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지평

기획특집

증오와 학살 그리고 공생과 화해: 재일 코리안의 경우

36호 - 2024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정재정

1. 머리말

  2010년대는 현대 한일관계에서 특이한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독도·위안부·징용 등 해묵은 역사문제를 둘러싸고 새삼스럽게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특히 문재인 정부와 아베 신조 정부는 지지세력 결집을 위해 역사전쟁을 노골적으로 부추겼다. 그리하여 양국 국민끼리도 증오와 혐오의 독설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일본에서는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이하 ‘재특회’)이 도쿄·오사카·교토 등을 누비며 ‘혐한(嫌韓) 시위’를 주도하고 ‘증오 함성’(이른바 헤이트 스피치)을 선창했다. 누군가 여기에 악의적으로 불을 붙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00년 전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때처럼 ‘조선인 학살’이 재현되는 것은 아닐까?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를 하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재일 코리안[1] 역사학자 강덕상은 2015년 7월 11일 저녁 자택에서 씁쓸하고 두려운 표정으로 필자에게 이런 걱정을 털어놓았다. 

  강덕상의 암울한 우려가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마침 『지식의 지평』이 ‘혐오와 증오’에 관한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필자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살아온 재일 코리안의 경우를 소개하는 일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은 재일 코리안의 업보를 탁월한 역사 기술로 승화해오다 2021년 6월에 타계한 강덕상을 지면으로나마 기리는 작은 정성이 될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2] 

  이 글에서는 먼저 일본에서 2010년대에 울려 퍼진 ‘증오의 함성’과 1920년대에 자행된 ‘학살의 광풍’을 살펴보겠다. 그리고 100년을 뛰어넘어 양자를 관통하는 ‘혐오와 증오’의 실체를 점검하고 재일 코리안과 일본인의 공생(共生)과 화해(和解)를 전망해보겠다. 
한국에서는 여야와 좌우 또는 의견 상충 진영 사이에 일본 이상으로 증오의 언설이 난무한다. 게다가 외국인도 많이 거주한다. 일본의 사례가 한국 사회를 좀 더 품위 있게 만드는 데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된다면 망외의 소득이겠다. 

2. 증오의 함성, 2010년대

  2010년 3월 28일 ‘재특회’와 그 지지자 100여 명은 교토 히가시쿠조(東九條)에 있는 조선제1초급학교 주변에서 조선제1초급학교가 인근 시민공원을 가끔 운동장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집회를 벌였다. 한 젊은 여성이 스피커로 “전쟁이 끝나고 재일 코리안은 집단 폭행을 하고, 무전취식을 하고, 부녀자를 노상에서 집단 강간하는” 악당들이라고 비난했다(야스다 2013: 112). 여성의 격렬한 선전선동에 많은 참가자가 주먹을 들어 호응했다. 또 생중계되는 시위행진의 동영상에 많은 시청자가 “옳소!”, “맞다!”라며 댓글을 달았다. 항의가 고조되는 가운데 공원 문제는 어느새 ‘불령선인’ 규탄으로 옮아갔다. 적나라한 배외주의가 시민의 증오심을 부채질하는 현장이었다. ‘불령선인’은 100년 전 3·1독립운동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다. 

   ‘재특회’의 ‘간사이팀’ 구성원 10여 명은 이미 2009년 12월 4일에도 수업 중인 조선제1초급학교로 몰려가 위와 비슷한 가두집회를 벌였다(야스다 2013: 101). 그들은 조선인에 대한 증오에 불타는 비열한 욕설을 마음껏 퍼부었다. 시민공원 사용을 항의한다면서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인종적 편견과 멸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구호를 부르짖었다. 강당에 모인 100여 명의 학생은 무서움에 떨며 울음을 터트렸다. 참다못한 교사들이 “아이들이 안에 있으니 조용히 하시라”고 해도, “아이는 뭐가 아이야! 스파이 자식들이잖아!” 하고 응수했다. 교사들이 시민공원 사용에 대해 “시 당국과 교섭 중이다”라고 설명해도, “약속은 사람끼리 하는 거다. 사람과 조선인 사이의 약속은 성립하지 않는다!”(야스다 2013: 101)라고 화난 목소리로 응수했다. ‘재특회’에게 재일 코리안은 사람이 아니었다.

  시위나 집회 현장 또는 인터넷 언론을 보면 선두에서 소동을 일으킨 ‘재특회’, 항의를 요청한 시민공원 근처 주민, 행동하지는 않지만 조선학교를 혐오하는 시민, 이 삼자가 보이지 않는 줄로 엮여 있는 분위기였다(야스다 2013: 118).

  재일 코리안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재특회’의 선전선동은 교토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코리안이 많이 사는 대도시 특히 오사카나 도쿄 등에서는 2010년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국 음식점이나 한류 관련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한 도쿄의 신오쿠보에서는 매주 “좋은 조선인도, 나쁜 조선인도 죽여라”, “한국으로 꺼져라!” 등의 ‘혐한(嫌韓) 구호’가 울려 퍼졌다(야스다 2013: 6). 100명이 넘는 시위대는 듣기 민망하고 괴로운 욕설을 내뱉었다. 시위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조센진”, “총코”라는 멸칭(蔑稱)을 외치며 증오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야스다 2013: 6). 

  그런데 ‘재특회’가 주장하는 ‘재일특권’이란 허상에 가까운 것이다. 그들이 증거로 드는 사안이 일본에 거주하는 코리안에게만 주어지는 우월적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혐한 시위’와 ‘증오 함성’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일특권’의 진위(眞僞)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3] 

 

1) 특별영주권

  ‘재특회’는 「입국관리특례법」에 의거해 재일 코리안에게만 특별영주권을 주어, 외국인이면서도 일본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보장한다고 울분을 토한다. 나아가 재일 코리안이 대부분 밀항자이자 범죄자이기 때문에 영주자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별영주자격은 「입국관리특례법」에 따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기 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구 식민지(한반도, 타이완) 출신자에게 준 체류자격이다. 이들은 일본 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특별영주권자로 분류해 다른 외국인과 구별했다. 치안이나 국익에 관련된 중대한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특별영주권자는 강제 출국을 당하지 않는다. 또 체류 기한이 없으므로 체류 연장 허가 신청을 할 필요도 없다. 이들은 일본에서 생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보다 우월한 권리 곧 특권을 준 것은 아니었다.

  1945년 8월 15일 전후 일본에 약 200만 명의 코리안이 있었다. 그중 3분의 2 이상이 귀국하고 60만 명가량은 남았다. 일본 정부는 1947년 구 식민지 출신자의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했다. 제국주의 국가의 전후 처리 과정을 보면, 구 종주국은 구 식민지 출신자에게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정부는 재일 코리안이 식민지 지배 결과로 인해 일본에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경위를 무시한 채 일거에 일본 국적에서 몰아냈다. 게다가 안정적 체류 자격마저 주지 않았다. 재일 코리안은 사실상 무국적 외국인이 되어 불안한 나날을 살았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6월 국교정상화 조약의 하나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일본국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을 맺어, 한국 국적을 선택한 재일 코리안에게 협정영주권을 주고, 본인이 신청하면 2세까지 이를 인정했다. 그리고 1991년 1월부터 ‘재일 한국인 3세 이하 자손의 법적 지위에 관한 한·일 외무장관 간 합의각서’에 의거한 「입국관리특례법」 시행으로 3세 이후에도 영주자격을 인정했다. 이때 한국 국적자뿐만 아니라 조선 국적자에게도 영주자격을 주었다. 영주자격은 권리라기보다는 자격일 뿐이었다. 

  일본 정부가 구 식민지 출신자와 그 자손에게 안정적 체류 자격을 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 특권이 아니다. 그런데도 ‘재특회’는 이것을 특권이라고 우긴다. 사실을 무시하거나 왜곡하면서 구 종주국이 져야 할 마지막이자 최소한의 책임도 부정하는 배타적·호전적 애국주의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2) 조선학교 보조금

  ‘재특회’는 조선학교가 「교육법」 1조가 규정한 ‘학교’가 아닌 ‘각종 학교’인데도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조성금이나 보조금)을 받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나아가 문부성이 정한 학습지도요령을 무시하고 민족교육·반일교육을 하면서도 ‘학교’와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고 주장한다.

  사실을 말하면, 현재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에 보조금을 한 푼도 지급하지 않는다. 지자체에 따라 공립학교의 10분의 1, 사립학교의 3분의 1가량 지급하는 경우는 있다. 일본 학교에 비해 결코 우대는 아니다. 

  「학교교육법」은 문부성의 학습지도요령에 따라 외국어 이외의 수업을 일본어로 진행하는 학교를 ‘1종 학교’, 그 외를 ‘각종 학교’로 분류한다. 후자는 정부 보조금이 없다. 도쿄도도 2012년 1월부터 조선학교에 보조금을 주지 않는다.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가 조선학교는 반일교육을 하고 일본인 납치를 도운 조직이기 때문에 원조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한 데서 연유한다. 물론 조선학교가 일본인 납치에 관여했다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조선학교가 교실에 북한 김일성이나 감정일의 초상을 걸기는 한다. 그렇지만 반일교육을 하지는 않는다. 조일친선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일본에서 일본인과 어울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학교는 모국의 언어와 이름을 사용하고 민족차별이 없는 성역과 같은 곳이다. ‘재특회’는 이런 조선학교가 북한이나 조총련의 영향 아래 있는 점을 과장해 ‘평양 출장소’라 부르고 학생들을 ‘스파이 자식들’이라고 욕한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인식이다. 

 

3) 생활보호 우대

  생활보호란 생활이 곤란한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제도다. ‘재특회’는 일본 정부가 재일 코리안에게 생활보호 지원을 많이 제공하는 탓에 일본인은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고 화를 낸다. ‘재특회’는 ‘일본인은 생활보호지원금을 받지 못해 아사하고 있는데 재일 코리안은 무조건 받는다, 일본이 싫어서 난리인 조선인 따위에 생활보호를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사실, 재일 코리안에 대한 생활보호지원금 급여율은 높다. 후생노동성 발표에 따르면 2006년에 외국인 생활보호자의 약 70%는 재일 코리안이었다. 2011년 9월 생활보호지원금을 받은 사람은 206만 5,896명, 수급세대는 149만 7,329세대였다. 그중 코리안 세대주는 2만 5,000세대가량으로 약 13%이며 일본인 세대주는 약 3%였다. 

  위와 같은 수치는 재일 코리안의 생활이 일본인보다 훨씬 열악하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재일 코리안은 경제적·사회적 기반이 취약한 데다 특권은커녕 편견·차별로 말미암아 어려운 생활을 하는 이가 많다. 게다가 생활보호지원금을 수급하는 재일 코리안은 대부분 고령자이다. 그들은 국민연금 창설 당시 국적 제한 때문에 가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활보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많다.  

  생활보호지원금은 모두 공적 자금이다. 정부가 4분의 3을, 지방자치단체가 4분의 1을 부담한다. 생활보호지원금 지급에서 중시하는 요건은 어디까지나 기준에 합당한가 아닌가이다. 재일 코리안이라고 해서 기준에 어긋나도 지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 통명 제도

  일본에서는 통상 재일 코리안 이외 외국인에게도 일본식 이름을 쓰는 것을 제도적으로 허용한다. 그런데 ‘재특회’는 실질적으로 이 제도를 이용하는 대다수는 재일 코리안이라고 본다. 특히 범죄를 저질러도 본명이 아닌 통명을 보도하는 경우가 많아 범죄 조장 제도라고 주장한다. 

  통명은 일본이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면서 강요한 창씨개명에서 유래한다.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했다. 재일 코리안 중에는 해방 이후에도 편의상 또는 민족차별을 피하기 위해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관공서도 경제적·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통명을 법적 효력이 있는 이름으로 인정했다. ‘재특회’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채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재특회’가 주장하는 ‘재일특권’은 허상에 불과하다. 물론 그들은 애써 그게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긴가민가하는 시민을 선동한다. 

  재일 코리안은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약자의 처지에 놓였다. 웬만한 일본인은 속죄의식에서 그들을 동정하면서도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 결과 일본 사회에서 재일 코리안을 꺼리는 풍조가 생겨났다. ‘재특회’는 이런 분위기를 파고들어, 재일 코리안이 ‘너무 많은 보호를 받고 있다
’, ‘외국인인 주제에 복지에 무임승차하고 있다’, ‘세금을 빼앗고 있다’는 등의 언설을 퍼트렸다. 일본 정부가 구 종주국으로서 부여한 최소한의 ‘보완적 권리’를 ‘특권’으로 과대포장해 배타적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재료로 악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특회’의 활약을 추동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재일 코리안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 일본에 대한 맹목적 애국심이 그 원천이다. 게다가 그 배경에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사회에서 정신적·물질적 여유가 급속히 사라졌다. 그때까지는 내일이 오늘보다 반드시 나아질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희망이나 미래라는 말을 입에 담으면 어떻게든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는 ‘시간의 약속’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끝났다. 거품경제가 꺼지고 구조조정이 단행되어 정규 직업이 대폭 줄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면 30대에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자가에서 살다가 정년을 맞으면 연금으로 여생을 꾸려갈 수 있는 계층은 줄어들었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선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이라는 불변의 조직에 매달린다. 이때부터 보수를 자처하는 젊은이가 눈에 띄었다. 

  풀뿌리 보수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된 시기가 1997년 1월이다. 역사에서 일본의 영광을 되찾자는 주장은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일본에서 자신감과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들은 국가를 모욕하는 좌익, 외국인, 언론, 공무원 등을 적으로 몰았다. 

  배타적 애국자들에게 재일 코리안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한국과 역사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재특회’가 활약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재특회’는 불평등에 분노하는 사람,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사람, 동지를 원하는 사람, 도피처를 원하는 사람, 돌아갈 장소가 없는 사람 등을 끌어들였다(정재정 2014: 24-76; 야스다 2013: 349-356). 

  더구나 소통수단은 어느덧 논리 대신 감정을 중시하는 인터넷으로 바뀌었다. 인터넷 언론에서는 과격함과 극단성에 비례해 지지를 받는다. 날이 갈수록 대중적이고 격정적인 주의주장이 인터넷 언론의 주류를 형성한다. ‘재특회’는 이런 풍조에 올라타 기세를 떨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인터넷 언론에서 ‘재특회’를 칭찬하고 격려한다. 그들 중에는 이웃의 착한 아저씨나 아주머니 또는 젊은이도 섞여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작은 증오가 ‘재특회’를 키운다. 일본 사회의 저변에 복잡하게 뒤엉킨 증오의 수맥이 펼쳐 있는 것이다(야스다 2013: 369).   

3. 학살의 광풍, 1920년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수도권 관동지역에 매그니튜드 7.9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도쿄시 48만 2,000세대 중 30만 924세대가 전소했다. 사망자는 9만 1,344명에 이르렀다. 전기·수도·도로·철도 등 라이프 라인이 파괴되어 일상생활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진재(震災)와 더불어 인재(人災)가 꼬리를 물었다. ‘조선인이 방화·폭동·약탈한다’와 같은 유언비어를 믿고 일본인이 조선인 6,000여 명을 학살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선동포위문반 조사에 따라 6,644명이라고 발표했다. 일본 내각부 중앙방재위원회는 최소 1,500명에서 최대 1만 3,500명으로 추정했다(다나카 2014: 91-99).   

  경시청 조사보고서(『大正大震火災誌』 1925)는, “9월 1일 오후 3시경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의 방화가 많다’, 9월 2일 오전 10시경 ‘불령선인이 습격할 것이다’, ‘어제 화재 대부분은 불령선인이 방화하거나 폭탄 투척에 의한 것이다’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고 전한다.  

  사실은 경찰과 군대가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으로 보인다. 『報知新聞』(1923. 10. 22일자)은, “2일 밤부터 3일 오후에 걸쳐 아사쿠사·스가모·요도바시 방면에서 오토바이를 탄 경관과 재향군인이 ‘조선인이 쳐들어오니 여자와 어린이를 안전지대로 피난시키라!’고 외치며 돌아다녀 민심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자경단원 고바야시 히데오는 9월 2일자 일기에서, “금일 오후 경찰로부터 게이힌(京濱) 방면의 조선인 폭동에 대비하기 위해 출동하라는 통달이 왔다. 재향군인·청년단·소방단 등 마을에서 혈기왕성한 남자들은 각자 무기를 들고 모여 이치노다이라(市之坪) 경계까지 진군했다”고 썼다.        

   일본 정부는 9월 2일 도쿄시와 주변 5개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는 전국 지방행정 책임자에게 이렇게 송신했다. 
“도쿄 부근에서 진재를 틈타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불령한 목적을 수행한다. 실제로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자들이 있다. 이 일대에서는 계엄령을 시행하고 있으니 각지에서도 충분히 주도면밀하게 시찰하고 조선인의 행동을 엄밀하게 단속하라.”

  사이타마현도 시·정·촌에 이렇게 지시했다. 
“이번 진재 시에 도쿄에서 불령선인의 망동이 있었다. 이참에 시·정·촌 당국자는 재향군인회·소방대·청년단 등을 일치 협력시켜 경계에 임하고, 유사시에는 신속히 적당한 방책을 강구하라.” 

  이런 상황 아래 9월 2일부터 도쿄부·가나가와현·지바현·사이타마현·군마현 등에서 경찰 또는 자경단이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전부터 조선인 폭동을 걱정하던 민중은 그 실현을 직감하고 학살에 가담했다(김광열 2023: 7-10).

  무엇보다도 천재지변을 수습하는 데 급급해야 할 일본의 관헌과 민중은 왜 먼저 잔혹하게 조선인을 학살했을까? 그 원인은 복잡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1920년대 초 일본인 사이에는 조선인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증오·혐오 담론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곧 ‘불령선인’이라는 표상이다. 일본인은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새로 나타난 조선인 반식민주의(反植民主義) 세력을 흉악한 테러리스트로 형상화하고 ‘불령선인’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불령선인’은 공포와 타도의 대상이었다.

  일본인 사이에서 유행어가 된 ‘불령선인’은 관동대진재 발생 후 정부 발표와 언론 보도를 통해 ‘방화, 약탈, 우물에 독극물을 집어넣기, 살인, 강간 등을 자행하는 구체성을 띤 흉악범죄자’ 이미지로 확대되었다. 특히 조선인 남성이 일본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허위정보는 자경단 남성의 민족주의와 가부장의식을 자극하고 학살을 부추기는 원동력이 되었다(조경희 2023:  280-281).

  당시 일본의 치안담당자였던 미즈노 렌타로,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쓰시는 3.1운동 직후 식민통치를 수행한 총독부 관료였다. 계엄사령부의 육군 제1사단장 이시미쓰 마오미와 참모장 아베 노부유키는 시베리아에서 전투를 막 마치고 돌아온 싸움꾼이었다. 그들이 공유하던 ‘불령선인’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계엄령 선포의 배경에 깔려 있었다(서종진 2023).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재특회’가 시위집회 때마다 ‘불령선인’을 외치고 있으니 그 이미지가 얼마나 강렬하게 일본인에게 새겨져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자경단은 지역사회 유지가 결성한 보안조직이었다. 관동대진재 때 경찰을 보조하던 안전조합·보안조합이 재편된 것도 있지만, 내무성 지시에 따라 청년단·재향군인·소방단을 기반으로 구성된 것도 있었다. 자경단은 1918년 쌀 폭동이나 사회주의사상 확산에 위협을 느낀 경찰이 민중을 보조 조직으로 편제한 데서 출발하는데, 러일전쟁에 참여했던 전 군인(재향군인)의 영향이 강했다. 따라서 자경단은 경찰과 군대라는 국가의 폭력장치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자경단은 칼, 창, 총, 쇠갈고리 등으로 무장하고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일부 중국인과 사회주의자도 화를 입었다(조경희 2023: 282-283). 

  관동대진재 때 요코하마에 주재하며 조선인 학살을 목격한 캐나다 국적자이자 뉴욕에 본사를 둔 파운데이션 컴퍼니(Foundation Company) 사장인 존 W. 도티와 이 회사 엔지니어인 W. W. 존스턴은 일기에서 당시 조선인과 ‘빨갱이’에 대한 패닉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다수의 조선인이 노동력으로 일본에 유입되었다. 조선인은 일본 대도시에 흩어져 주민에게 무해한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음모가 끊임없이 소수의 조선인을 찾고 있었다. 또 시베리아 출병에서 귀국한 일본군 병사 중 상당수가 볼셰비키 사상으로 전향해 적군(赤軍)의 위협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일어나는 온갖 무질서와 잔학 행위를 조선인이나 볼셰비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관동대진재 직후부터 도쿄 화재의 대부분은 조선인의 소행이며 조선인은 사회주의자와 결탁해 문제를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소문은 도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비교적 멀리 떨어진 지방에까지 퍼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에 관한 소문은 대부분 사실의 과장이며 근거 없는 풍설이다. 풍설은 슬퍼해야 할 대재앙을 틈타 증오스러운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유포되었다. 누가 이런 소문에 책임을 질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 소문이 민중의 마음을 부추기는 바람에 며칠 사이 거의 모든 사람이 칼, 화승총, 곤봉, 철봉, 가스관 등 공격용 무기로 무장하고 나돌며 조선인을 무조건 살해했다. 조선인으로 오인되거나 사회주의자로 보인 몇몇 일본인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요코하마에서는 외국인 가옥에 대한 약탈도 상당했다(정영환 2023: 87-101). 

  그렇지 않아도 조선인에 대한 증오와 학살 분위기는 관동대진재 전후 일본 전국에 퍼져 있었다. 1922년 니가타현 나카쓰강 상류의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는 6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 중 12명이 학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京城日報』 1922년 8월 25-31일자 조사보고 연재기사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에 싸움까지 일삼는다, 여자만 보면 능욕하고, 어린이를 잡아 피를 빨아먹는다, ‘지식계급’의 선동으로 ‘불령선인’이 됐다는 등 헛소문이 퍼져 있었다. 허상의 두려움에 떤 인근 마을 주민이 조선인 노동자를 학살했다. 

  이상에서 보건대 관동대진재를 전후한 조선인 학살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조선인에 대한 온갖 부정적 이미지(음주, 고성방가, 능욕, 살해, 횡포, 무전취식, 방약무인, 방화 등)가 형성되었다. 경찰 및 행정 당국이 유언비어의 확산과 학살을 방조 또는 주도했다. 일본인은 조선인 때문에 일자리를 빼앗겼다며 박탈감과 공포심을 느꼈다. 그리고 ‘불령선인’으로부터 가족이나 마을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학살을 정당화했다. 가해자는 지역의 선구자·위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행정·치안 담당자는 사건을 축소·은폐하고 사법부는 가볍게 처벌했다(배영미 2023).

  일본에서 ‘불령선인’에 대한 증오와 탄압이 일상적으로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은 그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오히려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들어오는 조선인은 늘어났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살길이 더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선인이 사는 일본 어디서든지 항상 구타, 감금, 체포, 능욕, 참사 등이 벌어지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4. 맺음말을 대신해: 공생과 화해

  2010년대 ‘증오의 함성’과 1920년대 ‘학살의 광풍’ 사이에는 100년의 시차가 있다. 그렇지만 시위나 학살에 나선 일본인이 재일 코리안이나 조선인에 퍼붓는 욕설은 거의 비슷하다. 특히 인종 청소의 냄새가 짙은 ‘불령선인’이라는 적대(敵對) 구호가 예나 지금이나 도심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현상은 믿기 어려운 현실이다. 

  물론 모든 일본인이 재일 코리안을 증오하거나 적대하지는 않는다. 도쿄 신오쿠보에서는 ‘재특회’ 시위대보다 많은 일본인이 맞불 집회를 연다. 그들은 ‘인종차별주의자는 꺼져라!’ ‘한국인과 친하게 지내자!’고 부르짖는다(야스다 2013: 8-9). 

  일본 정부도 2016년 5월 이른바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다.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 언동을 허용하지 않는 내용이다. 단,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벌칙은 없다. 반면에 재일 코리안이 많이 살아 ‘증오의 함성’이 거센 가와사키시는 처벌을 가하는 차별금지조례를 만들어 시행했다. 법원은 2019년 교토 조선제1초급학교 시위를 주도한 피고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2023년 11월 29일 시점에서 헤이트 스피치 확산방지 조처를 조례로 정해 시행하는 지방자치단체는 도쿄·오사카를 비롯해 7곳이다.[4] 

  일본인의 맞불 집회와 행정·사법의 규제로 2020년대 들어 재일 코리안에 대한 ‘증오의 함성’은 점점 잦아들었다.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에 나선 것도 일본인의 한국 혐오를 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로써 재일 코리안과 일본인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넓어졌다. 공생의 환경이 ‘증오의 함성’에 무너지지 않고 다시 정비되는 상황은 정말 다행스러운 반전(反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재일 코리안과 일본인의 공생이 역사 화해로까지 나아가기는 아직도 멀다. 화해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신체적·정신적 아픔을 치유하고 물질적·금전적 손해를 배상함으로써 명예와 존엄이 되살아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는 가해 사실의 인정과 사죄 및 반성이 전제가 된다(정재정 2022: 335-339). 그런데 일본 정부는 100년 전인 1920년대 ‘학살의 광풍’에 대해 확실한 사실 인정조차 거부하고 있다. 2010년대 ‘증오의 함성’보다 현장감·현실감이 떨어져 책임을 추궁 당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데도 말이다. 

  일본변호사연합회는 2003년 일본 정부에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국가는 관동대진재 직후 조선인·중국인 학살사건에 관여했다. 국가 행위로 유발된 자경단의 학살을 인정하고 사죄하라. 조선인·중국인 학살의 전모와 진상을 조사하고 그 원인을 명확히 밝혀라”(日本弁護士連合会 2003). 

  그런데 일본 정부는 1923년 12월 16일 야마모토 곤베 총리가 제국의회에서 ‘정부는 발생한 사건에 대해 현재 조사 중’이라고 답변한 이래 100여년이 지난 2024년까지 유언비어 유포와 학살 관여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사’ 결과를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다나카 2023: 20). 

  일본 정부는 최근(2015년 2월-2023년 6월)에도 야당의 책임 추궁에 대해, ‘조사한 범위에서는 정부 내에 기록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질의에 대해 답변하기가 곤란하다
’는 답변을 되풀이했다. 게다가 ‘현시점에서는 조사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뻗댄다. 내각부 중앙방재회가 2008년에 작성한 『1923년 관동대진재 보고서』에 대해서조차 유식자(有識者)가 집필한 것으로 기술 하나하나에 답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답변했다. 

  일본 정부의 답변은 허위다. 그리고 그 태도는 성실하지 못하다. 곧 무슨 수를 쓰더라도 조선인 학살에 국가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한술 더 떠 도쿄도 고이케 유리코 지사는 2017년 9월 “무엇이 명백한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역사가가 밝히는 것이다”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1973년 이래 역대 도지사가 조선인 학살 추도회에 보낸 추도사를 끊어버렸다(호리야마 2023: 109-116; 다나카 2023: 21-28).

  일본 정부가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이상 국가에 함몰되어 조선인 학살에 가담한 일본인이 먼저 사실을 직시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일본인을 조선인 학살로 몰아갔던 국가의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 이를 추동하기 위해서는 진상규명, 희생자 발굴, 기억의 재현과 전승이 지속적·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줄기 희망은 있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은 연대해 관동대진재 직후부터 지금까지 진상조사와 추모행사를 벌여오고 있다. 특히 조선인 학살이 자행된 지역에서는 꽤 정확한 조사보고가 쌓이고 추도 비석과 탑파가 세워졌다. 그리고 2007년 11월 ‘관동대진재 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한·일·재일 시민 모임’도 출범했다.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아서는 한국과 일본에서 관련 행사가 더욱 많이 열렸다(성주현 2023; 조건 2023). 이런 한일 시민 연대가 더욱 확산되고 활발해지면 일본 정부의 태도도 바뀔 것이다. 그때가 빨리 와서 재일 코리안과 일본인의 역사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제 교토 조선제1초급학교에 딸을 보내는 재일 코리안 김의광의 울분과 기대의 고백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다. 그의 말 속에 일본인과 공생·화해를 갈망하는 재일 코리안의 눈물겨운 심정이 배어 있다. 


  특권은커녕 조선인이기를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다. 어린 조선인이라고 괄시를 받을 때마다 싸움을 했고 기댈 것은 자신의 주먹뿐이라고 생각했다. ... 일대일로 싸워 이기더라도 결국 50만 대 1억 2천만의 싸움이 되면 질 수밖에 없다. 조선인으로서 사과하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머리를 숙일 수도 있다. ... 일본이라는 나라는 나한테도 당신들한테도 고향이지 않느냐. 같이 사이좋게 지내자고 이야기해보고 싶다. 현실 사회에 천국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종이나 국가에도 100퍼센트 선이나 악은 없다. 증오는 버려도 좋다. (야스다 2013: 227-229) 

  일본국과 일본인이 재일 코리안의 절실소박한 비원을 들어주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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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강덕상 (김동수·박수철 역), 2005,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서울: 역사비평사.

    김광열, 2023,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한국 정부의 역할,” 『동북아역사포커스』 6: 7-17.

    다나카 마사타카, 2014, “간토(關東) 대지진과 지바(千葉)에서의 조선인 학살의 추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7: 75-114.

    다나카 마사타카, 2023,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과 현황,” 『동북아역사포커스』 6: 18-28.

    문경수, 2015, “재일조선인이 보는 한일관계: ‘국민’의 틈새에서,” 이종구·이소자키 노리요 외, 『한일관계사 1965-2015 Ⅲ 사회·문화』, 서울: 역사공간, pp. 82-109. 

    배영미, 2023, “1920년대, 관동대지진 전후 두 번의 조선인 학살: 식민주의와 예견된 비극,” 『동북아역사포커스』 6: 58-69.

    서종진, 2023, “유언비어와 계엄령하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은폐와 책임 회피,” 『동북아역사포커스』 6: 43-57.

    성주현, 2023,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한일 시민의 노력과 과제,” 『동북아역사포커스』 6: 82-94. 

    야스다 고이치 (김현욱 역), 2013, 『거리로 나온 넷우익』, 서울: 후마니타스.

    정영환, 2023, “영국 외교 문서 속의 관동 대지진: 주일대사관·영사관의 조선인 학살에 관한 인식을 중심으로,” 『관동대지진 100년간의 기억과 기록』, 
    천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pp. 67-121. 

    정재정, 2014, 『한일의 역사갈등과 역사대화』,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정재정, 2019, “재일한인과 남·북·일관계,”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서울: 역사비평사, pp. 151-207.

    정재정, 2022,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 갈등과 화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고재백·오유석·허고광 책임편집, 『용서와 화해 그리고 치유』, 서울: 새물결플러스, pp. 335-373.

    조건, 2023, “관동대지진 조선인 피해, 기억과 추모의 현장을 걸으며,” 『동북아역사포커스』 6: 95-107.

    조경희, 2023, “역사 부정과 혐오의 수행성: 마크 램지어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재일조선인, 부라쿠민 서술 비판,” 『관동대지진 100년간의 기억과 기록』, 천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pp. 273-304.

    호리야마 아키코, 2023, “관동대지진 100년, 행정 당국에 의한 ‘역사 봉인’을 둘러싼 공방”, 『동북아역사포커스』 6: 108-120.  

  • 자료

    『京城日報』, 1922. 8. 25·26·27·30·31일자.

    『大正大震火災誌』, 1925.

    『報知新聞』, 1923. 10. 22일자.

    一般財團法人地方自治硏究機構 홈페이지, (2024. 2. 18. 접속)

    日本弁護士連合会, (2003. 8. 29. 접속)

  • [1]
    이 글에서는 해방 이후 일본에 거주해온 한국인·조선인을 한데 묶어 재일 코리안으로 부르겠다.
  • [2]
    관동대진재 때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에 관한 강덕상의 연구로는 한글로 번역된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이 있다. 그는 또 이 분야에 대한 방대한 자료집을 편찬해 연구를 확대·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3]
    이하 설명은 별도 각주를 달지 않는 한 다음 글을 참조했다. 정재정(2019), “재일한인과 남·북·일관계,”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pp. 151-207; 문경수(2015), “재일조선인이 보는 한일관계: ‘국민’의 틈새에서,” 『한일관계사 1965-2015 Ⅲ 사회·문화』, pp. 82-109; 야스다 고이치(2013), 『거리로 나온 넷우익』, pp. 199-220.
  • [4]
    一般財團法人地方自治硏究機構 홈페이지

저자 소개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졸업 후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수사학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운영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인문대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또한 서울역사박물관 운영위원장, 경상북도 독도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