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지평

기획특집

정치제도와 포퓰리즘

37호 - 2024
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교수
이관후

1. 포퓰리즘의 시대

  포퓰리즘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2017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트럼프는 미국의 첫 포퓰리스트는 아니었지만, 가장 크게 성공한 포퓰리스트였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20세기 중반 이후, 후안 페론, 알베르토 후지모리, 우고 차베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레제프 에르도안, 빅토르 오르반 등 남미와 동·남부 유럽에서 차례로 확산된 포퓰리즘이 미국이라는 서구 민주주의의 심장까지도 위협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트럼프는 레비츠키와 지블렛이 제시한 ‘잠재적 독재자로서의 포퓰리즘 아웃사이더’가 보여주는 특성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의 규범을 거부하고,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며,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언론과 정치적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특성을 모두 보여준 것이다. 또한 집권 이후에는 독립적 국가기관들과 사법부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노골적으로 했고, 언론을 포함해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비판자와 경쟁자를 처벌하려고 했으며, 상대방 지지자의 투표율을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레비츠키·지블렛 2018). 심지어 그는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태도를 보이며 의사당에 진입하려는 시위대를 사실상 선동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극단적인 태도는 그 이전까지 미국의 어떤 유력 정치인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으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또다시 대통령 선거에 유력한 후보로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미국 정치의 퇴행을 넘어서, 후발산업국이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신생국 혹은 제3세계가 아닌, 근대 시민혁명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를 이끄는 국가에서 가장 반민주적인 후퇴가 포퓰리즘을 수단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바야흐로 포퓰리즘의 시대다. 많은 전문가들은 포퓰리즘이 최소한 10년 이상, 혹은 그 이상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런데 2000년대 이전까지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 같은 이데올로기, 혁명과 전쟁·쿠데타 같은 전환기적 사건, (군부)독재·나치즘·전체주의 같은 억압적 정치체제 등에 비해 중요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포퓰리즘은 20세기 전후에 미국과 러시아에서 나타난 농민 운동과 1960년대 이후 남미 등 일부 저발전 국가들에서 나타난 국민동원의 한 방식으로 이해되었을 뿐, 21세기에 유럽이나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들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리라고 예상한 정치적 현상이 아니었다(Hawkins and Kaltwasser 2017; 장승진·장한일 2022). 

  20세기 후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이데올로기 경쟁이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으로 끝났다고 선언했을 때, 많은 이들은 민주주의가 다른 체제와 더 이상 내용적으로 경쟁하지 않을 것이며, 정치체제의 최종적 형태로서 확정되었다고 판단했다(Fukuyama 1992). 그 이후에 가능하리라고 예상된 갈등은 탈정치적, 탈이데올로기적 갈등, 곧 문화와 전통을 둘러싼 충돌이었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출간한 다음 해에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을 출간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Huntington 1993). 이것은 전 지구적 세계화가 인류의 협력과 통합이 아니라 더 치열한 경쟁과 대립을 초래하고, 그것이 민족주의와 종교를 매개로 한 갈등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리고 이 문명의 충돌이 주요 국가들의 국내 정치(domestic politics)에서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대체로 제국주의적 팽창주의 경향에 대한 우려가 지배적이었다(그린버그 2016). 예를 들어, 셸던 월린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기인 2008년에 출간된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탈동원화를 특징으로 하는 미국 정치의 변화를 ‘전도된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nism)’이라고 명명했다(월린 2013). 이것을 작동시키는 핵심적 메커니즘은 권력을 일정한 한계 바깥으로 투사하는 슈퍼 파워다. 그는 9·11을 기점으로 슈퍼 파워가 주도하는 ‘테러리스트’의 박멸과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새로운 제국의 시대를 열 것이라고 보았다(이관후 2024).

  그러나 이때로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걸프 전쟁을 일으킨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이 지향하던 슈퍼 파워와 제국주의에 반기를 든 유력 정치인은 트럼프였다. 중도적 리버럴이 아니라 극우적 포퓰리스트가 오히려 슈퍼 파워를 제지한 것이다. 그가 제시한 미국의 애국주의는 인종주의와 결합한 미국 국내의 백인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많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난 이러한 극적인 정치적 변화를 정치학자들은 ‘포퓰리스트 모멘트(populist moment)’로 명명했다(Galston 2017; 무페 2019).

  그렇다면 포퓰리즘은 왜 이렇게 급속히 성장했을까? 지구화가 가져온 다양한 갈등의 양상이 왜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가 아닌 국내정치적으로 소외된 집단이나 계급들의 자기방어적인 방식으로 나타났을까? 많은 학자들은 포퓰리즘의 발생이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주디스 2017; 제르바우도 2022). 1980년대 레이거니즘과 대처리즘으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자본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고 다국적 기업들의 국제적 분업체계를 발전시켰다. 냉전 이후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이 사라지자, 지구적 공급망은 단절없이 전 세계를 조밀하게 구축하였고, 이것은 세계적 수준에서의 양극화도 심화시켰다. 그러나 그것이 포퓰리즘이 출현하게 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이 필요조건을 형성한다면 정치적 현상에는 언제나 사건사적 요인들이 충분조건으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적으로 볼 때, 기득권 엘리트에 대한 반발이라는 현상은 빈번한 것이었고, 현대 정치에서도 그 정치적 양상이 반드시 포퓰리즘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의 포퓰리즘은 20세기 초반의 미국과 러시아, 1960-70년대의 남미에서 일어난 현상과도 차별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잠재된 포퓰리즘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을까? 그것은 정치의 변화다. 포퓰리즘은 거대한 경제적, 사회적, 기술적 변화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 상황과 행태의 변화, 다양한 정치 주체들이 선택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 지구적 차원의 변화에서 볼 때, 포퓰리즘은 탈냉전 이후의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전개, 다자주의적 국제질서 속에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새로운 발흥, 지난 세기를 풍미했던 정당 정치와 대표 체제의 근본적 위기, 디지털 기술과 결합된 정치·언론 환경의 변화가 만들어낸 정치적 변화의 결과다. 특히 개별 국민국가들에서 그것이 실질적으로 형성되고 영향을 미치게 되는 작동원리의 차원을 보면, 그것은 선동적인 정치적 대표자와 그를 추종하는 피대표자 사이에서 형성된 독특한 정치 현상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 없다(이관후 2024). 보다 구체적으로 포퓰리즘은 인민 다수의 선거로 대표를 선출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산물, 선거제 대표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나 그것의 극단적 파생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포퓰리즘에 대한 정치적 이해는 현대 민주주의의 주요 변수인 정당정치, 선거제도, 정부형태 등의 관계 속에서 더욱 잘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2. 정당 정치와 포퓰리즘

  포퓰리즘의 등장은 정당 정치의 위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다수의 연구자들은 포퓰리즘의 등장 배경으로 ‘정치적 대표의 위기(crisis of political representation)’를 꼽는데, 여기서 정치적 대표의 주체가 바로 정당이기 때문이다. 샤츠슈나이더(Schattschneider 1960)는 “정당이 민주주의를 창출했고 근대민주주의는 정당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당은 말 그대로 ‘현대의 군주(통치자)’인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에게 통치권을 일정한 기간 동안 위임하는 정치제도다. 그런데 여기서 주권을 위임받아 통치를 행하는 주체는 겉으로 보기에는 개별 정치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당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후보자 개인이 아닌 후보자들의 연합체인 정당이 정권을 획득하고 정책을 지속하는 정치의 실제 행위자가 된다. 정부와 여당뿐만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선거 경쟁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야당도 정치의 주요 행위자로 인정받는 현상은 현대 정당정치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정치인 개인은 지속 불가능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가치와 정책은 정당을 통해서 오랜 일관성을 갖고 추구될 수 있다. 정당은 인간의 유한성과 임기제의 속성을 가진 현대 민주주의 통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정치적 주체다.

  정당은 처음에는 정치적 관점이나 이해관계에 따른 명사들의 사교 집단으로 시작했지만, 보통선거권이 확립되자 곧바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 1870년대에 최초의 남성 보통선거권이 등장한 이래로 약 100년의 현대 민주주의는 곧 정당의 발전과 함께한 민주주의였다. 그런데 1970년대 말부터 정치적 대표성과 책임성을 구현하는 정당의 기능과 역할이 축소되고, 정당의 뿌리가 시민사회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박경미 2012). 무당파 유권자의 증가, 선거 참여의 감소, 유권자들의 정당에 대한 불만, 대표-피대표자 간 유대감 및 반응성의 약화, 정치에 대한 무관심, 혐오, 정치에 대한 신뢰 붕괴, 낮은 정치효능감, 책임정치 메커니즘의 약화 등은 이런 ‘대표의 위기(crisis of representation)’를 알려주는 구체적 징후였다(이재묵 2019).

  대표의 위기는 곧 정당정치의 위기였다. 대표제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국가와 사회, 대표자와 피대표자를 연결하는 것(linkage)인데, 이 역할을 해야 할 정당들이 더 이상 시민들의 의제를 반영하지 않으면서 현대 대표제 민주주의 근간이 무너진 것이다. 실제로 현대의 선거 민주주의에서 주요 기득권 정당들, 예를 들어 소선거구 제도에서 양당제를 구축한 정당들이나 비례대표제하에서 몇 개의 유력 정당들은 계급·종교·지역·민족·인종 등을 기반으로 실제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대표하지 않아도 여전히 대표로 선출되곤 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대표의 역할에 대한 동기부여나 위기의식은 차츰 사라지게 된다. 또한 정당과 정치인은 이 안정적 정당 체제에서 시민들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획득하기보다는 국가기구 및 기업 등과 카르텔을 형성하고, 정치관계법과 선거제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성향도 보인다. 이런 정당과 정치인은 특정한 유권자 집단을 대표한다는 명목(standing for)으로 선출된 대표지만, 실질적으로 유권자를 위한 행위(acting for)는 하지 않는 기득권 엘리트들이다. 여러 연구자들은 바로 이들, 곧 대표하지 않는 대표를 향한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 현대 포퓰리즘의 시작점이라고 말한다(태가트 2017; Mastropaolo 2008; Norris 2020).

  이처럼 정당 정치의 위기가 포퓰리즘으로 이어지게 되는 과정은 정당 모델의 변화에서 잘 드러난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은 ‘대중정당(class party) → 포괄정당(catch-all party) → 카르텔정당(cartel party) → 선거전문가정당(electoral-professional party)’이라는 정당 모델의 변화를 겪었고, 후발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 과정을 압축적으로 경험하고 있다.[1]  대중정당은 당비를 포함하여 자체적으로 조달한 재정을 바탕으로 안정적 재정운영과 고유의 의사소통채널을 통한 당원의 이익 표출과 정치적 대표성 강화를 주요 기능으로 한다. 포괄정당은 대중정당모델의 계급적 혹은 이념적 특성을 약화시키면서 선거승리를 위하여 모든 계층들의 지지를 동원하는 포괄성(catch-allism)을 강조했다. 카르텔정당은 다른 신생정당의 진입을 막으면서 자원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서 정당이 국가, 사회 기구와 카르텔을 형성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는 모델이다. 선거전문가정당은 당원을 비롯한 정당조직이나 정책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선거전문가들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유권자여론층(opinion electorate)에 대한 정치적 호소에 주력하는 정당 모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당 모델의 변화는 선거 방식의 변화도 가져왔다. 대중정당은 당원들의 조직적 지지를 배경으로 정책 중심의 선거를 치렀지만, 정당모델의 변화에 따라 선거는 점점 당원에서 일반 유권자 중심으로, 정책에서 이슈와 후보 개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다시 정당정치에 영향을 주게 된다. 정당이 선거를 치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지면서, 일부 선동가와 전문가가 열성지지자들을 동원하는 기제로 정당을 이용하게 되고, 정당은 이제 일상적인 포퓰리즘의 도구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정당은 이제 다양한 사회적 균열을 정제하고 제도화하며 조직화해서 입법과 정책을 통해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지속가능한 기구가 아니라, 권력을 획득하려고 하는 극단적인 선동가가 장악한 포획물이 되었다. 정당이 이렇게 선거머신과 포퓰리스트의 도구가 되면, 정책의 지속성을 더 이상 담보할 수 없게 되고, 정책경쟁이나 책임정치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정당정치는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대표의 위기는 한층 심화되었다.

3. 선거제도와 포퓰리즘

  선거제도는 한 국가의 정치적 지형과 정당 체제, 정치 문화 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다. 그래서 선거제도는 말 그대로 정치의 틀을 형성(shape)한다. 정당정치의 위기에서 촉발된 포퓰리즘의 확산과 그것이 나타나는 양상에서도 선거제도는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특정한 선거제도가 포퓰리즘의 확산에 일관된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영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요인들에 비해 작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선거제도의 영향이 매우 결정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그 영향력의 강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각각의 주장들이 어떠한 근거를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또한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데 유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선거제도와 포퓰리즘의 관계에서 대표적인 가설 중의 하나인, ‘소수정파의 원내 진출을 용이하게 하는 비례대표제가 극우 정당에 정말로 유리한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비례대표제와 포퓰리즘의 우호적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헝가리와 폴란드 등 극우 정당이 집권에 성공한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고, 2016년 오스트리아 대선과 2017년 프랑스 대선, 2022년 이탈리아 총선, 2024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총선의 결과는 서유럽에서도 극우 정당이 집권을 넘보는 세력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었다(배병인 2017). 유럽에서 극우 정당들은 기본적으로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이민자 배제 등을 공통적인 요소로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서로 다른 이슈를 통해 유권자의 지지를 확대하고 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의 극우 정당은 반이주민 문제로 유권자의 지지를 얻은 반면에, 영국은 유럽연합 탈퇴를 주도하여 성공하였고, 이탈리아의 북부연맹은 지역주의를 이슈화하고,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경우에는 복지축소, 세금인하 등 반세계화 관련 이슈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상두 2017). 말 그대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극우 정당의 약진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베처 외(Becher, Gonzalez and Stegmueller 2022)는 이러한 유럽의 경험적 사례 하나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비례대표제와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의 관계를 검토했다. 이들은 영국이 1999년 유럽의회 선거제도를 소선거구제에서 비례대표제로 바꾼 것이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하고. 이 제도적 변화가 극우 정당의 득표율을 12~13.5% 증가시켰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동일한 시기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보다 현저하게 높은 증가였다고 평가했다.

  포퓰리스트적 투표 성향에 대해 2001~2018년 사이에 유럽 24개국에서 있었던 64개의 선거 관련 여론 데이터를 분석한 미리암 소레이스(Sorace 2023)의 연구는 비례대표제가 왜 포퓰리스트 정당에 유리한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제공한다. 그는 이 연구에서 (포퓰리즘적 투표 성향을 보이는) 유권자들이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을 실제로 관철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최소한 정치적 대표 체제를 통해 반영되는 것에 열정적 태도를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는 기존의 유력한 가설, 곧 포퓰리즘이 정당정치의 대표 체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선동가들을 만나 극단적으로 분출되는 현상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즉, 복지 및 이민자 문제 등에 대해 배제적 입장을 가진 소수는 실제로 자신들의 주장이 정부 정책으로 관철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이러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치적으로 대표·전달되고 진지하게 논의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또한 포퓰리즘이 다수 인민의 단일한 입장이 아니라 배제된 소수의 이해관계와 대표 욕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한편으로 기존의 대표 체계가 충분히 다원주의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반증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비례대표제는 포퓰리즘의 확산과 단일한 정비례 관계보다는 훨씬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포퓰리즘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비례대표제가 소수자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다원주의적 대표 체계를 형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비례대표제는 극우 포퓰리즘적 입장이 제도 정치로 진입하는 과정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소선거구 다수제 선거제도에 비해서는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이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많은 포퓰리스트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정치적으로 대표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이를 관철하려는 의지가 강하지는 않기 때문에, 비례대표제 선거제도는 포퓰리즘적 성향을 가진 유권자들의 정치적 욕구를 분출시키고 이를 통해 갈등을 해결·해소해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이러한 비례대표제의 특성은 실제로 최근 유럽의 정치에서 어느 정도 확인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극우 정당들이 제도 정치에 진입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의 극우 성향이 감소되기도 하고, 또 전통적인 정당들이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극우 정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 손을 잡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정치과정을 통해서, 비례대표 선거제도 외에 결선투표제 역시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의 약진을 제한하는 제도적 변수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2024 프랑스 총선에서는 결선투표제가 극우 정당의 집권을 저지했다. 프랑스에서는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12.5% 이상을 득표한 후보들을 놓고 2차 결선투표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번 총선에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투표율(66.71%) 속에서[2] 무려 306개 지역구에서 2차 투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중 220개 선거구에서 좌파연합인 ‘신인민전선’과 중도연합 ‘앙상블’의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극우파인 ‘국민연합’을 막기 위해서 중도와 좌파 내에서, 또 그들 사이에 거대한 선거연합이 형성된 것이다. 

  그 결과 당초 220석 전후로 제1당이 유력했던 국민연합의 의석수는 142석으로 줄어들어 제3당에 머물게 되었다. 극우 정당을 막기 위해 좌파연합을 구성한 신인민전선은 193석으로 1당이 되었고, 당초 100석 전후의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던 집권당 앙상블은 166석으로 2당을 차지했다. 사실 프랑스 총선에서 결선투표제가 극우 정당의 의석 확보를 제한한 것은 이번 선거가 처음이 아니다. 극우 정당은 2012년 총선 1차 투표에서 13.60%를 득표하고 2석을 얻었으며, 2017년 총선 1차 투표에서 13.20%를 득표하고도 8석만을 확보했다. 이후 지난 2022년에는 89석, 2024년에는 142석을 차지했지만, 이번에도 결선투표에 가로막혀 3당에 머물렀다(오창룡 2024). 

  이러한 결과는 한편으로 극우 정당 지지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줄 수 있지만, 이들의 집권과 정책 실현을 저지하려는 더 많은 유권자들과 정당행위자들의 선호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결선투표제는 1차 투표에서 33.22%, 2차 투표에서 37.05%의 득표율을 보인 극우 정당 지지 유권자들의 선호를 가시화하는 데 성공했고, 실제로 더 많은 유권자들이 원하는 대로 극우 정당의 집권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를 소레이스의 연구가 가진 함의에 대입해보면, 결선투표제는 다원주의적 대표성을 높이면서 동시에 정책적 선호도에서는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4. 권력구조와 포퓰리즘

  포퓰리즘의 확산과 관련해 선거제도와 더불어 권력구조의 차이도 중요한 변수로 제시되곤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권력구조(정부형태)는 사실상 국가의 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여기서 그 모든 사례를 검토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는 포퓰리즘이 대통령제와 의회제(내각제)에서 각각 어떤 속성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한다.

  먼저 포퓰리즘은 두 가지 측면에서 대통령제와 더 친화성을 갖는다고 평가된다. 하나는 특정 정치인 개인에 대한 감정적 선호나 숭배, 기득권 엘리트에 대한 공격, 대규모의 지지자 동원과 결집, 권력의 독점과 비민주적 의사결정 과정 등 많은 속성이 합의제 전통이 강한 유럽식 의회제보다는 독재자의 출현이 용이한 대통령제와 더 친화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도적 경향성으로 볼 때, 비례대표제를 기반으로 다당제와 연립정부가 보편화된 의회제에서 포퓰리즘 정당이 원내 다수 의석을 점하거나 집권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McCormick 2010). 그리고 이 같은 두 가지 속성은 권력구조의 측면에서 서로 융합되어 나타나고, 그 경향성을 강화하는 속성이 있다.

  먼저 정부형태의 측면에서 보면 권력이 작동하는 구조에서 대통령제와 의회제의 가장 큰 차이점이 나타난다. 의회제에서는 내각이 곧 의회 다수파(대체로 연합의 형태로)의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의회와 내각이 상호적 책임성을 갖고 긴밀하게 협조하는 가운데 정책이 집행된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상시적인 대화와 협력, 또 입법부 내부에서 다수파 연합을 형성한 정당 및 정치세력 간의 타협과 조정이 합의제적 민주주의의 전통을 형성하는 것이다. 

  반면 대통령제에서는 행정부가 입법부에 대해 책임을 갖지 않을 뿐 아니라, 의회 구성에 따라서 상호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과 의회가 모두 주권자인 국민의 직접적 선출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삼권분립 원리하에서 상시적으로 이중적 정당성(dual legitimacy)의 문제가 발생한다(김선택 2017). 대통령제에서 나타나는 권력분립의 원리는 본래 견제와 균형을 통해 권력 독점을 방지하려는 취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통령과 정당지도자들이 상호 협력과 조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유권자에게 직접 지지를 호소하고 이를 동원함으로써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동기를 유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동기는 현대 매스미디어와 소셜네트워크의 출현이라는 기술적 변화를 통해서, 특히 라디오, 텔레비전, 소셜 미디어 등을 매개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국가적·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은 자신에게 부여된 국가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대중적으로 호소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시도를 해왔으며, 이러한 시도는 종종 포퓰리즘적 정치행태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대통령제 자체가 포퓰리즘에 더 친화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대통령제가 이론적 취지와는 달리 많은 경우 행정부의 수장을 넘어서 입법부와 사법부에 광범위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제왕적이며, 여론에 의한 통치와 소셜 미디어 같은 의사소통 매체에 의해 촉진된 ‘동원된 다수의 전제정’으로 빠질 위험이 높다는 지적이 있다(최장집 2020). 그러나 같은 정부형태를 갖고도 대통령이나 국회의 정치행태와 관례, 정치자금이나 지역구 운영 등을 규정한 정치관계법의 영향, 대립적 정치문화나 정당 체제의 영향에 따라서 정치의 질과 내용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조성대·홍재우 2012).

  그래서 보다 본질적으로는 양당제에 비해 다당제가 더 낫다든지, 소선거구보다 중대선거구가 낫다든지, 대통령제보다 분권형대통령제나 의회제가 낫다는 식의 과도한 일반화가 어렵듯이, 그것이 포퓰리즘과 갖는 관계에 대해서는 항상 특정한 경향이 나타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포퓰리즘에 취약하다는 통념이 있다. 실제로 그동안 한국 정치에서는 입법-사법-행정 간의 상호균형적 관계가 무너지고 대통령, 곧 통치자 1인을 정점으로 하는 전근대적 권력 위계의 속성이 되풀이되는 역사가 반복적으로 나타난 것이 사실이다. 삼권분립의 균형보다는 행정부의 중앙 권력을 중심으로 국가 권력이 집중되고, 정부 내에서도 법치를 기반으로 하는 절차주의적 합리성이 무시되면서 상위기관이나 상위계급자의 부당한 지시와 요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것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정치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트롱맨’의 역사와 문화가 민주화 이후, 특히 21세기 포퓰리스트적 통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노사모’라는 소규모 지지집단을 갖고 대중에게 직접적인 호소를 통해 포퓰리스트적 특성을 보여준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어떤 대통령보다 권위주의를 탈피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대통령 개인에 대한 신화적 노스탤지어가 작동한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제왕적 대통령처럼 강력한 권한을 휘두르기보다는 측근들에게 권한을 위임한 무기력한 통치를 했다는 것이 사후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사실 대통령제에서도 연립정부는 필요할 경우 얼마든지 실현 가능하고, 실제로도 매우 흔한 정치적 현상이다. 이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서는 흔히 중요한 변수로 여겨지는 다당제 상황을 통제하고도 대통령 결선투표제, 비례대표제, 동시선거 등의 변수를 통해서도 합의제적 연립정부가 빈번하게 나타났다(조성대·홍재우 2012). 따라서 대통령제가 본질적으로 제왕적이며 포퓰리즘과 친화성이 있다고 결론을 짓기보다는, 다른 제도와 사회균열, 정치문화가 복합적으로 작동한 결과 그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이관후 2020).

5.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1996년부터 2014년까지 유럽연합 회원국에서 치러진 107회의 선거 결과를 분석한 배병인(2017)은, 이 기간 동안 각 나라에서 극우 정당의 득표율은 개별 국가의 민주주의 척도 점수와 일관되게 반비례한다고 말한다. 이 연구를 토대로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간의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적어도 상당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즉, 극우 포퓰리즘의 발현은 지난 한 세대 동안 민주주의가 퇴조한 결과이거나, 그 둘 사이에 모종의 상호작용이 있다고 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퓰리즘의 어떤 속성이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것일까?

  폴 태가트(Taggart 2017)는 포퓰리즘이 “순수한 국민과 타락하고 불순한 타자를 구분하는, 마음속에 구축된 공간을 배경으로 구성된 일종의 관념”이라고 말한다. 무데와 칼트바서(2019)는 포퓰리즘을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 곧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인민(people)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로 정의한다. 이 두 정의에서 공통되는 포퓰리즘의 두드러진 속성은 ‘구분(divide)’과 ‘배제(exclude)’다.

  이러한 속성은 포퓰리즘이 왜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에서 배태된 현상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가 될 수 없는가를 설명한다. 민주주의는 다원주의적 사회에서 평등과 자유를 누리는 시민들이 비폭력적 수단으로 공공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체제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과 그들의 이해관계는 모종의 구심점을 통해 집단적 대표성을 갖게 되지만, 그 구분이 순수함과 불순함, 선과 악, 옳음과 그름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다민족 사회에서 민족적·문화적 이해관계에서 나타나는 갈등, 지역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의 충돌, 자유·평등·인권과 같은 가치의 추구 정도에 대한 이견, 사회적 자원의 배분 원리에 대한 차이, 교육과 복지에 대한 국가의 개입 정도에 대한 이견 등은 정치적으로 집단적 대표성을 띠게 되는데, 여기에 선악의 기준은 도입될 수 없다.

  정치공동체에서 집단적 대표 체계가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한 집단적 가치와 이해관계는 옳고 그름이 아닌 ‘다름’으로 간주되며 대화, 설득, 타협, 다수결 등의 원칙에 따라 정해진 정당하고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해결되어야 할 대상이지 사회적으로 무시되거나 배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언제나 인민이 합의하는 제도적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절차적 정당성의 한계는 언제나 특정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잠정적으로만 유효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민주적 절차를 거쳐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더라도 그 결론은 옳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과 정보를 가진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라는 점에서만 제한적으로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민주주의에서 항구적으로 구분되어야 하는 기준이나 배제될 수 있는 가치·이해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포퓰리즘이 이와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에서는 엘리트 기득권에 대항하는 인민 다수의 의견이 항상 구분될 수 있고, 후자가 항상 더 우월하고 선하며, 전자의 의견은 항상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포퓰리즘은 이러한 구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데, 그들은 사실상 인민의 의사가 항상 동질적이며, 마음만 먹으면(엘리트 정치인들이 그것을 모른 척하거나 왜곡하지만 않으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는 ‘단일한 상식’이 인민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이처럼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다원주의를 거부한다. 포퓰리스트들은 인민을 이상화된 상징적 공동체, 순수하고 동질적인 세계적 정치 주체로 묘사하며 이 집단은 일련의 문화적·민족적 또는 사회경제적 의미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은 무엇보다도 이념적 일원론이다(Ivaldi 2018). 이러한 반다원주의적 경향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서 파생된 현상이지만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왜 차별적이며 유사민주주의를 넘어설 수 없는가의 준거점이 된다. 

  물론 포퓰리즘에 대한 학계의 논의 중에는 이러한 입장과 다른 주장도 적지 않다. 포퓰리즘의 속성을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은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으며, 좌파 포퓰리즘의 민주적 가능성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다. 필자의 입장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파생물이지만 반다원적이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와 친화적이기 어렵다는 것이지만, 이에 대한 논쟁은 충분히 가능하고 생산적일 것이다. 이런 논쟁은 무엇보다 포퓰리즘 이후의 정치를 상상하고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것은 포퓰리즘 시대의 정치학이 수행해야 할 의무이자, 21세기 기술변화와 세계질서의 격동 가운데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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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중정당은 당비를 포함하여 자체적으로 조달한 재정을 바탕으로 안정적 재정운영과 고유의 의사소통채널을 통한 당원의 이익 표출과 정치적 대표성 강화를 주요 기능으로 한다. 포괄정당은 대중정당모델의 계급적 혹은 이념적 특성을 약화시키면서 선거승리를 위하여 모든 계층들의 지지를 동원하는 포괄성(catch-allism)을 강조했다. 카르텔정당은 다른 신생정당의 진입을 막으면서 자원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서 정당이 국가, 사회 기구와 카르텔을 형성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는 모델이다. 선거전문가정당은 당원을 비롯한 정당조직이나 정책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선거전문가들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유권자여론층(opinion electorate)에 대한 정치적 호소에 주력하는 정당 모델이다.

  • [2]

    참고로 2012년 총선 투표율은 57.22%, 2017년 48.70%, 2022년 47.51%였다.

저자 소개

이관후
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교수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왜 ‘대의민주주의’가 되었는가?: 용례의 기원과 함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