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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부아지에 질량 보존의 법칙 발견 250주년] 라부아지에, 혁명을 꿈꾼 혁명의 순교자
“그의 머리를 자르는 데에는 한순간이면 충분했지만, 그와 같은 것을 얻기까지는 백년도 더 걸릴 것이다.” 프랑스 수학자 라그랑주(Joseph-Louis Lagrange, 1736-1813)는 한 화학자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탄식했다(Delambre 1867: 39-40). 프랑스 혁명 이후 공포정치가 한창이던 1794년 5월 8일,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1743-1794)가 혁명가들에 의해 51세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혁명의 희생자인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연구가 물리학과 화학에서 혁명(une révolution)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Bensaude-Vincent 1983: 56). 그리고 오늘날 후세는 라부아지에의 업적을 ‘화학 혁명’으로 기억한다.
1. 혁명가의 삶
1743년,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라부아지에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1754년 열한 살의 나이로 파리대학교에 입학했고, 여기서 과학을 처음 접하고 큰 흥미를 느꼈다. 졸업 후 법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커리큘럼을 활용하여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1763년 법학사 학위, 1764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파리 고등법원에서 잠시 수습 생활을 거친 것을 제외하고는 법조계에 더 이상 몸을 담지 않았다.
그가 최초로 이룩한 과학적 성취는 1764년 스물한 살 때 발표한 화학 논문으로, 황산 칼슘에 관한 실험을 보고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화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1765년 도시의 가로등 배치를 개선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하여 프랑스 과학원에 논문을 제출하였고, 그 공로로 1766년 왕에게 황금 메달을 수여받았다. 또한 1767년에는 알자스로렌 지방의 지질 조사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2년 후에는 프랑스 최초의 지질도를 완성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768년 그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프랑스 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라부아지에는 계몽주의자이자 인도주의자였다. 그는 과학 지식으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엘리트 과학자로서 그러한 작업에 앞장서야 한다고 믿었다. 1768년 그는 파리에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상수도 문제를 연구하기도 하였고, 1772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병원을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공기 순환을 고려한 건축 계획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감옥의 위생 상태 연구를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1780, 1791년) 농작물 생산성 향상에 관한 연구도 수행하였다(1788년). 또한 그는 1775년에 프랑스 화약관리국장에 임명되어 1792년까지 그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업무는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일찍이 1767년 어머니의 유산을 간접세 징수조합인 수세조합(ferme générale)에 투자하였고, 자신도 세금징수업에 관여하였다. 그 결과 그는 과학 연구를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수세조합은 그에게 평생의 반려자를 선물해주었다. 그는 1771년 마리안(Marie-Anne Pierrette Paulze, 1758-1836)과 결혼하였는데, 마리안이 바로 이 수세조합 중역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지만, 이 결혼은 라부아지에에게 큰 행운이었다. 마리안이 사적인 삶뿐 아니라 연구에서도 최고의 파트너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리안은 라부아지에의 실험 과정을 기록하고 편집하였으며, 그림을 배워 논문에 들어갈 삽화를 직접 그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영어 논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라부아지에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마리안의 도움으로 연구를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세조합이 라부아지에에게 행운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세금징수업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이 조합은 민중의 미움을 사고 있었고, 프랑스 혁명이 벌어진 직후인 1791년 3월에 급기야 문을 닫게 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학자였던 라부아지에는 처음에는 혁명 정부의 도량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수세조합에 관여한 이력 때문에 화약관리국장 자리와 도량형위원회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수세조합 관련자들을 처벌하라는 압력이 점점 커지면서, 마침내 라부아지에도 체포되었다. 그는 과학 연구에 전념하느라 수세조합 일에서는 손을 뗀 지 오래되었다고 항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794년 5월 8일, 수세조합 조합원 스물여덟 명이 처형될 때 장인과 함께 사형수 중 하나로 삶을 마감한다.
2. 화학 혁명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라부아지에가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 분야는 화학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화학에서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견했으며, 실제로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토머스 쿤은 라부아지에가 이끈 변화를 가리켜 “화학 혁명”이라 불렀고, 과학 혁명의 패턴을 보이는 전형적인 예로 사용하였다(쿤 2013).[2] 그렇다면 그 변화는 무엇이었는가?
1) 기체 화학과 플로지스톤 이론
젊은 라부아지에가 화학 연구에 뛰어들 당시는 기체 화학(pneumatic chemistry)의 전성기였다. 이산화 탄소, 수소, 산소처럼 겉보기에는 동일한 무색무취의 ‘공기’지만 여러 성질이 확연하게 다른 기체들이 하나둘 분리되었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그 성질들도 조금씩 이해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산화 탄소 기체로 가득 채운 병 안에 쥐를 가두면 그 쥐가 질식한다는 것을 통해 화학자들은 이산화 탄소와 일반적인 공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도출된 다양한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당시 화학자들이 사용한 이론은 플로지스톤(phlogiston) 이론이었다. 플로지스톤이란 물질이 연소할 때 물질에서부터 빠져나가는 성분으로, 플로지스톤이 모두 빠져나간 물질은 더 이상 연소할 수 없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일반적인 연소뿐 아니라 금속을 가열할 때 일어나는 변화도 설명할 수 있었다. 금속을 가열하면 금속이 광택을 잃고 금속회로 변화하는 하소(煆燒)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 현상을 플로지스톤을 잃으면서 나타나는 변화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플로지스톤은 열과 빛을 전달하는 성분이기에 연소나 하소 과정에 열과 빛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플로지스톤 이론이 적용된 한 가지 예로 밀폐용기 내의 연소 반응을 생각할 수 있다. 충분한 양의 숯을 밀폐된 용기에 넣고 불을 붙이면, 숯이 다 타서 재가 되기도 전에 불이 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플로지스톤 이론에 따르면 일정량의 공기가 포함할 수 있는 플로지스톤의 양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밀폐된 용기 안에서 공기가 플로지스톤으로 포화되면 연료가 남아 있더라도 연소 반응이 멈추는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1772년, 금속이 하소될 때 질량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직접 실험을 수행하여 금속이 하소되면 금속회의 질량은 증가하고 용기 내 공기의 부피는 감소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하소 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다면 금속보다 금속회의 질량이 더 가벼워야 할 테니 이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결과였다. 그는 처음에는 플로지스톤 이론의 틀 안에서 이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금속이 금속회가 되는 과정에서는 금속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대신 공기 중에서 다른 성분이 금속과 결합해 금속회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내 그는 이 설명에서 플로지스톤 개념을 제거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하소 과정은 공기 중에서 어떤 성분이 금속과 결합한다고만 해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2) 혁명의 전환점
그렇다. 연소나 하소 과정에서 물질로부터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대신 산소 기체가 물질과 결합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라부아지에는 연구를 지속하여 1777년경 자신의 이론을 거의 완성하고, 플로지스톤 이론이 틀렸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는 플로지스톤은 상상의 물질일 뿐 화학에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학계를 설득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라부아지에가 학계를 설득한 방법은 공개적으로 대규모 실험을 시연하는 것이었다.
그는 1785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수소 기체와 산소 기체를 섞은 뒤 스파크를 튀겨 물을 만드는 실험을 수행하였다. 플로지스톤 이론도 이 실험을 설명할 수 있다. 플로지스톤 이론에 따르면 수소 기체는 플로지스톤과 물이 결합한 물질이었고, 산소 기체는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 공기였다. 그 두 기체가 결합하면서 수소 기체로부터 산소 기체로 플로지스톤이 옮겨지고 물과 공기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플로지스톤 이론도 실험 결과는 설명할 수 있었지만, 한 가지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플로지스톤이 빛과 열을 전달하는 성분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빛과 열이 발생하면 그만큼 플로지스톤이 사라진 것이다. 반면 라부아지에의 이론에서는 빛과 열을 질량이 없는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반응 전의 질량과 반응 후의 질량을 비교한다면, 플로지스톤 이론에서는 소멸된 플로지스톤의 양만큼 질량이 감소할 것이나 라부아지에의 이론에서는 질량 변화가 없을 것이었다. 라부아지에는 물이 만들어지기 전 두 기체의 질량과 물이 만들어진 후의 질량을 측정하였고, 두 값이 높은 정확도로 같다는 것을 보이는 데 성공한다.
이 실험 이후 학계의 분위기는 반전되었고,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산화 이론으로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3] 커원(Richard Kirwan, 1733-1812)은 산화 이론을 향해 날카로운 공격을 펼치면서 플로지스톤 이론을 마지막까지 사수했지만, 결국 1791년 실험적 근거의 부족을 인정하며 항복을 선언하였다. “과학사에서 잘 알려진 모든 혁명들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어쩌면 화학 혁명일 것이다. (……) 라부아지에가 기체에 관한 화학을 탐구하기 시작한 때와 유럽에서 플로지스톤을 옹호한 최후의 주요 인물인 리처드 커원이 공개적으로 항복을 선언한 때 사이의 간격이 겨우 20년에 불과하다”(장하석 2021: 97-98).
3) 혁명 정신의 전파
산화 이론으로 일약 화학계의 스타가 된 라부아지에는 이후 자신의 이론을 과학자 사회에 전파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라부아지에는 1787년 『화학 명명법(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이라는 책을 세 명의 동료 화학자들과 함께 출판하는데, 이 책은 혼란스럽던 당시의 화학 용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당시 화학 물질들의 이름은 역사적인 이유로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성분을 포함하는 물질들이 전혀 다른 이름을 갖기도 하고, 반대로 전혀 다른 물질들이 색깔이나 모양 또는 냄새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비슷한 이름을 받기도 했다. 라부아지에와 동료들은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고자 이 책에서 통일된 명명 체계를 제시하였다. 이 체계에서는 단순한 물질 성분인 ‘원소’를 가정하고, 이 원소로부터 화학적 조작을 통해 만들어지는 물질들을 원소와 조작의 이름을 조합하여 명명하였다. 예를 들어 ‘탄소’를 산화시켜 얻는 물질은 ‘산화 탄소’가 되는 식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명명 체계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 라부아지에의 산화 이론이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플로지스톤이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라부아지에의 이론에 등장하는 ‘산소’, ‘빛’, ‘열’ 등이 중요한 원소로 다뤄진다. 즉, 이 책에서 제시하는 명명법을 사용하려면 자연스럽게 라부아지에의 이론 체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책이 간행된 지 20년이 흐른 뒤에는 유럽과 미국의 모든 화학자가 전통적인 용어를 버리고 『화학 명명법』의 용어들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레 라부아지에의 이론도 화학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1789년 『화학 원론(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이라는 교과서를 집필하여 자신의 이론을 본격적으로 집대성하였다. 이 책에서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이론을 중심으로 화학의 모든 분야를 하나로 통합하는 개념적 틀을 제시하면서 이를 가리켜 “새로운 화학”이라 불렀다. “새로운 화학”의 한 가지 특징은 숫자로 표현되는 측정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었다. 라부아지에는 질량이나 열량 등 물질의 물리량을 정확하게 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이를 통해 화학의 정량화를 시도하였다. 『화학 원론』에서는 이 작업에 필요한 저울, 열량계 등의 사용법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 책 역시 당대 화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화학 연구 방법론이 크게 변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라부아지에의 ‘혁명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프랑스 철학자 콩디야크(Étienne Bonnot de Condillac, 1715-1780)의 영향을 받아 화학을 단순한 개념으로 구성된 학문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한 가지가 정량적 측정이었다. 라부아지에는 화학 반응을 대수 법칙처럼 단순하게 묘사하고자 하였고, 마치 방정식의 좌변과 우변이 같은 것처럼 반응물과 생성물에서 같게 유지되는 양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그가 찾아낸 것이 바로 질량과 열량이었다. 요컨대, 라부아지에는 화학을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저울과 열량계를 활용한 것이다. 용어 개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부아지에와 그의 동료들에게 ‘원소’는 분석을 통해 찾아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물질 성분이었고, 실험으로 알아낼 수 없는 그 너머의 설명은 불필요했다. 이들이 창안한 화학 명명법은 원소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이에 가해지는 화학적 조작만을 이름에 담음으로써 ‘단순한 화학’을 달성할 수 있었다.
3. 라부아지에와 질량 보존의 법칙
오늘날 라부아지에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라부아지에가 질량 보존의 법칙을 최초로 생각해 냈거나 검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 자체는 오래전부터 화학자들 사이에서 공유되던 개념이었고, 특별한 증명 없이도 선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가 화학 혁명에서 플로지스톤 이론을 논파하기 위해 사용한 물 합성 실험을 떠올려보면, 반응 전후에 물질의 총질량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그 기저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질량 보존의 법칙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다면 이 가정을 두고 매서운 공격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라부아지에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밀폐된 용기 안에서 반응이 진행될 때 전체 계의 질량은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가정 자체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즉, 질량 보존의 법칙은 당시 과학자 사회에서 공감대를 이루던 법칙이었다.
라부아지에의 업적은 질량 보존의 법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데에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숫자로 측정되는 양을 중요하게 여겼고, 보존 개념에 깊이 의지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기체 화학에 뛰어들기 전부터 질량 보존의 법칙을 활용하였다. 1770년, 라부아지에는 파리의 상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수원에서 물을 채취하여 끓이는 실험을 수행하였다. 이때 물속에서 고체 물질이 발생하였는데, 이에 대해 물을 가열하면 흙이 만들어진다는 설명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가열 전후의 질량을 측정하여 생성된 물질의 질량이 용기의 감소한 질량과 거의 같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이 잔여물이 용기에서 왔음을 밝혀냈다(모런 2006: 272-273). 그는 이후 연구를 수행하면서 질량 보존의 법칙을 대전제로 놓고 여러 분석을 수행하였으며, 플로지스톤 이론을 논파하는 데에도 질량 보존의 법칙을 적극 활용하였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라부아지에는 때 이른 죽음을 맞았지만, 화학 혁명으로 ‘단순해진’ 화학은 19세기를 맞아 눈부신 발전을 이룬다. 특히 19세기 유기화학의 발전에는 정량화된 화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후배 화학자들은 번성하는 화학을 보면서 라부아지에의 이름을 기억했다. 화학 혁명의 상징이었던 라부아지에가 질량 보존의 법칙과 연결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그 결과 오늘날 라부아지에는 ‘현대 화학의 창시자’이자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문헌에 따라 라부아지에가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한 해를 1774년 혹은 1789년으로 본다. 1774년은 라부아지에가 최초로 하소 실험을 수행하여 그 결과를 보고한 해이고, 1789년은 『화학 원론』이 출판된 해이다. 두 업적 모두 질량 보존의 법칙을 그 핵심에 두고 있다.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서술로 알려진 다음 글귀는 『화학 원론』에 등장한다. “기술의 작용이나 자연의 작용으로 아무것도 만들 수 없고, 모든 작용에서 작용의 전후에 동일한 물질의 양이 존재한다는 것은 원칙으로 제안될 수 있다”(Lavoisier 1789: 140-141; Martins 2021: 12에서 재인용). 『지식의 지평』에서는 라부아지에가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한 해를 1774년으로 보아 올해를 그 250주년이 되는 해로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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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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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 토마스 새뮤얼 (김명자·홍성욱 역), 2013, 『과학혁명의 구조』, 서울: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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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ere, Trevor H., 1990, “Lavoisier: Language, Instruments, and the Chemical Revolution,” in Trevor H. Levere and William R. Shea (eds.), Nature, Experiment, and the Sciences: Essays on Galileo and the History of Science, Dordrecht: Kluwer Academic Publishers, pp. 207-223.
Martins, Roberto de Andrade, 2021, “A Priori Components of Science: Lavoisier and the Law of Conservation of Mass in Chemical Reactions,” Scientiarum Historia et Theoria Studia 3: 5-71.
자료
- [1]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avoisier-humanexp2.PNG
- [2]
하지만 과연 라부아지에가 이끌었던 변화가 ‘혁명’이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역사학자들도 있다(Klein 2015). 이 글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점에서 라부아지에의 업적을 서술한다.
- [3]
실제로 ‘화학 혁명’이 그렇게 단절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장하석(2021)에 실려 있다. 산화 이론이 플로지스톤 이론에 대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이론이 아니었고, 실제 화학자들도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 [4]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es_merveilles_de_l'industrie,_1873_%22Appareil_de_Lavoisier...%22_(484005906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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