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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사망 100주년] 반전과 다의성: 카프카 문학의 생명력

36호 - 2024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오순희

1. 들어가며

  1924년 6월 3일, 카프카가 오스트리아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을 때, 독일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는 파울 하이제였다. 그는 ‘작가 제후’라 불렸고 독일 최초로 노벨문학상도 받았다. 지인이나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졌던 카프카는 하이제에 비하면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 100년이 흐르는 동안 하이제는 잊혀졌고, 카프카는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 무엇이 카프카를 100년 동안 읽도록 만드는가? 오랜 생명력을 자랑하는 카프카 고유의 글쓰기는 무엇인가? 

  카프카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 중에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유명한 노벨상 수상 작가 마르케스가 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충격적인 것은 이 소설의 첫 문장이었다고 한다. 인간이 벌레로 변한다는 비현실적 내용이 마치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처럼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Drekonja-Kornat 2010: 10). 이처럼 카프카의 첫인상은 당대의 작가들과는 다르게 쓴다는 것이었다. 독자의 관점에서 보면 ‘다르게 읽기’를 자극하는 작가가 카프카다. 그러나 독자에게도 읽기의 관성이 있는 법이다. 이러한 관성을 깨트릴 수 있으려면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충격이나 자극이 주어져야 한다. 스무 살이던 카프카는 자신의 문학관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사람을 물어뜯고 찌르는 그런 책들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의 머리통을 주먹처럼 때리면서 우리를 일깨우지 않는다면 뭣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하는 거지? 네 말대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니까? 천만의 말씀이야,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책은 없어도 돼.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 정녕 필요하다면 우리 스스로 그런 책을 쓸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불행처럼 우리에게 강력한 고통을 주는 책도 필요해.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숲속에 내던져져 모두에게서 멀어졌을 때처럼, 자살처럼, 그렇게 강력한 고통을 우리에게 주는 책도 필요하단 말이지. 책은 우리 안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려 주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 해. 내 생각엔 그래. (Kafka 1999: 36)

  독자의 마음속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해 카프카가 일차적으로 구사하는 전략은 강력한 ‘반전’이다. 이것은 고정관념에 의해 관성적으로 독해하는 독서의 흐름을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 카프카는 이러한 반전을 거듭하면서 텍스트의 다의성이 드러날 수 있게 만든다. 다의성은 텍스트 부분들의 상호 모순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로 인해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독자의 사유가 자극된다. 이런 방식으로 ‘카프카가 쓴 카프카’와 ‘독자가 읽는 카프카’ 사이에서 ‘새로운 카프카들’이 나타난다. 이 새로운 카프카들이 원래의 카프카에 ‘다의성’의 옷을 입히는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반전과 다의성’의 구조를 중심으로 카프카 문학의 글쓰기 전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시대사적 맥락에서 카프카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다음에 소설 『소송』에 실린 단편 「법 앞에서」를 중심으로 카프카적인 ‘반전과 다의성’이 어떻게 생성되고 전개되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2. 카프카의 생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확정적인 진술로 끝내지를 못하고 토를 달 듯이 부연 설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카프카도 그렇다. 여권상으로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민이긴 한데, 역사적으로 보면 체코 사람이었고, 체코 사람이긴 해도 독일어가 모국어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학교에서는 기독교 문화를 배우며 자랐지만, 집안의 종교는 유대교였다. 법대를 나온 후에 산재보험회사의 직원으로 들어간 후, 오랜 기간 성실하게 근무했고 유능한 사원으로 승진도 빨랐지만, 그가 진짜 직업이라고 생각한 것은 글쓰기였다. 고독한 작가로 알려졌으나 사교적인 면도 많았고, 승마와 수영 등 스포츠로 단련된 몸이었지만 폐결핵에 걸린 후로는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렸다. 

  오스트리아인가 체코인가, 기독교 문화인가 유대교 문화인가, 직장인인가 예술가인가, 건강한가 병약한가 등 대립적인 조건들의 충돌 지대가 카프카의 생애를 각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카프카가 이러한 조건들 때문에 시달렸던 작가로만 보게 만든다. 실제로 카프카 자신이 그런 글들을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직업 영역은 카프카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그의 관심은 전적으로 글쓰기에만 향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할 때 카프카는 두 가지 모두에 충실하면서도, 두 가지 모두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있었던 작가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 예로, 카프카는 폐결핵에 걸려 자주 병가를 내야 했음에도 회사 일을 꾸준히 수행했고, 작가로서의 글쓰기도 계속했다. 당시 결핵은 불치병이었다. 카프카는 병세가 심해져 도저히 회사 일을 할 수가 없게 된 1922년에서야 회사를 그만두었다. 또 그는 폐결핵에서 후두결핵으로 전이되어 음식을 섭취하는 일이 불가능했을 때도 작품을 썼다. 단식이 소재인 예술가 소설 「단식 광대」도 이 시기에 쓴 것이다. 생애 마지막 해인 1924년에도 카프카는 집필을 계속했다. 그에게 일관된 주제는 ‘예술가의 삶’이었다. 

  카프카는 이처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예술과의 삶과 관련되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둔 작가의 투혼이나 고독한 예술가의 성찰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실망하기 쉽다. 토마스 만의 주인공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것처럼, 예술이 우위에 있고 세속적 직업이 하위에 있다고 보는 관점도 카프카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카프카의 작품은 대체로 예술을 이해할 줄 모르는 관객의 시각에서 포착되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술은 고독하고 성스러운 어떤 것이 아니라 관객이 비틀고 왜곡할 수 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성 주류 관점의 전도, 뜻밖의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게 하는 것, 이것이 카프카의 ‘반전’이 수행하는 주된 기능이다. 

3. 카프카의 ‘반전’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반전을 잘 구사하는 문학 장르는 추리소설이다. 주로 사건의 흐름을 바꿔 독자의 흥미를 증폭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문학에서는 사건 자체는 변화가 없는 반면 사건에 대한 화자 자신의 관점이 뒤바뀐다. 추리소설에서 ‘사건의 변화’가 중요했다면 카프카의 문학에서는 ‘관점의 변화’가 핵심이다. 「나무들」은 이러한 반전이 문장 단위로도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에 덮인 나무의 줄기 같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미끄러질 듯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고, 살짝만 밀어도 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렇게 할 수는 없을 터인즉, 그것들은 땅바닥에 단단히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그마저도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Kafka 1993: 89) 

  첫 문장은 이 나무가 눈 속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상태라고 보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번째 문장은 이 나무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땅속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면서 앞의 관점을 뒤집는다. 그리고 세 번째 문장은 그렇게 보는 것도 틀릴 수 있다고 함으로써 다시 앞의 관점을 부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나무가 아니다. 첫 문장에서 전제하듯이 우리의 처지가 나무와 비슷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 속에 누워 있는 나무처럼 쉽게 밀려나는 존재인가? 아니면 땅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존재인가? 어쩌면 이런 유(類)의 관점들은 본질적으로 불확정적인 것인가? 이처럼 화자의 관점 변화가 자주 일어나는 것이 카프카적 반전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변화를 계속 추적하다 보면 몇 개의 근본적인 질문들로 압축된다. 카프카의 작품은 대체로 이러한 질문 상태에서 끝나는 경향이 있다. 대답은 독자에게 맡겨진 셈이다. 그러나 의미를 확정할 수 있는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다 보니 독자는 여러 비슷한 의미들을 연관해서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능한 의미의 범위가 확대된다. 몇 줄도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가 거대 담론처럼 복잡하고 난해한 구조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법 앞에서」다. 

4. 「법 앞에서」의 반전과 다의성

  「법 앞에서」는 카프카의 장편 소설인 『소송』에 나오는 우화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우화 고유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송』과 주제상으로 연관이 된다. 이 우화를 들려주는 성직자와 우화에 관해 질문하는 주인공 요제프 카(K)의 관계는 카프카 문학에서 자주 나타나는 관점 변화를 보며 반응하는 독자의 심리 상태와 유사하다. 먼저 「법 앞에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법 앞에 문지기가 서 있고, 그 앞에는 시골 사람이 서 있다. 그는 법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문지기가 허락하지 않는다. 시골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뇌물로 사용하며 계속 문지기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문지기는 모든 것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허락하지 않는다. 시골 사람은 계속 늙어간다. 드디어 임종 직전에 물어본다. 법은 누구나 다 들어가게 되어 있는 건데 어째서 나 외에는 이 법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던 거냐고. 그러자 문지기가 대답한다. 이 법은 당신만을 위한 법이어서 그렇다고. 그런데 당신이 죽을 것 같으니 이젠 문을 닫아야겠다고.

  주인공인 시골 남자가 법 앞에서 기다리며 죽어갈 때까지는 이야기의 흐름이 일관되게 이어졌다. 반전은 문지기의 마지막 말과 함께 나온다. 시골 남자에게는 평생 이 법으로의 입장이 불허될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은 이 법이 오로지 시골 남자만을 위한 법이었다는 것이다. 왜 문지기는 이 사실을 시골 남자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알려주지 않은 것일까? 이제 알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주인공 카의 관점이 촉발된다. 여기에 대한 성직자의 답변이 이어진다. 시골 남자가 문지기의 존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거나 제대로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지기는 왜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카가 묻는다. 그에 대한 답은 문지기라고 해서 시골 남자보다 더 잘 알거나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카의 반문이 이어진다. 문지기가 법에 대해서 몰랐다면 어쨌든 문지기는 그 무지로 인해 시골 남자에게 해를 끼친 것이 아닌가? 여기에 대한 성직자의 대답은 이러하다. 문지기는 법에 속한 사람이므로, 문지기에 대해서 의심한다는 것은 법에 대해 의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지기가 하는 모든 말은 참된 것이냐고 카가 묻는다. 여기에 대해 성직자는 이렇게 답한다. 문지기는 대체로 옳은 말을 하지만 때로는 필요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대답과 더불어 이제까지의 대화 흐름에 강한 균열이 발생한다. ‘법의 수호자’라는 문지기는 말할 것도 없고, ‘법’ 자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드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카는 분노하며 거짓이 세계의 질서처럼 되고 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그동안 카에게 법은 세계의 질서 같은 것이어야 했는데, 그러한 고정관념이 성직자와의 대화를 통해 근본적으로 흔들린 것이다. 이쯤에서 독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시골 남자’에 관한 질문이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했던 ‘법’이 허위라면, 그러한 법을 평생 기다린 시골 남자의 삶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러나 카프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성직자와 카의 대화를 끝낸다. 

  요제프 카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평소 이런 식으로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피곤해진 것이다. 그는 서둘러 돌아간다. 성직자가 지금 가야 하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에 온 이유도 일상적인 업무였을 뿐이며,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말한다. 카의 대화 상대는 교도소 담당 신부이고, 카의 소송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데, ‘시골 남자’에 관한 부분을 남겨둔 채 대화가 종료된 것이다. 카는 그 자신이 겪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기회 앞에서 다시 무사유의 일상 속으로 되돌아간 것과 같다. 바쁘다는 핑계로 문제를 회피하는 대신에 시골 남자에 관해서도 대화를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지금이 힘들다면, 그 이후에라도 이 문제를 반추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카는 시골 남자의 문제가 바로 그 자신의 문제임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해결하려는 법이 무엇인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인지, 기다린다는 명분으로 본질적인 질문을 미루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물었더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자의 뇌리에 떠오를 수 있는 생각일 뿐이고, 카프카는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중요한 지점에서 빈자리가 생긴 것이다. 

  카의 서른한 번째 생일 전날 저녁에, 그러니까 이 문제가 시작된 지 딱 일 년 만에 두 남자가 카를 찾아온다. 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한다. 일 년 전과 달리 이제는 ‘법’의 허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는 그의 일상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과도 관계된다.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시도도 많이 했지만 사태의 본질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해왔다는 것도 깨닫는다. 시골 남자가 죽기 직전에야 본질적인 질문을 시작한 것처럼, 카도 처형되기 직전에야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한다. 

  난 항상 스무 개의 손을 가지고 세상에 덤벼들려고 했으며, 게다가 어떤 타당한 목적도 없이 그랬다. 그건 옳지 않았다. 일 년 동안이나 소송을 해오고도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줘야 한단 말인가? (Kafka 1990: 308) 

  그렇다면 이제 카가 해야 하는 일은 분명하다. 이 ‘허위’의 법에 맞서서 제대로 싸워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인 싸움을 포기하고 이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소송이 시작될 때는 그것을 끝내려고 하더니 이제 소송이 끝나가는 마당에, 그것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남들이 떠들도록 놔둬야 할까?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원치 않
아. (Kafka 1990: 308)

  만약 여기서 주인공이 포기하지 않고 법과 싸우는 것을 택했더라면 이 소설의 주제는 비교적 명확했을 것이다. 소설에서 나타난 소송 절차의 부조리함이나 판사들의 부패 등과 맞물리면서 주인공 카는 사법행정의 부패와 맞서 싸우는 투사가 되거나, 시시포스 신화의 주인공처럼 결국에는 질 수밖에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죽을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는 비장미를 독자들에게 선사했을 것이다(Schillemeit 2004: 85). 그러나 카프카는 비교적 명확한 이 결말을 놔두고 뜻밖의 결말, 즉 주인공이 순순히 따라가서 처형되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소설 주제를 일의적으로 확정하기 어렵도록 만든다. 이제 독자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서 있게 된 셈이다. 이러한 결말의 의미를 ‘법의 문제’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주인공 자신의 문제를 더 들여다보아야 할 것인가? ‘법의 문제’에 관해서는 주인공 자신도 「법 앞에서」에 관한 대화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문제’는 없는 것일까? 주인공의 처지는 여러모로 시골 남자의 처지와 비슷하다. 이제는 카의 관점과 시골 남자의 관점을 연결해 보자. 

  시골 남자도 카처럼 계속 법의 주위를 맴돌며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사실상 중도 포기 상태였다. ‘법’에 관한 본질적 질문은 잊은 채 부차적인 것에만 매달리며 ― 말단 문지기의 허락만 기다리고, 심지어 그의 외투 깃에 달린 벼룩에게까지 애원하면서 ― 세월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간에 돌아서서 아예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다. 또는 문지기의 말대로 그냥 법의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막연하게 알고 있는 ‘법’과 그 법을 지킨다는 문지기의 권위, 그것도 문지기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고 있을 뿐인 그 권위에 짓눌려 평생을 허비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골 남자의 비극은 주인공 요제프 카의 비극을 가리킨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세상이 말해온 관념에 편승하며 그것의 실체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로 그저 관성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한 가지 해석의 가능성일 뿐이다. 죽을 때까지 문지기의 허락을 기다리는 시골 남자를 시시포스 신화의 주인공으로 볼 수도 있고, 법의 문 안에서 비쳐 나오는 ‘섬광’에 주목하며 유대교의 율법과 같은 초월적 진리의 알레고리를 읽어낼 수도 있다. 이처럼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의 맥락은 복잡다단하게 뻗어 나갈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 카프카 문학의 특징이다.

5. 나가며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카프카의 서사 전략은 먼저 반전이 가능한 구조를 설정하고, 이러한 반전을 거듭 반복하면서 텍스트의 다의성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다의성이 ‘아무거나 다 된다’는 뜻은 아니다. 텍스트를 아예 벗어나면 모를까, 텍스트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한 해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한정적이다. 작가로서는 최대한의 의미 찾기를 했다는 흔적이 다의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는 하나의 정답을 줄 수 없는 시대다. 그만큼 세계는 복잡해졌고 다원화되었다. 그 안에서 한 명의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카프카의 문학은 다각도로 보여준다. 중요한 관념들이 대립적으로 충돌할 때마다 카프카는 자주 빈자리를 남겨둔다. 이 빈자리가 카프카의 문학을 풍성하게 해온 생명력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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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Drekonja-Kornat, Gerhard, 2010, Gabriel García Márquez in Wien und andere Kulturgeschichten aus Lateinamerika, Münster: LIT Verlag. 

    Kafka, Franz, 1990, Der Proceß, edited by Malcolm Pasley, Frankfurt am Main: S. Fischer. 

    _______ 1993, Beschreibung eines Kampfes und andere Schriften aus dem Nachlaß in der Fassung der Handschrift, edited by Malcolm Pasley, Frankfurt am Main: Fischer Taschenbuch Verlag.

    _______ 1999, Briefe I, edited by Hans-Gerd Koch, Frankfurt am Main: S. Fischer. 

    Schillemeit, Jost, 2004, Kafka-Studien, edited by Rosemarie Schillemeit, Göttingen: Wallstein Verlag. 

저자 소개

오순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했으며, 한국카프카학회 회장과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괴테와 카프카의 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