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지평
프런티어
유전학과 후성유전학, DNA 서열 정보와 그 너머를 본다
1. 배고픔의 기억은 평생 갈 뿐 아니라 대를 이어서도 간다
배고픔의 기억이 대를 이어 간다. 가난의 대물림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전적으로 생물학적인 현상이다. 1944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네덜란드 철도노동자들은 파업을 해서 독일군 수송을 거부함으로써 연합군을 돕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연합군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결과 네덜란드는 엄청난 시련에 빠졌다. 독일은 네덜란드 전역에 식량 공급을 차단하였고 이런 기근 사태에 최악의 겨울 날씨가 더해져서 1945년 5월 나치의 패망 때까지 네덜란드의 대기근은 계속되었다. 네덜란드 국민 전체가 어느 날 갑자기 기아 상태에 빠졌고 또 독일의 패망으로 어느 날 갑자기 해방되었다. 그 사이에 2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그 와중에도 임산부들은 아이들을 겨우 낳았고, 그 아이들은 자라서 태아 시절의 기아 상태로 인한 영향을 드러내게 되었다. 사람을 대상으로 이런 비인간적인 실험이 대규모로 진행되어 버린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환경이 인간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만약 유전자만이 모든 형질을 결정한다면 태아 시절에 영양상태가 나빴다는 점이 그 태아의 성장 후 형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네덜란드 기근기에 태어난 사람들과 그 전후에 태어난 사람들을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더니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태아 시절에 기근을 경험한 이들은 나중에 비만, 당뇨, 고지혈증, 정신분열증 등의 빈도가 다른 세대보다 훨씬 높았다. 게다가 이들이 다시 자식을 낳았을 때 그들도 기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다른 형질을 나타냄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네덜란드 기근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특별한 유전자, 즉 DNA 서열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일부 유전자 DNA가 화학적으로 변형되어 있었고 그 변형은 평생 지속되었으며 일부는 세대를 넘어갔다(New York Times 2018. 1. 31일자).
학계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기근기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나타난 차이를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중요한 차이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유전자 서열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가 정보를 담고 있음을 의미하는 형태의 정보를 후성유전이라고 부른다.
2.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개는 개이고 소가 소인 것은 유전 덕분이다
태아 시절에 기근을 겪었다고 해서 그 태아가 사람이 아닌 도깨비나 다른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사람을 낳고 짐승은 짐승을 낳는다. 어떻게 그럴까?
그 질문에 답을 구하는 학문이 유전학이다. 생명현상이 대를 이어 전달되는, 즉 유전되는 기전을 연구하는 학문이 유전학이다. 그 중심에는 DNA와 돌연변이가 있다. 유전학은 돌연변이의 학문이다. 유전학은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 이후 차원이 다른 학문의 영역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관찰하고 기록하며 추론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그 이후에는 분자 수준에서 특히 DNA 수준에서 생명현상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왓슨과 크릭 이전의 유전학은 완두콩이나 초파리 등을 이용하여 표현형질이 서로 다른 개체들을 교배하여 태어나는 자손들의 표현형질을 추적하고 그 근본이 되는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연구를 주로 하였다. 그 근본이 되는 무엇인가를 20세기 초에 유전자라고 명명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유전자가 화학적으로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유전자가 어떻게 다음 세대로 문제 없이 물려 내려 가는지를 설명하지 못하였다. 많은 연구결과 유전 현상의 근본 물질은 세포핵 속에 들어 있는 염색체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염색체를 이루는 대부분의 성분은 단백질과 핵산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발표되면서 유전자라고 불린 그 무엇인가가 DNA라는 핵산이며, 모든 생명 정보를 담고 있는 ‘설계도’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중나선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복제를 해서 동일한 서열을 그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즉 유전이 되는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즉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돌연변이는 무엇인가? 바로 DNA 서열의 변화이다. DNA 서열의 변화는 DNA에 담겨 있는 정보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그 변화는 생명체가 나타내는 표현형질의 변화로 귀결될 수 있다. 역으로 표현형질을 가지고 추적을 시작하여 거슬러 올라가면 유전자,
즉 DNA의 서열 변화를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이런 연구과정이 바로 유전학 연구 과정이 된다.
그럼 후성유전학은 무엇인가? 다양한 정의가 제안되어 있지만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정의는 유전의 근본인 염색체 중에서 DNA 서열 그 자체의 변화가 아닌 다른 모든 변화에 의해 형질의 발현이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기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염색체상의 DNA의 서열 이외의 화학적 변형, 염색체를 이루는 단백질의 변형, 그리고 염색체에 작용하는 다른 분자들에 의한 염색체 기능의 변화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동물 발생과 후성유전학
모든 동물은 제각각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설계도’를 바탕으로 완전한 개체를 건설해 간다. 이 과정을 발생(development)이라고 부른다. 지구상의 엄청나게 다양한 동물들이 진행하는 발생의 과정에서 가지는 공통점 하나만 들어 보라 하면 그것은 모든 동물의 발생은 단 하나의 세포, 즉 수정란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난자에 정자 하나가 들어와서 만들어지는 단 하나의 세포인 수정란 속에 개체 전체를 건설할 수 있는 모든 정보와 초기 발생에 필요한 재료들이 들어 있다. 그 재료가 많이 들어 있으면 계란처럼 큰 난자로부터 큰 수정란이 만들어지고, 그 재료가 아주 적게 있고 대신 나중에 엄마로부터 직접 받게 되면 포유류와 같이 아주 작은 수정란으로 출발하게 되는 등의 소소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 직관적으로 바로 드는 의문은 단 하나의 세포 속에 들어있는 단 한 쌍의 유전정보가 어떻게 수많은 서로 다른 성질의 세포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수정란의 염색체 특히 DNA에는 모든 정보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정보가 한꺼번에 모든 곳에서 풀려나오면 제대로 된 개체를 만들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DNA 서열에 손을 대면 ‘설계도’가 바뀌는 상황이 되는 것이라 설계도는 온전하게 두고 설계도의 부분들을 다르게 집행하는 식으로 발생의 과정을 해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법이 될 것이다. 그러니 모든 유전자가 동시에 한곳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발현됨으로써 발생의 정교한 조절이 가능해진다. 이 과정이 DNA 서열 이외의 변화를 통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후성유전학의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발생 기전의 연구는 발생에 필요한 유전자뿐만 아니라 그 유전자들의 차별적인 발현을 연구하는 것이 된다.
4. 삼색털 고양이와 후성유전학
고양이 중에서 흰색 바탕에 검은색과 오렌지색이 큰 점처럼 섞여 있는 품종이 인기가 많다. 얼룩 고양이 또는 삼색털 고양이라고 부른다. 거북등 고양이 또는 칼리코 고양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고양이들은 거의 모든 경우 암컷이다. 왜 그럴까?
고양이에게 나타나는 털의 색깔 중에서 검정 또는 오렌지색은 하나의 유전자의 대립유전자에 의해 지시되는 형질인데, 이 유전자가 성염색체상에 있기 때문이다. 성염색체는 X, Y 염색체가 있는데 X염색체가 두 개여서 XX이면 암컷, 하나이면 XY로 수컷이 된다. Y염색체는 수컷으로 성을 결정하는 역할 이외의 다른 역할은 거의 없다. X염색체는 유전자가 많아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하는데 암컷에는 두 개의 X가 있고 수컷에는 하나밖에 없으니 염색체상에 있는 유전자들의 발현량을 일정하게 하기 위해서 X염색체 중 하나를 비활성화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를 X염색체 비활성화라고 한다. 그런데 이 X염색체 비활성화는 무작위적으로 일어난다. 이제 검은색 또는 오렌지색 털을 결정하는 대립인자를 각각 B, O라고 부른다면 암컷의 경우 성염색체를 XB 또는 XO로 표시할 수 있다. 세포에 따라 XB 또는 XO 중 하나가 비활성화되어 있으므로 나머지 하나의 형질이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 얼룩무늬가 생기는 것이다. 이때 X염색체 비활성화는 DNA 서열을 바꾸지 않으면서 염색체 전체 유전자의 발현을 바꾸는 일을 하는 후성유전학적 현상의 대표적 사례가 된다.
한편 수컷은 이미 한 개의 X염색체만 있으므로 B 또는 O의 형질을 모든 부위에서 나타내게 되어 얼룩무늬는 생기지 않는다.
5. 후성유전의 세 가지 방법
이제 우리의 궁금증은 이런 후성유전학적 현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DNA 서열을 손대지 않고 유전자의 발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그 답이 될 것이다. 현대 생물학은 크게 세 가지 대표적인 기전을 밝혀냈다. DNA의 화학적 변화, 염색체 단백질의 화학적 변화, 그리고 RNA에 의한 후성유전이 그것이다(Cavalli and Heard 2019).
DNA의 화학적 변화를 살펴보자. DNA 서열은 DNA 분자의 조립단위인 염기 4가지(G,A,T,C)의 순열로 표시한다. ATG GAT TAC CAT TAA로 표시를 할 수 있는 DNA 조각을 생각해 보자. 이때 DNA 염기서열이 바뀐다고 하고 예를 들어 ATG GCT TAC CAT TAA로 바뀐 경우를 생각하면 A-->C로 변이가 생긴 경우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이들이 지정하는 아미노산이 달라짐으로써 이 변이 유전자를 설계도로 해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은 아미노산 하나가 원래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DNA 서열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따라서 정확히 유전학의 영역이다.
그런데 DNA 서열 변화 없이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예를 들어 C(사이토신)의 화학 구조에서 메틸기가 하나 붙어서 염기서열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 염기의 성질은 변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때 메틸기를 붙여주는 효소와 그것을 다시 제거해주는 효소는 DNA의 화학적 변화에 의한 후성유전학적 변화의 핵심이 된다.
이러한 메틸화 현상은 많은 경우 유전자의 발현을 줄이거나 저해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그 현상 자체가 세포분열을 넘어가면서도 기억이 되는 현상으로 남게 되어 시간이 지나도 일정한 형질을 유지하는 기전이 된다. DNA 메틸화는 발생 과정에서 일어나는 세포 분화 과정을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기전 중 하나일 정도로 가장 보편적인 후성유전 기전이라 할 수 있다. 줄기세포나 암세포에서 이런 DNA 메틸화 프로필이 달라지는 현상이 보고됨으로써 암 연구에서도 중요한 현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두 번째 후성유전학적 기전은 DNA와 함께 염색체를 구성하는 단백질들의 화학적 변화이다. 염색체는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엄청나게 긴 DNA 사슬과 이를 둘러싸서 부피를 줄이면서 구조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염색체의 기능적 단위체는 뉴클레오솜이라고 부르는 구조인데 뉴클레오솜이 모여서 염색체를 구성한다. 하나의 뉴클레오솜은 DNA 147개의 DNA 서열과 히스톤 단백질로 이루어진 복합체로서 그 모양을 실패와 그를 둘러싼 실로 비유하기도 한다. 히스톤 단백질이 DNA와 워낙 밀접하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다른 단백질들의 DNA 접촉을 방해할 수도 있고 오히려 특정 단백질들을 끌어와서 더 잘 결합할 수 있게도 한다. 히스톤 단백질의 역할은 DNA 정보를 열어주는 대문과 같다. 이제 DNA 서열 자체를 변형하지 않으면서 서로 다른 DNA 부위를 작동하게 하려면 히스톤 단백질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가깝게 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실제로 히스톤 단백질에는 인산기가 와서 결합(인산화라고 부른다)하기도 하고, 아세틸기가 결합하기도 하고 메틸기가 결합하기도 하며, 또 다른 종류의 단백질들이 결합되거나 유리되면서 염색체의 성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히스톤 단백질에 아세틸기가 결합하면 인접한 뉴클레오솜들이 느슨한 상태로 결합하게 되어 열리고 그 부위는 전사인자 등 다른 조절 단백질이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활성화가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히스톤 단백질의 변형을 일으키는 효소들의 차별적인 발현이 서로 다른 활성화 상태의 염색체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히스톤 변형의 차이들이 유전자 발현의 차이를 낳고 그것이 후성유전학적 성질의 기본을 제공한다.
최근에 많이 연구되는 후성유전학 현상의 세 번째 기전으로는 RNA에 의한 조절이 있다(Holoch and Moazed 2015). 위에서 예를 들었던 X염색체 비활성화의 기전도 RNA에 의한 것이다. XIST라는 이름의 RNA가 X염색체와 결합하여 전체 염색체를 뭉치게 만들어 더 이상 활용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실제로 현미경상에서 염색체를 관찰하면 비활성화된 염색체는 다른 염색체보다 똘똘 뭉쳐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런 비활성화는 발생의 초기 단계에서 일어나고 그 이후에는 세포분열을 거듭해도 유지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초기 단계 중에서도 좀 더 세분화하여 비활성화가 언제 일어났는가에 따라 얼룩 고양이의 털 색 패턴이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비활성화가 일찍 일어나면 세포분열을 그 이후 더 많이 할 수 있어서 패치의 크기가 커질 수 있게 된다. 이런 RNA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RNA들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할 뿐만 아니라 생식세포로 넘어가서 다음 세대로도 이어져 갈 수 있다는 보고들이 있어서 유전되는 현상으로서의 후성유전학적 기전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6. 후성유전학과 질병 그리고 치유의 표적
우리가 후성유전학적 기전에 관심을 갖는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이 현상이 사람의 질병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성유전학의 개념에 크게 기여한 계기는 선천성 질병에서 발견한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1970년대에 보고된 연구 결과를 보면 생쥐 모델에서 특정 염색체의 일부가 결실되는 돌연변이가 모계로부터 유래한 것인지 부계에서 유래한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질병 형질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참으로 흥미로운 생명현상이었다.
DNA 서열이 난자 유래인지 정자 유래인지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고? 즉, 특정 유전자는 모계 또는 부계 유래라는 도장을 찍어서 태어난다고? 이 현상은 정의에 의하여 가장 확실한 후성유전학적 현상이 틀림없다. DNA 서열상의 변화가 아닌 다른 변화가 생긴 것이 세포분열을 거듭하더라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이 현상을 유전체 각인(genomic imprinting)이라고 부른다. 유전체에 각인된 채 내려오는 유전자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각각 중요한 역할을 해서 이 각인이 잘못되면 선천성 질병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람에게도 나타나는 다양한 질병이 보고되어 있다(Ferguson-Smith 2011).
후성유전학적 조절은 거의 모든 생명현상에 관여하므로 이 조절의 실패는 당연히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많은 종류의 질병 원인에 후성유전에 관여하는 단백질 유전자의 변이가 있음이 보고되고 있다. 특히 많은 종류의 암 세포에서 이러한 후성유전학적 조절이 실패한 경우가 많이 보고되었다. 이제 이것은 거꾸로 후성유전학적 표지자들을 보고서 암 진단도 정밀하게 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앞으로의 연구는 이 방향으로 집중될 것이다.
암 발병 기전이 다양하듯이 해법도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런 면에서 후성유전학적 접근도 좋은 전략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 중 하나는 생쥐 연구를 통해 노화도 후성유전학적 성질의 변화에 기인하고 따라서 후성유전학적 조치로 노화를 지연하거나 역행할 수 있다는 놀라운 내용이 보고되었다(Yang et al. 2023). 이 결과를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면 유전자 수준이 아니라 가역적인 후성유전학적 조절로 노화를 지연하거나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만한 영역이라 하겠다.
7. 나가며: 후성유전, 라마르크의 부활인가?
이제 유전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유전이란 일반적인 이해의 범위에서는 어떤 현상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여기서 세대를 정확히 정의하고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대를 넘어간다고 할 때의 세대가 수정란에서부터 세포분열을 거듭하여 발생하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세포들의 분열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세대일 수도 있고, 어른이 된 후 생식세포가 만들어지고 생식세포들이 만나 새로운 수정란이 만들어져서 새로운 개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서의 한 세대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세포 수준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 전달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개체 수준에서 일어나는 세대교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체세포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후자는 생식세포를 거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모든 동물이 하나의 수정란으로부터 발생을 시작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난자 속에 그 전 세대의 몸, 즉 체세포에서 일어난 수많은 후성유전학적 특성을 넣어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거의 자명한 사실로 보인다.
따라서 발생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후성유전학적 현상들은 난자나 정자에 반영되지 않는다. 즉, 개체 수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지 않는다. 후성유전학적 현상의 대부분은 당대의 세포들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엄밀한 의미로 ‘유전’되는 현상이라고 하기 힘든 것이다. 라마르크가 획득형질이 유전된다고 했을 때의 형질은 체세포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이런 현상은 생식세포에 들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후성유전학적 조절의 발견이 라마르크의 부활이라는 식으로 표현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물론 일부 염색질의 변형이나 RNA의 종류가 난자 속으로 들어가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현상이 제한적이나마 관찰되는 것도 사실이다. 네덜란드의 기근기를 겪은 세대의 자손들에게 이어져 내려간 형질들은 최소한 한 세대 이상 세대를 이어서 형질이 전달됨을 보여준 사례이다. 물론 그다음 세대, 또는 또 그다음 세대를 관찰하면 아마도 그 형질은 지워질 것이라고 예상은 된다. 라마르크의 부활은 아니더라도 라마르크가 100퍼센트 틀렸다고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겠다.
생명체는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최선을 다해 왔다. 그것이 진화의 역사이다. 진화는 이상적인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용한 자원 내에서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고 유전과 후성유전도 그 범주에 들어 있다고 하겠다. 고양이가 쥐만 잘 잡으면 되지 흰색이면 어떻고 삼색이면 또 어떤가. 진화는 기회주의적이고, 생명의 가능성은 종종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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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Cavalli, G., and E. Heard, 2019, “Advances in Epigenetics Link Genetics to the Environment and Disease,” Nature 571: 489–499. (2024. 2. 20. 접속)
Ferguson-Smith, A., 2011, “Genomic Imprinting: The Emergence of an Epigenetic Paradigm,” Nature Reviews Genetics 12(8): 565–575. (2024. 2. 20. 접속)
Holoch, D., and D. Moazed, 2015, “RNA-mediated Epigenetic Regulation of Gene Expression,” Nature Reviews Genetics 16(2): 71–84. (2024. 2. 19. 접속)
Yang, Jae-Hyun, et al., 2023, “Loss of Epigenetic Information As a Cause of Mammalian Aging,” Cell 186(2): 305-326. (2024. 2. 21. 접속)
자료
New York Times, “The Famine Ended 70 Years Ago, but Dutch Genes Still Bear Scars,” 2018. 1. 31일자. (2024. 2. 18.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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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프런티어 메모랜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