 오버랩되면서 더욱 강렬한 감동을 안겨주었고, 베토벤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로 등극하며 전성기를 맞는다. 「교향곡 3번」에서 「교향곡 8번」까지 여섯 개의 교향곡을 비롯한 그의 가장 유명한 걸작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때 작곡된 교향곡 중에는 나폴레옹을 직접 염두에 두고 작곡한 작품도 있다. 바로 「교향곡 3번」 일명 「영웅」이다. 베토벤은 이 곡의 제목을 「보나파르트라는 영웅의 교향곡」이라 붙였으며, 표지에 직접 “보나파르트를 위해 작곡했다”는 말도 적었다. 이 곡은 다른 선배 작곡가는 물론 그때까지 자신이 발표했던 교향곡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하다. 주인공의 성격을 알리는 첫 3화음은 팡파르같이 당당하게 등장하지만 다시 반음계로 마무리되면서 영웅의 내면적 고통을 암시하기도 한다. 모티프는 수많은 변형을 겪으면서 위로 빠르게 상승해 나가고 또 아래로 급히 내려오는 등 심각한 도전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승리로 끝을 맺는다.

2. 반동의 시대

  역사가 항상 직진하는 것은 아니며 혁명은 반동을 부르기도 한다. 나폴레옹은 베토벤이 「교향곡 8번」을 발표하던 1812년에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가 사라지자 유럽에는 반동의 물결이 일어나, 군주가 지배하는 구체제로 빠르게 복귀했고, 혁명 사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은 경찰국가 체제로 돌입했다. 시민들의 가슴 속에 불타던 사회 개혁이나 혁명의 열망은 사라졌고, 자포자기식 쾌락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사람들의 음악 취향도 바뀌어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같은 유쾌하고 발랄한 음악들이 인기를 끌면서 베토벤의 음악이 설 자리는 크게 줄어들고 말았다. 

  세상이 바뀌자 평소 음표 하나에 대해서도 엄격하고 진지하게 고민한 베토벤이지만 「웰링턴의 승리」같이 가벼운 작품을 썼다. 웰링턴 공작이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씌어진 이 곡은 관악기의 팡파르와 대포 소리 등 대중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로 가득했다. 초연 당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과거 그의 음악들이 보여준 치밀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베토벤은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의 뒤처리를 위해 유럽 각국의 대표들이 모인 빈 회의를 위해서 칸타타 「현명한 창시자이신 당신이여」와 「영광의 순간」도 작곡했다. 하지만 베토벤 스스로도 이러한 곡들의 작품성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나 보다. 그래서인지 이들 행사용 음악을 길이 남을 작품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따라서 작품번호를 붙이지 않고 출판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베토벤에게는 이제 긴 동면기가 찾아왔다.

3. 베토벤의 역경

  더 이상 교향곡을 만들지 못한 12년은 베토벤의 인생에서도 불행한 사건이 끊이지 않은 시기였다. 이 시기 베토벤은 자신이 ‘불멸의 연인’이라고 불렀던 안토니 브렌타노와 결별했다. 그녀는 빈의 정치가였던 요한 폰 비르켄슈토크의 외동딸로 열아홉 살에 결혼한 후 네 명의 자녀를 두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다. 그녀는 1809년 부친의 임종을 앞두고 빈으로 왔을 때 베토벤을 알게 되었는데, 베토벤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숭배에서 차츰 사랑으로 변했다. 그녀는 베토벤에게 먼저 청혼을 했고, 베토벤은 심각하게 흔들렸으나 끝내 그녀 남편과의 교분을 저버리지 못했다. 안타까운 이별 후 베토벤은 좌절감과 무기력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15년 11월 그의 동생 카를이 사망했다. 동생은 병을 앓는 동안 아들의 양육권자로 형인 베토벤을 지목했으나 사망 이틀 전 이를 수정하여 처 요한나와 형을 공동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평소 요한나를 싫어했던 베토벤은 단독 양육권을 가지기 위해 요한나와 5년간 지루한 법적 소송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수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양육권자가 되었지만 정작 베토벤은 조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저 그에게 극도로 집착하여 엄하고 혹독하게 대했을 뿐이다. 그리고 조카가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하자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베토벤은 건강 때문에 몹시 힘들어했다. 베토벤은 1815년 이후 난청이 심해져 거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청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베토벤은 평생 복통과 설사를 동반한 복부 이상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1812년 이후 설사, 탈수, 피로, 식욕부진, 복통이 더 심해졌다. 이 때문에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알코올 섭취량을 늘렸으나, 알코올은 복통과 설사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류머티즘도 복부 이상만큼 베토벤을 오래 괴롭힌 질병이었다. 류머티즘은 자가 면역질환의 일종으로 고열과 함께 관절을 중심으로 전신 염증을 일으켰다. 육체적 고통도 힘들었지만 정신적 고통은 그 이상으로 심각했다.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후 그의 자존감은 크게 낮아졌고 고립감을 자주 느꼈으며 쉽게 분노했다. 좌절에 대한 내성도 아주 낮아져 자살 충동이 동반된 우울 삽화를 겪기까지 했다.

4. 부활과 환희

  많은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새롭게 부활한다. 1824년 그의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교향곡인 「합창 교향곡」을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음악 자체가 갖는 가능성을 극한까지 몰고 간 최고의 걸작이다. 전체 4악장 구성을 보면 1악장부터 3악장을 빠르고, 매우 빠르고, 느린 악장 순으로 배치한 것부터 전통에서 벗어난다. 게다가 4악장에 독창과 합창을 등장시켜 기존의 교향곡이 가지는 형식적 틀을 깨고 순수 기악곡 장르인 교향곡의 장르적 경계를 무너뜨린 획기적인 파격을 시도했다. 

  그가 택한 가사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송시 「환희에 부침」이었다. 인류 화합과 인간 해방의 이상을 노래해 젊은 시절 그의 가슴을 뛰게 했던 시였다. 스무 살 때 본 대학의 인문학자 루트비히 피세니히를 통해 알게 된 후 베토벤은 이것에 곡을 붙이려는 소망을 품어 왔으며 34년 만에 「환희에 부침」을 「환희의 송가」로 재탄생시켰다. 베토벤은 이 곡으로 인류의 화합과 믿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이상향을 노래했다. 그것은 불평등과 부조리로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한 질타였고, 그 속에서 길 잃고 방황하는 인간들의 이성과 감성에 대한 호소이자 인류의 각성과 화해를 향한 촉구였다. 

  「합창 교향곡」은 1악장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다. 마치 튜닝을 하는 사람처럼 어떤 음을 찾고 있는 것 같은 하강 선율의 단편들은 앞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처럼 심각하다. 이 단편들이 모여 힘을 증대시켜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장대하게 주제를 펼쳐 나간다. 이어지는 2악장과 3악장에서도 이전에 자신이 작곡한 교향곡들에서 발휘했던 음악적 가능성을 최대한 이끌어낸다. 2악장은 외형적으로는 전통적인 3부 형식의 스케르초이지만 1부와 3부의 스케르초 자체가 소나타 형식인 복합적인 구조일 뿐 아니라 1주제에는 푸가의 아이디어까지 품고 있다. 실로 음악 형식을 다루는 능력의 최고 정점이라 할 만하다.

  4악장은 일명 ‘놀람 팡파르’라고 불리는 혼란스러운 프레이즈로 휘몰아치듯 시작된다. 이어 관악기의 소박한 선율이 나오고 저음 현 성부가 다소 반항적인 레치타티보를 연주한 후 아래 악보의 그 유명한 환희의 주제 선율이 나온다.

<그림 1>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92~99마디


  이 주제는 소박하고 친숙하지만 기품이 있고 거침이 없다. 저음 현 성부에서 처음 등장한 주제는 세 차례에 걸쳐 변주되면서 두께와 색채를 더해간다. 그리고 맨 처음에 나왔던 혼란스러운 ‘놀람 팡파레’가 다시 등장하고 바리톤이 앞서 현들이 연주했던 레치타티보에 “친구여, 이런 음이 아닐세, 우리 좀 더 즐거운 음을 노래하세. 보다 환희에 찬 음을.”이라는 가사를 붙여 노래하고 나서, ‘실러의 송가’로 환희의 주제를 선창한다. 이어 합창이 가세하면서 눈부신 환희의 세계가 펼쳐지며, 모든 인류가 형제로서 서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소리가 높아진다. 이 외침은 힘찬 행진곡으로 변해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다가 이내 종교적인 분위기로 발전한다. 그리고 벅찬 감격 속에 클라이맥스가 이루어지면서 마지막으로 “환희여, 찬란한 신의 불꽃이여”라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감동적인 교향곡이 끝을 맺는다.

5. 초연의 감동

  작품은 무대에 올려야 비로소 청중을 만나고 생명을 얻는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의 작곡을 끝냈으나 초연을 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모든 작품은 악보가 있다고 해도 연주를 통해 그것이 소리로 구현되기 전까지는 작곡자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작곡자의 의도가 연주자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런데 베토벤은 청각을 완전히 상실했으니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가벼운 여흥에 취해 있는 빈에서 이토록 심오하고 웅변적인 음악을 초연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베토벤은 주저하지 않았고 바로 연주를 강행했다. 연주회 장소는 오페라와 발레를 주로 공연하는 2,400석 규모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으로 결정했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베토벤은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악장에게 맡겼지만, 초연 당일 지휘만큼은 보조 지휘자가 있기는 했어도 직접 지휘대 앞에 섰다. 그는 자기 악보를 넘기며 거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정열적으로 지휘했다고 전해진다. 곡이 끝나고 청중은 열광적으로 환호했으나 그는 그 큰 소리조차 듣지 못했고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야 했다는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청중의 뜨거운 반응에 비해 베토벤에게 돌아온 경제적 수입은 그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교향곡 9번」 초연의 티켓 수익은 베토벤이 기획한 연주 중에서 가장 큰 판매 기록으로 500굴덴이었다. 여기에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로부터 받은 550굴덴의 위촉비와 출판료 600굴덴,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헌정하고 받은 후원금 300굴덴까지 합치면 상당한 수입을 벌어들인 셈이지만, 파트 악보 사보나 대관 비용 등 연주회를 위해 지출한 경비를 제외하면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악보 출판으로 얻은 이익도 크지 않았다. 1824년 2월 베토벤은 「교향곡 9번」의 악보를 완성하자마자 파리의 슐레징거, 라이프치히의 프로브스트, 마인츠의 쇼트에 600굴덴의 가격으로 넘기겠다는 편지를 썼다. 이 악보는 그해 7월 쇼트에 팔렸는데, 8월 28일 베토벤은 이것을 1,000굴덴에 팔아보려고 프로브스트에 다시 편지를 썼을 정도로 그 가격에 만족하지 못했다.

6. 시대를 초월한 희망

  「교향곡 9번」 초연 후 베토벤은 이례적인 형식이나 기술적 난해함으로 인해 당대 청중보다는 미래의 청중을 대상으로 작곡했다고 평가받는 다섯 곡의 현악 4중주를 완성하기는 했으나, 더 이상의 교향곡은 내놓지 못한 채 2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놀라운 성공, 깊은 좌절과 수많은 고난, 그리고 재기의 환희로 이어진 파란만장하고 감동적인 인생이었다. 이러한 베토벤의 생애는 그의 사후에 더 많이 추억되고 숭배되었다. 그러한 베토벤의 영웅적 모습은 프랑스 문학가 로맹 롤랑이 집필한 전기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는 베토벤을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웠지만 물질 세계를 초월하는 예술가로 그렸고, “모든 인간의 평범함을 극복한 정복자, 운명의 정복자, 고통의 정복자”로 만들었다. 베토벤은 사후에 그렇게 ‘영웅 베토벤’, ‘악성(樂聖) 베토벤’으로 다시 태어났다.

  특별히 19세기 후반 독일인들은 통일 과정에서 불우한 가정환경과 청각장애라는 치명적인 시련을 극복하고 음악가로 승리하는 베토벤의 인생 역정을 부각시켜 게르만 민족 공동체의 영원한 수호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성립한 베토벤의 이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정치인은 히틀러였다. 히틀러 치하에서 「합창 교향곡」은 제3제국의 중요 행사나 축제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교향곡이었다. 히틀러와 나치 정권은 인간 영혼의 숭고함을 노래하는 「환희의 송가」를 아리아족을 위한 독일 제국 건설의 송가로 바꿔 불렀다. 

  그렇다고 평화를 향한 베토벤의 메시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이 주로 불렀던 노래도 「환희의 송가」였다고 하니 말이다. 유대인들은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벗어나서 자신들을 ‘영원한 성소로 안내할 환희의 빛’을 노래하며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다. 그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교향곡 9번」은 화합의 의미를 담게 되었다. 동서독이 단일팀을 이루어 올림픽에 참가할 때 「환희의 송가」가 국가를 대신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주제가처럼 애창된 것도 이 노래였다. 

  21세기에도 「교향곡 9번」은 매년 세계 곳곳의 송년 음악회와 숭고한 뜻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 음악회에서 가장 자주 연주된다. 초연된 지 200년이 지났으나 희망과 환희의 메시지를 이보다 웅장하고 아름답게 전해주는 곡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세상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불안하며 갈등과 대립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이 힘들수록 사람들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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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민은기
서울대학교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교에서 프랑스 음악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학교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다수의 서양음악사 관련 도서뿐 아니라 음악의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