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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법 제정 60주년] 「1964년 민권법」: 위대한 유산, 미완의 혁명

36호 - 2024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일년

 

  1964년 7월 2일,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은 이제 상원을 막 통과해 올라온 하나의 법안에 서명했다.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법은 앞으로 미국에서 “인종과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 국가”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고 규정했다. 그날 「민권법」 탄생의 역사적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여러 정치인과 사회 각층의 지도자들이 대통령 집무실에 모였다. 존슨 대통령의 바로 옆자리에는 서른다섯 살의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 서 있었다. 존슨은 법안에 서명한 뒤 자신의 펜을 킹에게 건네주었다. 이는 미국 민권운동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한 장면이었다. 한 사람은 백악관에서, 다른 한 사람은 거리에서 지금까지 「민권법」을 위해 싸웠다. 위로부터의 힘과 아래로부터의 의지가 하나로 모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1964년 민권법」은 미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민권법」 서명 직전 존슨 대통령은 기자회견실에 들러 “이 법안이 미국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곳에서 그는 「민권법」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100년 하고도 88년 전, 몇몇 용기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유를 향한 긴 투쟁을 시작했습니다(Johnson 1964).” 킹 목사가 내어놓은 메시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민권법」은 수많은 미국인이 오랜 세월 쏟아부은 “피와 땀, 눈물” 속에서 탄생했다. 이 법률의 서명으로 미국은 드디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건국의 원칙을 실현했다는 것이다(King 1998).

1.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린든 존슨과 마틴 루터 킹의 언급처럼, 「1964년 민권법」은 깊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미국 건국 이전부터 이어진 긴 모순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모순의 핵심에 민주주의와 노예제의 공존이 있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1776년 7월 14일, 미국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선언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억압과 착취, 불평등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시절, 미국이라는 나라는 원칙적으로나마 시작부터 인간의 평등을 외치며 탄생했다. 하지만 현실은 원칙과 달랐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토머스 제퍼슨부터가 수백 명의 흑인 노예를 거느린 대농장주였다. 흑인들이 채찍과 쇠사슬 아래 신음하는 동안, 하나같이 백인 남성이었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노예 노동이 생산하는 막대한 재산 위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사실 노예제는 미국과 함께 태어났다. 1619년, 북미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가 버지니아에 건설된 지 겨우 10여 년이 지났을 무렵, 20명 남짓한 흑인들이 아프리카로부터 그곳으로 잡혀 왔다. 최초의 노예들이었다. 바로 그해 버지니아에서 북미 최초의 의회가 열렸다. 미국에서 노예제와 민주주의는 서로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비록 노예제의 현실에 배신당했으나 민주주의의 원칙은 힘이 있었다. 건국 이후 많은 미국인은 노예를 가축처럼 부리고 물건처럼 사고팔았으며, 이 폭력과 속박의 체제를 확장해 나갔다. 실제로 남북전쟁 직전 미국 수출액의 60% 이상이 노예 노동으로 생산한 면화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이 그들의 숭고한 건국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수많은 흑인과 백인 운동가들이 이 대의를 위해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목숨을 바쳤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들의 목소리를 거의 100년 동안 외면했다. 마침내 1860년, 노예제에 비판적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때 미국의 절반은 민주주의 대신 노예제를 선택했다. 남부 11개 주가 연방을 탈퇴해 새로운 노예제 국가인 남부연합(Confederacy)을 결성했다. 내전이 일어났고, 75만 명이 넘는 군인이 목숨을 잃은 후에야 400만 흑인 노예가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자유의 순간은 짧았고, 노예제의 유산은 길었다. 내전이 끝난 후 미국 정부는 해방된 노예들에게 민주주의를 약속했다. 이 시기 연이어 통과된 「헌법」 수정조항 13조(노예제 폐지), 14조(시민권 보장), 15조(투표권 부여)는 그 약속의 증표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은 깨어졌다. 남부에 주둔했던 연방군이 철수하자마자 그곳의 백인들은 그들의 소중한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노예제의 부활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따라서 그들이 택한 전략은 흑인을 새로운 억압과 착취의 체제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KKK단을 비롯한 백인우월주의 조직들이 기승을 부렸다. 감히 권리를 말하거나 겁도 없이 투표하려 드는 흑인에게는 온갖 명목으로 린치를 가했다. 두들겨 맞는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많은 수는 신체가 잘리거나 불에 태워졌다.

  이 잔혹한 폭력이 민주주의의 승인을 받아 미국 남부 전역에 짐 크로 시스템(Jim Crow system)이 들어섰다. 이것은 공식적인 인종차별 체제였다. 흑인이 내전 시기와 그 직후 얻어 낸 민주적 권리들이 바로 그 민주적 절차에 따라 하나씩 파괴되었다. 세금 납부와 읽기 능력 시험은 투표권 행사를 막는 효과적인 방책이었다. 원래 노예는 법적으로 재산을 가질 수도,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랬던 흑인들이 갑자기 세금을 내거나 글을 읽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법과 질서는 자유를 박탈하는 논리였다. 거주지 불명 따위의 각종 경범죄로 잡혀 온 흑인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그들 중 상당수는 노예 시절 주인의 농장으로 끌려갔다. 평등이라는 단어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였다. 흑인은 ‘백인 전용’이 표시된 좌석이나 객차, 식당, 공원, 학교 등을 이용할 수 없었다. 연방대법원은 유색인 전용도 있기 때문에 짐 크로 시스템은 “분리하지만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고 판결했다.

  이것이 「1964년 민권법」 직전까지 미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였다. 미국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원칙 위에 건설된 나라였다. 그러나 흑인에게 관해서라면 이 원칙은 한순간도 지켜지지 않았다. 민주주의라는 원칙과 인종차별이라는 현실 사이의 모순,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딜레마였다. 노예 해방 이후 100년이 흘렀을 무렵, 한 무리의 미국인들이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흑인 민권운동이 시작되었다.

2.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향한 흑인들의 투쟁은 한시도 그치지 않고 이어졌지만, 전형적인 의미에서 흑인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은 뚜렷한 기승전결을 가진 사건이었다. 그것은 짐 크로 시스템에서 시작해 「1964년 민권법」 통과까지 이어진 투쟁을 의미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63년 8월 28일, 마틴 루터 킹은 워싱턴 DC에 모인 청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 가운데 하나인 그날 발언에서 킹은 미국이 언젠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숭고한 건국 원칙을 실천하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어지는 내용은 아름답고 또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날이 오면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와 옛 노예주의 자식들이 우애의 테이블 앞에 함께 둘러앉을 수 있을 것”이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땀 흘리던 미시시피조차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거듭날 것”이며, “앨라배마에서도 흑인 아이들이 마치 형제자매처럼 백인 아이들의 손을 맞잡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 유명한 대목은 17분 동안 이어진 킹의 연설에서 마지막 2분에 해당할 뿐이었다. 지금은 잊힌 나머지 15분 동안 그는 사뭇 다른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메시지란 바로 짐 크로 시스템을 끝낼 법안, 즉 「민권법」을 향한 강경한 요구였다(King 1963).

  「민권법」을 향한 킹의 메시지, 그것은 당시 흑인 민권운동의 목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민권운동은 두 개의 결정적 사건을 거치며 촉발되었다. 하나는 1954년 연방대법원의 브라운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이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공립학교에서 인종 분리를 위헌으로 규정하며 그간 짐 크로 시스템을 지탱했던 “분리하지만 평등하다
”라는 논리를 폐기했다. “분리된 교육 기구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는 것이었다. 민권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또 하나의 이정표는 이듬해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일어난 버스 보이콧이었다.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라는 이름의 중년 흑인 여성이 버스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격분한 지역 흑인들은 조직적으로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벌였다. 382일 동안 이어진 이 운동 끝에 대법원은 마침내 대중교통에서의 인종 분리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브라운 판결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민권운동의 불씨를 댕겼던 이 두 사건의 핵심에는 모두 짐 크로 시스템을 향한 흑인들의 도전이 있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이후 이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스물일곱 살의 마틴 루터 킹이 민권운동 진영의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넘치는 카리스마와 유려한 연설, 뛰어난 조직장악력, 철학적 깊이, 그리고 암살로 끝난 비극적인 최후까지, 이 인물의 삶은 마치 민권운동 순교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킹은 시대가 그를 그러한 운명으로 몰고 갔던 평범한 한 남자였다. 1929년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중간계급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북부의 명문인 보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이 시작될 무렵 그는 이제 지역 흑인교회에 갓 부임한 전도유망한 젊은 목사였고,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불과 보름 전에 태어난 첫딸을 키우며 신혼생활을 보내던 행복한 새신랑이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였던 킹을 민권운동의 투사로 만든 것은 그가 흑인이며, 그의 조국이 흑인에게 시민권을 보장하지 않는 인종주의 국가였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킹이 이끌고 대변했던 민권운동은 매우 명확한, 혹은 관점에 따라서는 편협할 정도로 확고부동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목적이란 미국 전역에서 짐 크로 시스템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이 절대적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빈곤과 성차별, 인종적 정체성 등 다른 사안들은 미래의 과제로 접어둔 채, 일단은 흑인의 시민권을 확립하고 인종차별을 금지할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실제로 민권운동의 초기 역사는 그러한 법안, 즉 「1964년 민권법」을 향해 흘러가는 일종의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공립학교들에서 인종 통합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남부 각지의 대학교에서는 흑인 학생들이 백인 전용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는 퇴거 명령을 거부한 채 조용히 앉아 있는 착석(sit-in) 운동이 벌어졌다. 버밍엄을 비롯한 남부 도시들에서는 공공시설의 인종 분리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당대 민권운동을 묘사하는 유명한 문구처럼, 이 일련의 사건들에서 “모두의 시선은 단 하나의 보상에 꽂혀 있었다(eyes on the prize).”

  그 보상이 무엇인지 곧 분명하게 드러났다. 1963년의 워싱턴을 향한 행진은 「민권법」 통과를 압박하기 위해 조직된 행사였다. 오늘날 이 행진은 흔히 민권운동의 클라이맥스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행진에서도 절정이 바로 훗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알려지게 될 킹의 연설이었다. 그는 노예 해방 후 “1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흑인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선언으로 포문을 열었다. 이후 그는 거침없는 어조로 「민권법」 통과를 요구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오, 평등한 시민권이 보장될 때까지 “우리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King 1963). 백악관에서 불과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서 울려 퍼진 이 목소리를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제 정치권이 민권운동의 요구에 응답해야만 했다.

3. 우리는 남부를 공화당에 넘긴 걸세


  노예제와 인종주의의 긴 역사를 지닌 미국에서 「민권법」에 맞선 저항은 그것을 향한 열망만큼이나 격렬했다. 그 저항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선의와 의지, 정치력을 두루 갖춘 정치가가 필요했다. 당시 미국에는 그러한 정치가가 있었다.

  “방금 우리는 남부를 공화당에 넘긴 걸세.” 「1964년 민권법」에 서명한 뒤 린든 존슨 대통령은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뒤로한 채 한 보좌관에게 씁쓸하게 말했다. 정치사의 관점에서 「민권법」은 존 F. 케네디가 제안하고 린든 존슨이 완성한 법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그 당은 창당 이래 150년 동안 줄곧 남부를 지배해 왔다. 그것은 민주당이 노예제를 옹호하고 백인우월주의를 지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정당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민주당 대통령 중에 이 어두운 역사에서 자유로운 자는 아무도 없었다. 민주당의 창건자인 앤드루 잭슨은 수많은 노예를 거느린 잔혹한 노예주였고, 우드로 윌슨은 흑인에 대한 린치마저 비판하기를 거부한 지독한 인종주의자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조차 뉴딜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면서도 인종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말을 아꼈다. 해리 트루먼 정도가 예외였으나, 의지만 넘쳤지 정치적 기술은 부족했던 그는 민권 관련 법안 통과에 번번이 실패했다.

  1960년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인종과 민권에 관한 민주당의 흑역사가 드디어 마침표를 찍는 듯했다. 보스턴 명문가 출신에 하버드 졸업생이었던 이 젊은 대통령은 다른 고등교육을 받은 북부의 중간계급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흑인 민권 개선에 우호적이었다.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신임 대통령에게 행동에 나서라고 촉구했고, 냉전의 국제질서 역시 그를 압박했다. 자기 나라에서 흑인을 차별하는 주제에 미국이 무슨 낯짝으로 자유주의 진영의 지도자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케네디는 망설였다. 만약 「민권법」을 밀어붙인다면 남부 백인과 그들의 대표인 여당 다선 의원들이 반발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는 자신의 대통령 직무 수행과 재선 가도에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케네디는 눈치를 보며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 진보 진영의 불만이 폭발하던 1963년 6월, 그는 마침내 모든 공공시설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후에 법안 통과를 위한 특별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선의는 있었지만 민권을 위해 정치생명을 걸 만한 의지는 없었다. 이를테면 케네디는 민권운동의 ‘우호적 방관자’였다.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당했을 때, 대통령 자리를 갑작스럽게 승계한 린든 존슨은 정치적 시험대에 올랐다. 민권운동 진영은 불안에 휩싸였다. 설령 의지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케네디는 그래도 마음만큼은 분명히 민권에 우호적이었다. 존슨은 달라 보였다. 텍사스 출신의 이 노회한 정치가는 민주당 내 남부 파벌의 대표주자였다. 상원 원내대표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여러 민권 관련 법안들에 물타기를 주도함으로써 흑인 지도자들의 원성을 샀다. 아무래도 그는 케네디가 남긴 민권법안을 통과시킬 적임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존슨의 정치 경력 곳곳에는 민권을 향한 선의, 나아가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의지가 숨어 있었다. 존슨은 짐 크로 시스템을 옹호하는 연대 성명서인 1956년 “남부의 선언(Southern Manifesto)”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던 단 세 명뿐인 남부 출신 상원의원 중 하나였고, 비록 실효성은 떨어지기는 했으나 남북전쟁 시기 이후 최초로 「민권법(1957년 민권법)」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대통령 취임 후 5일 만에 열린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존슨은 “민권법안을 최대한 빨리 통과시키는 것”을 그의 최우선 국정과제로 선언했다(Johnson 1963).

  곧이어 법안 처리를 둘러싼 암투가 벌어졌다. 이것이야말로 존슨의 주특기였다. 1937년 처음 당선된 이래 그는 30년 가까이 의회에 버티고 앉아 수많은 법안을 통과시킨 입법의 달인이었다. 그는 우선 의원 명부를 펼쳐 놓고 상하원의 찬성파와 반대파를 나누었다. 애매한 경우는 따로 표시해 두었다. 과반수의 찬성만 확보하면 되는 하원에서는 법안 통과가 무난해 보였다. 문제는 상원이었다. 그곳에서 남부 민주당 의원들이 일부 공화당 보수파를 끌어들여 의사진행 방해, 즉 필리버스터를 전개했다. 이를 종결하기 위해서는 상원의원 3분의 2의 동의가 필요했다. 당시까지 모든 민권 관련 법안이 좌초했던 것도 이 난관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저 유명한 ‘존슨식 처리법(Johnson treatment)’이 빛을 발했다. 존슨은 공화 민주 양당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설득, 협박, 강압, 하소연, 뒷거래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찬성표를 끌어모았다. 마침내 6월 19일, 미국 상원은 찬성 73대 반대 27의 표결로 「1964년 민권법」을 통과시켰다. 남부 의원 가운데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1964년 민권법」은 인종과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을 법적으로 금지했으며, 교육과 공공 시설, 고용에서 인종 분리를 철폐했다. 노예제에서부터 시작된 미국의 오랜 공식적 인종차별의 역사가 드디어 막을 내린 것이었다.

4. 위대한 유산, 미완의 혁명

  「1964년 민권법」은 미국 민주주의에 위대한 유산을 남긴 역사적 발걸음이었으나, 동시에 그것은 해결되지 않은 많은 과제를 남긴 미완의 혁명이었다. 

  「민권법」으로 말미암아 공식적인 인종차별은 종식되었지만, 실질적 차별은 여전히 심각했다. 대표적인 것이 폭력이나 악의적 조항을 핑계로 흑인의 선거 참여를 제한하는 관행이었다. 「민권법」 통과 이후 개혁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1965년 마침내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통과됨으로써 흑인의 참정권 행사가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공공시설이 아닌 민간 영역에서 지속되는 차별이었다. 특히 부동산 거래에서 상황이 심각했는데, 백인들이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흑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현상은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마틴 루터 킹은 「민권법」과 「투표권법」 통과 이후 북부로 올라와 주거에서 인종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남부 그 어느 곳에서보다 더 큰 증오를 경험했다고 한다. 이 문제는 킹의 암살 이후 폭발한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 속에서 「1968년 민권법」, 일명 「공정주거법(Fair Housing Act)」이 통과됨으로써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게 된다.

  「1964년 민권법」은 피부색을 넘어서서 다른 소수자 집단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성취한 법적 결과를 바라보며 중남미 출신 미국인들, 즉 라티노·라티나들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고 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아시아계 미국인과 미국 원주민(인디언)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게이와 레즈비언을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권리 투쟁 또한 이 시기 폭발했다. 이 다양한 집단들은 거리와 법정, 의회에서 그들의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며 「민권법」을 참조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례는 「민권법」이 페미니즘과 맺은 관계였다. 「민권법」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평등한 고용 기회에 관한 7조(Title VII)였다. 이 조항은 고용에서 “인종과 피부색, 종교, 성별, 혹은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고 규정했는데, 여기서 ‘성별(sex)’이라는 용어를 삽입하자고 제안한 인물은 버지니아 출신 하원의원 하워드 스미스였다. 당대 관찰자들은 그가 「민권법」 통과를 방해하기 위해 그러한 제안을 했다고 추측했다. 민권운동 지도자 가운데 상당수는 남녀가 평등하지 않다고 믿었고, 반대로 페미니즘 운동가 중 인종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도 적지 않았다. 스미스는 노골적인 인종주의자인 동시에 여성운동의 진실한 동지였기 때문에, 그가 무슨 의도로 성별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민권법」 7조는 이후 미국 페미니즘 운동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인종과 젠더의 기묘한 이중주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민권법」은 미국 정치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린든 존슨의 언급처럼 「민권법」 통과의 여파로 오랜 세월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는 공화당으로 넘어갔다. 든든한 남부의 몰표를 바탕으로 공화당은 향후 40년 동안 미국 정치를 지배할 수 있었다.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있었다. 한때 ‘링컨의 정당’ 공화당에 충성을 바쳤던 흑인들은 「민권법」을 기점으로 ‘민권의 정당’ 민주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들을 따라 여성과 소수자 집단, 개혁가들이 민주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정당 정치의 재편성 과정에서 원래 노예제 반대를 기치로 탄생한 공화당은 백인과 인종주의의 정당으로 변모해 나갔고, 반대로 전통적으로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웠던 민주당은 평등과 다양성의 정당으로 거듭났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노예제의 정당인 민주당에서 나왔다는 사실, 혹은 공화당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집무실에 민주당 창건자 앤드루 잭슨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 정치사의 아이러니다. 이 아이러니의 기원에 「1964년 민권법」이 있다.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4년 민권법」의 역사, 그것이 남긴 위대한 유산과 해결하지 못한 미완의 과제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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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김일년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Ohio Stat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20세기 미국 정치사와 지성사를 국제적 맥락에서 조망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