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지평

기획특집

점잖은 인종주의와 증오 극복의 수사: 미국인들은 어떻게 구조적 인종문제를 개인의 태도 문제로 환원해 왔나

36호 - 2024
서울대학교 역사학부 교수
김성엽

 

  21세기가 갈수록 분열과 극단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는 우려는 근래 전 세계 언론과 학계, 정계의 뜨거운 화두이다. 미국 사회 내부의 갈등 역시 이런 견지에서 새삼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는 단지 미국이 초유의 패권국으로서 늘 많은 관심을 받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미국 사회에서 불거진 잦은 증오 범죄와 폭력 사태, 서로 정반대 방향의 변화를 거세게 요구하는 좌우파 풀뿌리 저항운동,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이 촉발한 정치적 소요와 사회분열적 ‘문화 전쟁’은 질서와 안정을 지탱하던 모든 사회문화적, 제도적 요소들이 ‘자유세계의 중심부’에서부터 무너지며 세상이 걷잡을 수 없는 증오와 반목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징표로 비춰질 만도 하다(New York Times 2023. 7. 19일자). 미국 사회에서 이런 분열적 양상이 특히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근원 중 하나로 인종 관계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인식은 정치담론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미국의 진보 진영은 트럼프와 우파 포퓰리즘이 인종적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며 사회적 분열을 조장한다고 비판하는 반면, 우파 정치인, 방송인들은 미국 매체와 학계, 교육의 ‘좌편향’이 미국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약화시키며 인종 간 적대, 특히 백인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공격한다(Boston Review 2021. 5. 7일자). 사회정치적 분열의 원인에 대한 진단 또한 극명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인종적 증오(racial hatred)의 근원과 사회적 맥락에 대해 이처럼 상이한 진단이 끊임없이 제기된다는 사실은, 인종적 증오를 문제시하고 비판하는 담론이 단순히 인종 관계의 현실을 그대로 투영한 게 아니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 미국의 역사는 인종적 증오 극복 수사가 그 자체로 특정한 이념적 편향과 사회적 태도, 정치적 의도를 깊이 반영하여 형성·변형되어 왔고, 나아가 자주 전략적으로 사용되곤 했음을 잘 보여준다. 건국기부터 20세기까지의 몇몇 사례를 통해 이 글이 들추어내려는 역사는, 인종적 증오를 문제시하면서도 ‘남 탓’으로 돌리는 수사, 즉 ‘나는 안 그렇지만’ 다른 누군가가 인종적 편견과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이 인종문제의 근원이라는 수사의 역사이다. 나아가 이런 수사가 어떻게 인종 ‘문제’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며 구조화된 인종질서의 존속에 기여해 왔는가를 살펴보려 한다.[1] 

1. 인도주의

  유럽계 정착민들이 북미 원주민의 토지를 수탈하고 아프리카인을 노예화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탄생한 미국 사회는, 처음부터 늘 복잡한 인종 관계를 배태해 왔다. 원주민들[2]과의 관계는 유럽인들의 초기 정착 단계 이후에는 미국 사회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오해할 수 있으나, 역사학자들은 많은 정착민들이 적어도 건국기까지 원주민들과 일상적으로 교류하며 공존하였고, 또 여러 층위의 정치 기구와 경제 조직이 원주민들과의 끊임없는 제휴, 경쟁, 갈등 속에서, 즉 원주민들의 존재를 깊이 의식하고 그로부터 직간접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으며 모습을 갖추어 나갔음을 강조한다. 미국 독립 한 세대 전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북미 영국계 식민지의 엘리트들은 오히려 (모든 원주민 집단과는 아니지만) 강력한 인접 원주민 정치체들과의 협력적 관계를 적극 도모하곤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프랑스, 스페인 제국을 견제하려는 지정학적 고려, 특정 원주민들과의 모피 교역으로 수익을 올리고 또 원주민들로부터의 토지 구매 권한을 독점하려는 경제적 계산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이후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게 될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등 많은 식민지 엘리트층은 자신들이 계몽주의적 인간관에 입각하여 원주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대하려 한다고 표방하였다. 

  엘리트층의 인도주의적 수사가 얼마나 진정성 있는 것이었는지와는 별개로, 많은 백인 정착민들은 이런 포용적 수사조차 거부하였다. 특히 18세기 후반 유럽 제국들 사이의 전쟁과 외교 속에서 북미의 지정학적 상황이 급변하면서 원주민 토지를 향한 정착민들의 물결이 거세졌는데, 이들은 자국 지도층의 제재를 무시하면서까지 자발적으로 원주민의 토지에 정착하려 하곤 했다. 이처럼 물리력을 앞세운 식민 정착은 당연히 원주민들과의 크고 작은 폭력적 대치를 격화시켰으며, 그 가운데 주변부 정착민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며 원주민에 대한 깊은 인종적 증오심을 키우곤 했다. 같은 맥락에서, 원주민에 대한 포용적 태도를 보이는 종교 지도자, 원주민과의 교역을 일삼는 상인, 원주민과 평화적 외교를 도모하는 관료 및 지도자 역시 정착민들에게는 못지않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엘리트들은 정착민들의 적대적 태도를 비판하며, 사사로운 편견과 증오심에서 벗어나 미국인들이 인도주의와 보편주의에 입각해 원주민을 ‘보호’하고 ‘문명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독립선언문” 서문의 유명한 문구는 건국기 미국 엘리트의 이런 계몽주의적 이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독립과 건국은 또한 주변부 정착민들과의 타협을 요하는 어려운 작업이었고, 건국 엘리트들은 이런 정치적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독립선언문”은 (후대에는 거의 주목받지 않는) 본문 후반부에 가서는 정착민들의 인종적 증오에 당위성을 부여하며 건국 취지의 일부로 수용하는 수사를 담고 있다. 다만 정착민들의 적대적 태도를 직접 언급하는 대신, 북미 원주민들 모두를 “전쟁 시 나이와 성별, 상태를 불문하고 상대를 파괴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무자비한 인디언 야만인들”로 규정한 후 그들이 영국의 방관 및 독려 속에 “접경지대에 있는 우리 주민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성토함으로써, 원주민을 적대시하는 정착민들의 공격적 식민활동에 간접적으로 명분을 부여하고 있다.[3]

  건국기 엘리트들은 이후에도 주변부 정착민들에 대한 제재와 지지가 뒤섞인 애매한 태도를 견지했는데, 의도가 어찌 되었든 이런 태도는 결국 인도주의적 수사와 폭력적 식민 팽창을 ‘조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미국 연방정부는 내륙을 안정시키며 중앙화된 통치질서에 확고히 편입시키고자, 그리고 중앙권력과 결탁한 토지투기꾼, 개발업자의 이권을 보호하고자, 처음에는 주요 원주민 정치체들과 가급적 평화적인 관계를 도모하고자 했다. 엘리트들은 원주민들이 미국인들에게 토지를 내주더라도 무질서한 폭력이 아니라 필히 연방정부와의 중앙화된 거래를 통해 양도하게 하려 유도했고, 그러기 위해 토지 양도의 대가로 해당 원주민 정치체가 자신들의 남은 땅에서는 연방정부의 보호와 지원 아래 확고하고 영구적인 자주권을 누리게 될 것이라 약속했다. 문제는 남은 원주민 땅조차 놔두지 않고 끊임없이 침투해 들어가는 정착민의 존재였다. 연방정부 지도자들은 정착민들의 무법적이고 적대적인 행위를 꾸짖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적극 제재하려 들지 않았다. 중앙권력이 여전히 미약한 시기에, 주변부 정착민이 ‘미국인’으로서 국가에 충성하게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이었으리라. 

  미국 정부는 어쨌든 정착민의 폭력적 식민 활동 덕분에 대규모 정복전이나 치안·행정 인력 투입 없이도 손쉽게 영토를 팽창해 나갈 수 있었고, 지속적인 팽창은 물론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성장에 결정적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 정부가 원주민들과 정당한 교섭을 통한 평화로운 팽창만을 추구해왔다고 내세우고, 식민 폭력은 인종적 증오에 찬 주변부 일부 정착민의 통제 불가능한 행위 때문이라며 책임을 전가했다. 연방 지도자들의 이런 이중적 태도는 원주민들이 미국 정부에 토지를 양도하도록 압박한 수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은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혀 원주민을 폭력적으로 몰아내려는 무법적 정착민들이 계속 내륙으로 몰려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강조한 후, 정착민에게 아무 대가 없이 토지를 강탈당하는 것보다는 원주민의 ‘친구’인 연방정부가 약속하는 약간의 보상이라도 챙기며 토지를 양도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설득하곤 했다. 이처럼 폭력적 식민 수탈을 주변부 백인들의 인종적 증오 탓으로 돌림으로써, 미국 정부는 영토 팽창의 실리와 원주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보호자’로서의 명분 모두를 챙길 수 있었다. 

  ‘일각의 인종적 증오 탓’으로 돌리는 수사의 효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엘리트주의적 성격이 다분한 건국기 연방 지도자들의 수사는, 아무래도 원주민에 대한 미국인 전체의 태도로 일반화될 여지는 적었다. 게다가 1820년대 말부터 미국 정치의 주류를 형성한 ‘잭슨파(Jacksonian)’는 정착민을 앞세운 거친 식민 팽창을 적극 옹호하였기에, 원주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수사의 입지는 더욱 작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초기 산업화와 더불어 급증한 교육받은 중산층 중에는, 미국이 보다 도덕적인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고 믿으며 식민 폭력과 노예제 등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이들도 미국의 영토 팽창으로부터 수혜를 입었으며, 자신들의 국가가 처음부터 식민주의에 기초해 탄생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미국인에게 잘 알려진 ‘포카혼타스(Pocahontas)’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19세기에 새로이 낭만화되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의 골자는, 17세기 초 지금의 버지니아주 남동부에 진출한 일군의 영국인들이 지역 원주민들과의 교류를 타진하던 가운데 지도자 중 한 명인 존 스미스(Captain John Smith)가 원주민들에게 생포되었고, 곧이어 포카혼타스의 아버지인 포우하탄(Powhatan)의 명에 따라 처형될 뻔했으나 포카혼타스의 간청으로 목숨을 극적으로 건졌다는 것이다. 애초에 스미스가 몇 년 후 영국으로 돌아가 출간한 긴 책에 아주 짧게 언급된 이 이야기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19세기 미국인들은 더 나아가 포카혼타스의 행동을 기독교적 관용으로 채색하고 포카혼타스와 스미스 사이의 낭만적 관계를 상상하며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이처럼 신화화된 역사적 기원 이야기가 그토록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미국인들이 스스로를 포카혼타스, 스미스와 동일시함으로써 부인할 수 없는 불편한 역사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암묵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적어도 일부 정착민과 원주민은 문명화된 태도로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했으나, 이후의 역사가 그렇게 전개되지 못했다면 이는 편협한 증오심과 적대감을 떨쳐내지 못한 이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설사 후자가 미국의 탄생을 가능케 한 정착민들의 주류였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서사구조는 19세기 미국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관용적 인도주의자와 동일시하도록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식민 폭력은 나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남이 한 일’로 치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건국기 중앙 엘리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증오와 관용이라는 대립항으로 식민주의의 역사를 환원함으로써, 신화화된 포카혼타스 이야기는 ‘양심적인’ 미국인들이 식민 폭력의 오명으로부터 자유로운 도덕적인 국가를 상상하고, 스스로를 인도주의적인 시민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2. 온정

  식민 수탈 못지않게 미국 사회, 특히 인종 관계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조건은 두말할 나위 없이 노예제이다. 식민주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인종적 증오에 초점을 두고 타자화하는 수사는 미국 백인들이 노예제로 인한 광범위한 이득은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양심있는 문명인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곤 했다. 이런 모습은 부당한 인종관계에 대해 가장 변명할 바가 없었을 것 같은 노예소유주들 사이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노예제가 성행했던 19세기 중엽까지 계몽주의적 인본주의, 기독교적 박애 사상은 교육받은 중상층 미국인들의 자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부유한 노예소유주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노예소유주들은 자신이 온정적인 가부장으로서 수하의 노예들을 보살피는 존재라 표방함으로써, 인도주의와 노예제 사이의 접점을 찾고자 했다. 이런 ‘온정적 가부장주의(paternalism)’가 미국 노예소유주들 사이에 널리 퍼지는 시기는 1820년대 이후지만, 그 원형은 일찍이 토머스 제퍼슨을 위시한 건국기 남부 엘리트들이 제시하였다. 

  제퍼슨은 평생 노예제의 부도덕함을 규탄하며 그 폐지를 앞장서 주장했지만, 동시에 수백 명의 노예를 소유하였고 이 중 자신이 비밀리에 노예 여성과의 사이에 낳은 자식들을 제외하고는 끝내 누구도 해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퍼슨은 이를 모순적인 행보로 보지 않았는데, 그 뒤틀린 논리의 출발점은 노예들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가부장의 책무였다. 제퍼슨에 의하면, 노예들을 당장 해방할 경우 그들은 문명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빈곤과 부랑, 결국에는 범죄의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 자명하며, 그로 인해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후퇴가 초래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더구나 그런 상황에서 흑인들은 백인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며 폭력적인 보복 행위를 하려 들 테고, 한편 많은 백인들이 흑인들에 대해 이미 가지고 있는 편견과 적대감도 더욱 깊어질 것이기에, 걷잡을 수 없는 인종 간 반목과 폭력이 횡행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노예들을 해방과 동시에 아프리카로 내보내는 등의 점진적 조치만이 안전한 노예제 폐지 노선이고, 그 긴 과정이 완료될 때까지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노예들을 사회로부터, 그리고 그들 자신으로부터 보호하며 그들이 최소한의 생산적인 활동을 하도록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온정적 노예소유주로서 책임감 있는 행동이었다. 

  ‘노예제에 반대하지만 노예를 해방하지 않는’ 데 대한 제퍼슨의 이런 변명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인종적 사고, 즉 흑인은 문명인으로서의 자기 절제력, 합리적 개선 능력이 부족하고 본능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편견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제퍼슨은 자신은 편견에서 벗어나 흑인과 백인 모두를 포용하는 사회개선책을 도모하는 온정적 가부장이자 양심있고 합리적인 지도자로 여겼다. 이런 자기합리화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기제 중 하나는, 자신의 점잖은 태도와 대비되는 일반 백인들 그리고 흑인들의 인종적 
증오, 적대감을 부각시키고 이를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것이었다. 문제를 이렇게 설정할 때, 흑인과 백인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살도록 할 수 없다면, 흑인을 책임 있는 백인 가부장에게 예속시켜 철저한 인종적 위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흑인의 폭력성을 통제하고 일반 백인의 인종적 편견을 거스르지 않는 평화적인 공존 방법이었다. 

  노예제의 현실은 물론 제퍼슨의 왜곡된 인식과 거리가 멀었다. 수많은 연구들이 상세히 보여주듯, 19세기 중엽까지의 미국 노예제는 채찍질과 굶주림에서부터 영구적인 가족 분리의 위협까지 다양한 범주의 물리적, 정신적, 정서적 폭력을 일상적으로 행사하고 위협함으로써 유지되는 체제였다. ‘온정적’ 노예소유주들은 물론 이런 폭력에 직접 손대지 않으려 했고, 그럼으로써 노예제 사회의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인 요소들은 농장관리인, 노예순찰대, 노예상인 등 다른 백인들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노예를 직접 가혹하게 처벌하는 경우에는, 주인의 온정을 걷어찬 노예 자신의 배은망덕함을 탓했다. 이처럼 노예제 사회의 폭력성이 세간에 알려질 때마다 이를 몇몇 ‘질 나쁜’ 백인 혹은 흑인 탓으로 돌림으로써, 노예소유주들은 실제로는 자신들이 인종적 위계질서를 다잡고 정치적으로 노예제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며 노예노동과 매매로부터 누구보다 많은 이득을 본 노예제 사회의 중심축이라는 점을 시야에서 가리려 했다.

  남부 엘리트들의 이런 태도와 수사는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는데,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우선 노예제 폐지 이후의 인종 질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61-65년 남북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노예제가 폐지된 후 남부 백인들은 곧바로 흑인들을 백인들에게 다시 노예처럼 종속시키는 다방면의 조치를 강구했다. 연방정부는 전후 몇 년간 남부 백인사회의 이런 반동을 제재하려 했지만 1870년대가 지나면서 결국 전면적으로 포기하였고, 이후 남부 백인들은 흑인들을 법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열등한 신분에 묶으며 백인사회에 예속시키는 인종분리체제를 견고히 구축해 나갔다. 노예제 사회를 계승하며 변형시킨 이 백인우월주의 체제 역시 흑인을 열등하며 사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즉 백인에 의해 필요시 폭력적으로 다스려져야 할 존재로 규정하는 인종 이데올로기에 기초해 있었고, 그렇기에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남부 사회에서 인종 간 폭력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잘 알려진 린칭(lynching)은 (백인 여성을 겁탈하려는 등) 인종위계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를 한 (또는 했다고 의심되는) 흑인을 집단적으로 고문하고 살해하는 관행으로서, 20세기 중엽까지도 남부를 중심으로 미국 여러 지역에서 빈번히 벌어졌다. 린칭이 여러 형태의 인종적 폭력 중에서도 특히 큰 주목을 받은 것은, 가령 마을 백인들 모두가 나와 나무에 매달린 불탄 흑인 사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등의 행동에서 드러나듯, 지역 백인사회의 광범위한 합의 속에 잔혹 행위가 일종의 공공성을 가진 사법적 의식처럼 버젓이 자행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 린칭이 지역 사회 바깥에서도 널리 회자되고 전 세계에 보도되어 지탄받는 일이 잦아지면서, 남부 백인들 사이에서도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런 태도는 특히 후기 산업화 시대에 발맞추어 남부 사회의 근대화와 진보에 앞장서려는 교육받은 엘리트층 사이에서 자주 나타났다. 

  전형적인 예로, 『앵무새 죽이기(How to Kill a Mockingbird)』로 유명한 소설가 하퍼 리(Harper Lee)의 아버지 아마사 리(A.C. Lee)를 들 수 있다. 아마사 리는 일생 대부분을 앨라배마주 먼로빌(Monroeville)에 거주하면서 변호사, 정치인으로도 활동하고 특히 20세기 전반기 내내 지역 신문 편집장으로 왕성히 활동한 인물이다. 리는 남부 사회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국가와 세계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망하며 남부 사회도 후진적인 면모를 하루빨리 벗어던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치적, 경제적 근대화 못지않게 리가 강조한 것은, 남부인들 스스로 보다 보편주의적 가치를 내재화하며 합리적인 근대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리에게, 린칭은 특히 하루빨리 근절해야 할 남부 사회의 대표적인 전근대적 잔재였다.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청년을 린칭과 형사처벌로부터 보호하고자 마을 백인 주민 모두에 맞서 싸우는 『앵무새 죽이기』의 영웅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는, 하퍼 리가 자신의 아버지를 회상하며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렇기에 소설이 출판된 시기는 1960년이지만, 그 시대적 배경은 아마사 리가 한창 린칭 등 무지몽매한 관행을 비판하며 남부 사회의 혁신에 열정을 쏟아붓던 1930년대이다. 그렇다면 아마사 리는 인종 간 평등을 추구하였나? 역사학자 조셉 크레스피노(Joseph Crespino)의 최근 연구가 면밀히 들추어내듯, 리는 다른 면에서는 남부의 진보와 성장을 열망했지만 인종질서를 개선하는 데에는 미온적이었다. 단적으로, 그는 1920년대, 1930년대에 시도되었던 연방 차원의 「린칭금지법(anti-lynching law)」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린칭을 근절하는 것은 지역 사회와 주정부의 몫이지, 연방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월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모순으로 보이는 이런 태도는 사실 당대 남부 백인지도자들 사이에서 주류 입장에 가까웠다. 그들은 남부의 인종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맞지만, 남부 사회와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연방정부가 (남북전쟁과 노예제 폐지에서처럼) 직접 개입하려 들면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정치적 부패를 양산하는, 돌이키기 힘든 역효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역 정서와 관습에 맞춰 점진적으로 인종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남부 지도자들, 즉 자신들과 같은 백인 엘리트들이 맡아야 할 과업이었다. 남부 엘리트들의 이런 구상 속에 흑인들의 주체적 요구가 들어설 자리는 물론 없었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철저히 주변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는 흑인처럼, 아마사 리 같은 이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남부 사회에서 흑인의 역할은 그저 온정적 백인 지도자를 순순히 따르며 그들의 보호를 받는 것이었다. 물론 남부 지도자들이 실제로 한 일은 「린칭금지법」처럼 실효적으로 흑인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권리를 증진하려는 어떤 변화도 가로막으며, 인종 관계에 관한 한 남부 사회가 기존의 불평등한 질서를 최대한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전반 남부 엘리트들의 이런 태도는, 노예제 반대라는 진보적 입장을 표방하면서도 늘 점진적인 개선, 온정적 보호만을 강조하며 아무런 실천도 하지 않은 제퍼슨 등 건국기 노예소유주들의 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만하다. 

  흥미롭게도, 하퍼 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남부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의 이런 모순적 면모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원래 소설의 핵심 주제로 삼으려 했다. 이 점은 2015년 리의 유작 『파수꾼(Go Set a Watchman)』이 세상에 공개되며 비로소 밝혀졌다. 리는 원래 자신이 유년기에 바라본 아버지의 영웅적 모습뿐 아니라, 성장한 그녀가 1950년대에 아버지를 방문해 대화를 나누며 그의 인종주의적인 진면목을 알게 되고 고민에 빠지는 내용을 소설에 담으려 했다. 그러나 출판사의 권유로 후자를 배제한 채 자신의 유년기, 즉 아버지의 영웅적 모습만이 보이던 시기에 한정된 소설로 개작하게 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앵무새 죽이기』이다.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로 개작하기 전 원래 집필했던 원고이다. 

  『파수꾼』에서 애티커스 핀치는 아마사 리와 마찬가지로, 린칭이나 사법적 정의 문제에서는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나 연방 개입에 의한 흑인 권리 보호, 인종분리를 금지하려는 국가적 조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남부 엘리트들이 인종 불평등 개선에 대해 이처럼 선택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쉽게 말해 아주 가시적인 폭력이나 증오 범죄, 인권 유린은 문제시하되 교육, 주거, 고용, 참정권상의 불평등 등 구조적인 부분은 건드리지 않으려는 태도로 정리할 수 있다. 린칭과 같은 사안에 주목하는 것은 인종 문제에 대한 남부 엘리트들의 이런 줄타기에 더없이 유용한 수사적 전략이었다. (자신들과 대비되는) 무지한 백인의 폭력을 비판하고 그들의 인종적 편견과 증오를 문제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인종 간 불평등의 보다 심층적 근원, 그리고 그런 구조를 견지하며 누구보다 혜택받고 있는 엘리트의 책임을 시야에서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점잖고 양심적인 핀치와 무지하고 거친 여타 주민 대부분 사이의 사회계층적, 문화적 괴리가 강조되는 것도 바로 이처럼 인종 간 불평등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려는 남부 엘리트의 수사를 뒷받침하는 구도라 할 수 있다. 물론 최근에 『파수꾼』을 통해 비로소 드러났듯 하퍼 리는 원래 이런 허구적인 구도 이면의 진실, 즉 핀치 같은 ‘점잖은’ 남부 엘리트들도 백인우월주의 체제의 온존에 누구 못지않게 집착하며 기여해 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복합적이고 불편한 진실을 도려낸 채 남부 백인 엘리트의 영웅적인 모습만 부각된 서사로 단순화한 『앵무새 죽이기』가 독자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미국 문학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 교육에 두고두고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역설적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수많은 미국인들이 애티커스 핀치를 마치 역사상의 위인처럼 숭상하며 귀감으로 삼아왔고, 그러다가 핀치의 어두운 면을 그린 『파수꾼』이 2015년 공개되었을 때 그들이 내보인 큰 충격과 배신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가 보기에, 이는 식민주의와 노예제의 어두운 역사를 인지하면서도 그 전모를 직시하기는 꺼리는 태도, 인종 문제가 이런 깊은 역사의 산물로서 미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 없이 개선되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하기보다 개인의 태도만 바꾸면 되는 것으로 단순화하여 바라보려는 오랜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보다 많은 미국인들이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의 인도주의적 관용 정신, 애티커스 핀치의 온정적 태도를 이어받아 양심을 깨우치기만 한다면 인종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환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 토대를 제공한 것은 인종 문제를 개인의 편견과 증오라는 표피적인 차원의 것으로 환원하고 미국인들이 그런 편견과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포카혼타스, 핀치 같은 가상의 또는 가공된 인물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도록 유도해온 엘리트들의 전략적 수사였다.

3. 화합

  지난 10여 년간 폭발적으로 전개된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BLM) 운동에 대해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운동의 수단과 지향점이 과격화되는 데 우려를 표하고 있다. BLM 운동가들의 급진적 요구를 인종적 증오에 빠진 과격함으로 채색하는 ‘온건파’의 수사에서, 20세기 중엽의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은 자주 모범적인 반례로 제시된다. 민권운동의 평화적이고 차분한 접근, 화합의 정신을 본받음으로써 인종 관계 개선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미국 사회의 분열과 양극화를 치유하려는 데 주안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권운동의 역사에 비추어 비폭력과 화합을 강조하는 지적들이 간과하고 있는 바는, 민권운동이 결코 주류 역사 서술에서처럼 온건하고 평화적이며 통합주의(integrationist)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선 잘 알려진 민권운동의 비폭력 전략부터가, 단순히 평화 지향적이라고만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백인에게만 허용되는 런치 카운터에 흑인 학생들이 일부러 착석하고, 백인과 흑인 좌석이 엄격히 분리된 고속버스에 흑백 운동가들이 일부러 같이 착석하는 등의 전략은, 어떤 의미에서 애초에 ‘증오의 폭력적 분출’을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으로 삼는 것이었다. 비폭력 운동은 의도적으로 미국 백인들이 인종질서 유지를 위해 아주 사소한 사안에 대해서조차 가장 폭력적으로 행동할 만한 장소를 택했고, 그들이 폭력을 최대한 가시적으로 행사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비폭력 운동의 이런 접근을 이해하려면, 전술한 바처럼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을 열등한 지위에 가두는 인종분리 체제가 더욱 확고히 영속화되어 왔다는 장기적인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냉전 초기 패권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라는 단기적 배경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미국 정부는 패권 행사를 ‘자유세계’의 보호자라는 역할로 정당화하려 했고, 특히 20세기 중엽 아프리카, 아시아 여러 지역의 탈식민 물결 속에서 신생국들이 공산주의 진영이 아닌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 안에 편입되도록 하고자 신경을 곤두세웠다. 미국이 이처럼 국제사회의 리더로서 도덕적 위상을 내세우는 상황은, 미국 패권 정당화 수사의 위선을 꼬집으려는 경쟁국 및 저항세력에 손쉬운 비판의 물꼬를 터 주었다. 미국 내부의 부당한 인종질서를 들춤으로써, 미국이 과연 범인류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범적인 국가라 할 수 있는지, 특히 비백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신생독립국들의 이념적 리더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여러 연구에서 밝혀주었듯, 미국 정부는 이런 상황을 깊이 의식하며 타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주력한 바는 인종 간 불평등 자체를 개선하는 것보다, 전략적 홍보 활동으로 대외적 이미지를 세탁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국무부 주도로 미국 인종 관계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내러티브를 제시하기 시작했는데, 즉 미국이 노예제와 인종분리라는 ‘불행한’ 역사를 물려받았고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예제 폐지를 기점으로 인종 관계를 꾸준히 개선해 왔고, 미국 사회가 이처럼 점진적이나마 스스로 문제를 고쳐나갈 수 있는 것은 미국의 강건한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 덕분이라는 것이다. 

  20세기 중엽의 사법적, 대중적 민권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은 미국 정부의 이런 국제적 입지와 대응 전략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이 상황을 이용해 연방정부가 비로소 인종 간 불평등 개선을 실천에 옮기도록 압박하고자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의 전략적 주안점은, 간단히 말해 미국 백인들이 무고한 흑인들의 최소한의 권리조차 짓밟고자 맹렬한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 최대한 극적으로 전 세계에 보도되도록 유도하고, 이런 보도가 미국의 대외 이미지에 미칠 악영향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인종 간 불평등 개선을 위한 연방 차원의 확고한 조치, 입법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이런 전략은 실제로 1964년의 민권법, 1965년의 선거법으로 대표되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흑인을 열등한 교육수준과 주거환경, 고용기회에 묶어두는 다양하고 교묘한 기제들은 수 세대에 걸쳐 진화하여 미국 사회와 제도의 구석구석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기에, 몇 가지 입법만으로 인종 간 불평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란 불가능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와 같은 대표적인 민권운동 지도자들도 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1964년과 1965년의 입법들을 완결점이 아닌 출발점으로 간주하며 더욱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민권운동이 흑인의 선거권 보장과 공공시설, 공공학교에서의 차별 금지를 넘어서 더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불평등 해소를 추구하려는 것에 대해, 미국 주류 사회는 냉담하게 반응했다. 이런 실패는 비폭력 민권운동에 처음부터 내재된 한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몇몇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것을 세계에 널리 홍보함으로써 미국 정부는 대외적 이미지를 상당 정도 쇄신할 수 있었고, 정부가 표방한 내러티브는 처음부터 ‘불평등의 완전 해소’를 내세우기보다 ‘해소를 향해 진보해 나가는 과정’임을 설득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었기에, 그런 인상을 충분히 주었다고 자신하게 된 순간 연방정부는 곧바로 불평등의 실효적 해소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로 회귀했다. 민권운동의 발목을 잡은 더 본질적인 문제는 미국 백인 다수의 태도, 즉 민권운동이 더 근원적인 변화를 향해 투쟁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며 선을 그으려는 태도였다. 

  미국 인종 관계의 긴 역사에 비추어볼 때, 대다수 백인들이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다각적으로 분석해 보여주듯 북부와 서부를 포함한 미국 전역의 백인들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경제적 기회를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건국 이전부터 늘 백인으로서의 인종적 특권에 힘입은 면이 다분했다. 원주민의 토지를 계속하여 수탈하고 아프리카인 등을 노예 혹은 값싼 예속노동력으로서 착취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비백인들의 노동과 자산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이득을 취하면서도 동등한 고용, 주거, 교육, 참정 기회로부터 그들을 배제함으로써 미국 백인들은 훨씬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인은 자신이 획득한 좋은 일자리, 안정된 가정과 재산을 본인의 노력에 의한 성취로 자부하며,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백인으로서 물려받은 유리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힘입은 면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불평등한 인종질서가 훨씬 가시적으로 내보여지는 남부보다, 일상의 여러 영역에 은밀히 숨어 작동하는 북부와 서부의 백인들 사이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최근 연구들이 보여주듯 북부와 서부 여러 지역에서는 건국기부터 흑인들이 열악한 주거지, 시설, 직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유도하고 이런 질서를 탈피하려는 흑인은 공동체의 안위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라는 등 갖은 명목으로 통제하였다. 북부와 서부에서 이처럼 오랜 기간 발전시킨 조용하고 미시적인 차별의 기제들은, 남부의 노예제 못지않게 19세기 말 이래의 인종분리체제에 자양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민권운동이 벌어진 20세기 중엽에도 북부, 서부의 도시에서 인종분리는 더욱 교묘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일상화되어 있었다. 가령 흑인들이 밀집한 거주지는 부동산 가치가 불리하게 평가되고 은행 대출이 원활히 제공되지 않으며 교육기관과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도 미진하여, 결과적으로 흑인들은 가난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게 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이처럼 교육수준이 낮은 흑인들은 주로 미숙련 서비스업 노동자로서,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백인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에 기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불평등한 현실을 특히 북부와 서부의 백인들은 잘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며, 인종 간 불평등은 미개한 남부의 문제로 치부하곤 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둘 때, 북부와 서부의 백인들이 보인 민권운동에 대한 제한된 호응을 설명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그들은 민권운동이 무지몽매하고 폭력적인 남부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에 맞서 싸우는 구도로 전개될 때는 적극 동조하였지만, 운동이 남부에 국한되지 않은 인종분리의 구조적인 면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냉담하게 반응했다. 민권운동가들은 물론 미국의 인종 간 불평등을 이런 제한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블랙파워(Black Power) 등의 보다 넓은 흑인해방운동(Black Liberation Movement) 조류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했다고 알려진 민권운동 진영의 지도자들도 기실 인종 문제는 단지 남부만의 것이 아니며, 백인들이 편견과 증오를 거두기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줄곧 강조하였다. 비폭력 운동을 통해 남부 백인들의 원색적 인종주의를 들추어낸 것은 출발점에 불과했고, 킹이 말했듯 구조화된 인종질서를 뿌리부터 해체하는 것, 자신이 인종 문제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적이고 ‘점잖은’ 인종주의자들의 위선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민권운동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 

  실제로 킹은 처음에는 남부를 무대로 한 활동에 주력하다가 조금씩 성과를 거두면서는 곧바로 북부와 서부로도 눈을 돌려 흑인들이 처해 온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발하고 폭넓은 개선을 촉구하는 데 매진하였다. 그러나 시카고 등지에서 벌인 폭넓은 인종분리 철폐 운동에 대해 미국 주류사회는 철저히 등을 돌렸다. 북부 백인들은 인종 문제가 바로 자신들의 공간에서도 늘 심각했으며 자신들이 그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민권운동이 단지 남부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을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데서 벗어나 더 폭넓은 구조적인 문제를 제기하자 곧바로 운동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해졌다며 질타하였다. 오늘날 널리 기억되는 것과 달리, 킹은 이런 반응에 굴하지 않고 미국 사회의 심각한 부조리와 미국 중산층의 도덕적 불감증을 더욱 강도 높게 비판하며 혁명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미국 사회는 킹의 이런 폭넓은 비판과 급진적 변화 촉구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역사적 기억에서 삭제하려 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말콤 엑스(Malcom X),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등의 블랙파워 지도자들에 대한 적대감만큼은 아니어도, 킹에 대한 백인 사회 주류의 시선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더불어 국가권력은 연방수사국(FBI)을 앞세워 그를 상시 감시하고 불온분자, 도덕적 위선자로 채색하여 이미지를 실추시키려 노력했다. 킹이 건국의 아버지들과 링컨에 버금가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위인 중 하나로 널리 추앙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그러면서 킹의 급진적 면모는 거세한 채 그를 온건주의자, 평화주의자로 채색하는 역사적 왜곡 작업도 본격화되었다. 대통령의 연설, 국가적 기념행사, 전시와 교육에 갈수록 빈번히 등장한 킹의 모습은, 늘 폭력과 증오의 자제를 강조하며 인종 간 화합을 호소하고, 미국의 건국 이념을 이어받은 컬러블라인드(color-blind)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한 온화하며 지극히 ‘미국적인’ 지도자였다. 

  킹에 대한 이런 기억은 그러나 미국 주류사회가 보고 싶은 측면만 부각시킨 왜곡된 허상에 불과하다. 가령 킹의 화합 메시지를 집약한 것으로 간주되는 1963년 워싱턴 행진에서의 연설만 봐도, 그는 운동의 지향점이 단지 화합만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연설에서 킹은 노예제 폐지 한 세기 후에도 미국의 비백인들은 여전히 인종 분리와 차별의 굴레에 갇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미국이 건국기의 보편주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저버린 ‘약속’을 비로소 지키도록 강요하기 위해, 즉 비백인들도 온당히 누려야 할 동등한 자유와 정의의 보장을 촉구하기 위해 행진에, 운동에 참여한 것이라 역설했다. 그는 이것이 점진적 변화로 해결될 일이 아니며, 미국 사회가 위기의식을 가지고 진지하게 임하여 역사적인 변화를 성취해야만 가능한 일임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후 킹은 (흑인이 대다수인) 멤피스 청소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장기 투쟁을 주도하고, 빈민의 폭넓은 기본권 보장과 제도적 뒷받침을 촉구하는 대중운동을 추진하며,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등 더욱 다각적이고 열정적으로 민권운동에 임했다. 킹은 빈곤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미국 주류 이데올로기에 맞서, 수많은 미국인들이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구조, 그리고 이런 불평등을 방관하고 당연시하는 백인 중산층의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 가치 때문이라고 질타했다. 국가가 경제적 분배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인위적’으로 교란하는 잘못된 일이라 믿는 미국 주류사회에 맞서, 킹은 백인 중산층이 누리는 풍요가 자유 경쟁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인종적, 계층적 불평등을 ‘인위적’으로 구축하고 영속화해 온 부당한 체제의 소산이라 비판했다. 나아가 개인의 안위와 물질적 소비 외에는 어떤 사회적 책임도 신경 쓰지 않는 기득권층이 주도하는 사회이기에 식민주의와 인종적 착취의 유산이 청산되지 못하는 것이며, 미국이 정의로운 민주사회로 거듭나려면 우선 무고한 베트남 인민들에게 폭력을 쏟아붓는 제국주의적 행태부터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화합’의 메시지와는 거리가 먼 킹의 이런 언행은 당대 미국 주류사회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비판받았다. 1968년 킹의 사망 후 그에 대한 미국 사회의 태도가 차츰 바뀌기 시작한 것은 백인 주류층이 비로소 킹의 지향점에 공감하기 시작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이를 미국 사회의 편의에 맞게 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킹의 급진적 면모를 기억에서 지우고 그를 비폭력과 화합의 전도사로 단순화하여 기억할 수 있게 되면서, 그는 미국 사회에서 인종 관계의 역사를 바라보고 싶어 하는 방식에 부합하는 미국적 흑인 영웅으로 재탄생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미국 사회가 이런 (과거의) 위인을 필요로 한 이유는, 민권법 이후 오히려 심화되어 가기만 하는 미국의 교육, 주거, 고용상의 인종 간 불평등, 급증하는 대도시 범죄와 비백인 수감 인구를 설명해 주는 보수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서였다. 보수 정치권 및 이에 갈수록 호응한 백인 유권자들은, 1960년대 말 이후 인종 간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존속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오롯이 개인 탓이라고 주장했다. 이 내러티브에 의하면, 미국의 인종 간 불평등은 제도적인 면에서는 1960년대의 온건하고 건설적인 민권운동을 통해 충분히 해결되었으나, 이후 많은 흑인들이 이에 만족하여 미국적 가치에 따라 스스로를 발전시키려 하기보다 계속 사회 탓을 하고 국가에 의존하며 권리와 이득을 챙기려 했기 때문에,  가난의 굴레에서, 마약과 범죄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국 주류사회가 현재의 인종불평등 해소를 위해 더 노력하지 않는 것이 인종주의 때문이 아니라 흑인들 본인의 무책임한 행동 탓이라 주장하는 데 있어, 민권운동처럼 합리적이고 온건한 움직임은 전폭 수용했다는 점은 미국 사회가 이미 인종적 편견을 벗어나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가치를 충분히 실현하고 있다는 주요 증거로 내세웠다. 미국 주류사회는 킹 목사와 같은 ‘건전한’ 흑인 영웅을 적극 추앙함으로써, 이런 컬러블라인드 내러티브에 더욱 힘을 실을 수 있었다. 

  결국 오늘날 대중이 기억하는 마틴 루터 킹의 모습은 허구와 역사가 혼합된 포카혼타스, 애티커스 핀치의 인물상과 마찬가지로, 미국 주류사회가 원하는 모범적 영웅의 틀에 끼워 맞춰진 신화화된 허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미국의 전통적 가치와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화합의 정신을 체현한 것으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탱해온 불평등한 사회질서, 정치경제적 구조, 문화적 가치들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미국 사회가 본질적으로 정의롭고 평등한 곳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들은 불평등과 부정의의 존속이 구조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태도에 기인한 것으로 치부하려 한다. 이처럼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인종적 특권을 누리면서도 그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일부 학자들의 표현대로 이들을 ‘점잖은 인종주의자’라 칭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인종 관계에 대해 이들이 선호하는 접근은, 화합의 정신을 통해 증오와 편견을 자제하고 ‘불필요한’ 인종 간 상호 반목을 극복함으로써, 근원적 변화 없이도 보다 정의롭고 평온한 사회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바람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증오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훨씬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건국기부터 21세기까지 미국의 숱한 점잖은 인종주의자들이 늘 해온 대로 인종 문제를 개인의 태도 문제로 환원하며 피상적인 차원에 국한시키며 근원적인 성찰을 회피하는 수사가 계속하여 힘을 발휘하는 한, 식민주의와 인종적 착취의 긴 역사 속에 축적되어 온 불평등의 심층은 더욱 깊이 뿌리 내릴 소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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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본고는 실증적 연구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선행 연구들을 특정 시각에서 종합한 것이기에, 본고에서 비중 있게 참고한 연구서, 논문들을 각주로 명시하지 않고 아래 ‘참고문헌’에 기재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 [2]
    이 글에서 ‘들’을 강조한 이유는, 영어로 역사학자들이 ‘indigenous peoples’라 표현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원주민들이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다양하고 상이한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강조하는 의미로 복수 표기하였다. ‘정착민들’ 등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표현이 실은 가령 독일계 정착민, 아일랜드 정착민, 자영농 기반 정착민, 자본이 없거나 빚을 진 정착민 등 매우 다양한 집단들을 불가피하게 묶어서 표현한 것임을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일부러 복수 표기를 강조하였다.
  • [3]
    “In Congress, July 4, 1776, a declaration by the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n General Congress assembled.”

저자 소개

김성엽
서울대학교 역사학부 교수

미국 스토니브룩 대학교에서 뉴욕 식민지의 법의 변화 및 이를 둘러싼 사회정치적 갈등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계 북미 식민지의 미시적 법-사회사, 정착민 식민주의와 미국의 건국 과정, 미국 헌정체제의 사회사적 맥락, 미국 시민권과 인종분리의 형성, 제국 통치성과 주권론 등에 대한 논문들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