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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탄생 200주년] 경신년 동학의 울림과 파장

36호 - 2024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최종성

1. 동학에 대한 기억

 1923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1면에 “조선은 종교부자”라는 제하의 흥미로운 기사가 실린다. 제목 그대로, 당시 한국은 오대양 육대주로 종교를 수출하여 세계를 지배할 만큼 사람이 모였다 하면 신종교 하나가 뚝딱 생겨날 정도로 종교부자의 나라가 되었다고 비꼰다. 실제로 1923년 당시 한국의 자생 종교 교단이 새롭게 분출·분립하던 시기이기도 해서 아예 근거 없는 과장이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종교 운동의 기원을 연 인물로 경주 출신의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환기되곤 한다(村山智順 1935: 1).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는 수운(水雲)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조선말기 당대인에게 어떤 문화적 의미를 던져주었을까? 조선시대 민중을 위한 획기적인 문화 창달 두 가지를 꼽아보라면, 개국 후 50년(1443)이 지나면서 창제된 한글과 망국 전 50년(1860)에 창도된 동학이 아닐까 생각한다(최종성 2018: 80-81). 한글이 국가왕실의 프로젝트로 기획되어 아래로 베푸는 하향식의 문화로서 어문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면, 동학은 민간 차원에서 개발되어 지방의 민중에게 수평적으로 스며들며 영적 소통을 실현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민중은 한글 자모를 깨우쳐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원활히 할 수 있었고, 또 동학의 가르침을 통해 신인 사이의 조화를 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학이라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이른바 갑오년(1894)의 동학이 그것이다. 당연히 동학년은 갑오년이고 녹두장군이 이끈 전장,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농민군, 깃발 나부끼는 들판이 동학의 기억을 압도한다. 이보다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수운의 종교적 각성으로 점철된 경신년(1860)의 동학이 자리한다. 경신년 동학의 지리적 풍경은 피 끓는 함성이 가득한 들판이 아니라 촛불 밝혀 기도에 전념하는 고요한 산중으로 바뀐다. 각기 저마다의 동학에 대한 기억이 있을진대, 혁명(전쟁)과 영성이 제대로 화해되지 않는 한, 수운의 경신년 동학은 몇몇 종교인들만의 기억에 잔류할 뿐, 일반인의 뇌리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말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갑오년에는 ① 한반도를 둘러싸고 청·일이 각축하는 대외적인 흐름(정치적 환경)과 ② 조세 및 토지의 모순에 반발하는 농민운동의 물줄기(경제적 환경)와 ③ 영적인 스승이 입은 억울함을 해소하려는 신원운동의 맥락(종교적 환경)이 한군데에서 만났다. ‘동학란’이든, ‘동학혁명’이든, ‘동학농민전쟁’이든 어떤 명칭을 사용하더라도 동학의 영적 자원이 간과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오히려 그러한 종교적 원천이 어떻게 활용되고 배분되었는지 살피는 것이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브루스 링컨의 말대로, 폭력적 수단만 가지고는 혁명이 성사되기 어려우며, 이데올로기적인 설득과 정서적인 환기를 제공하는 종교적 담론의 힘이 결부될 때 사회의 재구성이 용이해진다고 할 수 있다(Lincoln 1989: 3-11). 

  동학을 소수 지도부만의 문제로 혹은 형식적인 외피로 간단히 치부할 사안도 아니다. 적어도 민중의 목소리(vox populi)를 곧 하느님의 소리(vox dei)로 믿으며 응집력을 발휘할 수 있게 했던, 그래서 저들의 외침이 군현 단위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장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을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동학군을 이끈 갑오년 동학의 주역, 전봉준이 서울로 잡혀 와 공초했던 내용을 음미해볼 만하다. 그는 동학을 수심경천(守心敬天)하는 도(道)로 파악하고, 그러한 동학에 자신은 크게 매료되었다고 진술한다. 아울러 불가항력적 괴질(콜레라)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방도도 다름 아닌, 동학의 경천수심(敬天守心)이라 확신하고 있다(法部 1895: 16b, 19a). 핑계와 변명이 난무하는 추국의 현장에서 그가 쏟아낸 이 발언이야말로 죽음을 앞두고 진솔하게 표명한 마음속 진실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녹두가 동학의 핵심으로 파악한, ‘하느님을 공경하며 모시는 마음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수운이 한 세대 전에 역설했던 시천주(侍天主, 하느님 모심)와 상통한다. 마른 땅의 녹두(綠豆)를 촉촉이 적셔주며 생장시킨 것이 최제우가 몰고 온 영적 비구름[水雲]이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2. 동학의 발아: 영성과 개벽

  수운의 삶을 둘러싸고 있던 시대적 모순과 위기가 갖가지로 회자되곤 한다. 
그중에서도 동학의 종교성(신성과 구제)을 자극한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가 서학, 즉 가톨릭의 유일신 전통과 그에 기반한 영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운이 내세운 동학은 서학에 반하는, 그래서 이름도 그렇게 붙여졌지만 실은 서학의 하느님 신앙을 진지하게 되먹임하면서 새롭게 마련한 대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민중이 절대적 하느님을 모시며 구제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했던 수운으로서는 유·불·도의 전승 못지않게 서학의 문화적 충격도 의식해야 했을 것이다. 다만, 수운은 낯설고 먼 하느님을 민중에게 가깝고 익숙한 신으로 변모시키고자 했고, 그렇게 다듬어낸 종지가 바로 시천주였다. 흔히 동학이라 하면 인내천(人乃天)을 떠올리겠지만 그것은 20세기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주도한 천도교에서 새롭게 구사한 용어이고, 그것의 원천이자 그것의 19세기 버전은 어디까지나 시천주였다.

  동학의 출발을 자극한 또 다른 하나는 괴질이라 불린 콜레라 창궐이다. 감염병이 사회사의 주요 변동요인이 되듯이, 콜레라는 조선 후기 종교사에 있어 깊은 굴곡을 남겼다. 괴질은 너무 빠르게 퍼질 뿐만 아니라 단시간에 집단적인 사망자를 냈기 때문에 종말의 기호로 받아들여졌고, 우주질서의 대전환과 갱신을 뜻하는 개벽의 전조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1821년 조선에 콜레라가 처음 발생하자 가톨릭의 예비신자나 냉담자들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재생의 은혜를 미리 확보하고자 대거 몰려들어 영세를 받았다고 한다(달레 1980: 102).

  콜레라와 동학은 어떠할까? 달레의 기록에 따르면, 1821년 콜레라가 발병한 이래, 1858년부터 4, 5년간 다시금 콜레라가 유행하였다고 한다(달레 1980: 102). 그런데 이 시기는 수운이 종교적 각성을 이루고 포덕을 행하던 기간(1860-1863)과 정확히 포개진다. 당시 수운이 남긴 가사 경전인 『용담유사』에 종종 ‘삼년괴질’이니 ‘연년괴질’이니 하는 말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저 상투적으로 쓰던 관용어가 아니라 실제로 그 시기에 횡행하던 괴질의 상황을 묘사한 것일 수 있다. 핵심은 이러한 괴이한 감염병의 대재앙으로부터 사람들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까의 문제였다. 콜레라는 개벽의 기호로 적극 활용되었고 새로운 구원재를 요하게 될 징후로 간주되었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안심가,” “몽중노소문답가”), “아동방 삼년괴질 죽을염려 있을소냐”(“권학가”) 등등의 가사에서 보듯이, 괴질은 개벽을 재촉하는 상징으로 지목되었고, 하느님에 대한 공경과 모심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시대적 병폐로 인식되었다. 수운의 경신년 동학은 괴질운수가 편만한 개벽의 환경에서 새롭게 떠오른 대안이었다.

3. 방황과 구도, 득도와 포덕

  수운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전기를 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가 남긴 기록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전해지고는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신년의 각성을 전후한 생애 후반부 몇 년에 그칠 뿐이고, 그마저도 대부분 고백적인 언어에 가깝다. 실존적인 신앙고백이 담긴 복음서를 가지고 예수의 전기를 쓸 수 없듯이, 종교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수운의 전기를 온전히 구성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그의 저작 속에서 자신의 삶을 관조하거나 자평했던 몇몇 구절을 통해 종교가로서의 탐색 및 성취에 관한 대강의 뼈대를 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순조 24년(1824) 갑신년에 지금의 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의 경주 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남에서 한학으로 명성을 떨친 부친 근암(近庵) 최옥(1762-1840)은 대를 이을 후사를 얻지 못하다가 늘그막에 한씨 부인을 맞아 62세에 친자인 수운을 얻게 된다. 그러나 수운은 일찍이 5세의 나이에 모친을 여읜 뒤,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익혀 나간다. 12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 부인을 맞아 혼인하지만, 4년 만에 부친을 여읨으로써 16세부터 힘겨운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선조의 가업을 잇는 것도 생계를 꾸릴 일도 막막했던 수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떠돌이 삶과 기나긴 방황, 그리고 기약 없는 구도자의 열망이었다.

  그러던 중 을묘년(1855) 봄, 31세에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다소 신화화된 서사로 전해지고 있지만, 처가가 있는 울산에 기거하던 수운은 불승으로부터 흔히 동학도들이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일컫는 신비한 책(기도의 책)을 건네받고 비로소 구도자의 길을 내딛기 시작한다. 책이 지시하는 바대로 기도의 길을 나서기로 작정한 수운은 1856년 양산 천성산 내원암을 찾아 49일 기도에 돌입하지만, 47일째에 숙부의 상을 당하는 바람에 목표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만다. 1857년 다시 천성산 적멸굴을 찾아 작정했던 기도를 완성하기에 이른다(최종성·박병훈 2020: 43-47). 이는 하늘의 강령을 염원하는 구도자의 탐색으로서, 천도를 얻는 경신년의 대각성을 예비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관문이었다. 훗날 의암 손병희나 구암 김연국과 같은 후기동학의 지도자들이 종교적 결단을 앞두고 천성산의 적멸굴을 찾아와 기도와 수련을 쌓았던 것도 교조의 구도적 삶을 추체험하고 그것을 재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최종성 2019: 25-31).

  천성산의 기도를 마무리한 수운은 이태 뒤인 1859년, 오랜 방황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고향 경주 구미산 용담정으로 돌아온다. 용담정은 경신년 동학의 현장으로서 조부가 사들인 뒤 부친이 공부에 전념하던 글방이었으나 1843년 화재로 소실된 이래 장기간 방치되다 귀향한 수운이 보수해 기거하면서 독서와 수도에 정진한 곳이다.

  드디어 경신년의 동학을 여는 강렬한 체험이 찾아온다. 수운은 1860년 4월 5일 용담정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하느님을 생생하게 대면하며 커다란 각성을 이룬다. 하느님(상제, 천주)과의 문답을 통해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기본위적 삶을 지양하고, 하느님을 받들어 모시며 살라는 시천주(侍天主)의 메시지를 얻게 된다. 아울러 강령과 조화의 염원을 담은 주문(呪文)에다 괴질과 같은 질병으로부터 치유를 보장하는 영부(靈符)도 함께 얻는다. 결국 하느님을 받들어 모시고 경건히 살아가게 하면서 주문과 부적을 통해 병든 인간과 사회를 구제하라는 게 수운에게 맡겨진 신의 적극적인 권고였다.

  수운에게 다가선 하느님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일에 무관심한 채 뒷짐 지고 있는 한가한 신(deus otiosus)이 아니라 세상일을 능동적으로 조율하며 활력 있게 일하는 신(deus industrius)이었다(최종성 2009: 31-32). 뒤집어 얘기하면 수운은 세상의 구제를 위해, 그간 잠들어 있던 하느님을 깨워냈고, 그 덕에 민중은 일하는 하느님을 각성하며 치유와 구제를 꿈꿀 수 있는 존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4. 시천주의 신학과 인간학

  신령을 접하는 강렬한 체험을 겪은 후에 수운은 동학의 핵심 교리로 자리 잡게 될, 시천주에 대한 사유를 가다듬는다. 시천주를 이해하는 관건은 모심[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운은 『동경대전』 “논학문”에서 세 가지 요건을 들어가며 모심을 설명한 바 있다. 즉, 모심은 ① 안으로 신령이 있고(內有神靈), ② 밖으로 기화가 있으며(外有氣化), ③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이를 알고 바꾸지 않는 것(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이라 했다. 모심은 지근거리에서 봉사하거나 외재적 신에게 올리는 봉헌이 아니라 첫째, 신성을 내면화하고 둘째, 내적인 신비를 외재화하고 셋째, 신인합일의 경지를 삶 속에서 항구화하는 것이었다.

  하느님 모심은 전근대의 제천의례와 같이 황제에게만 독점된 의례적 특권(ritual hegemony)이 아니라 만인에게 골고루 부여된 종교적 평등권이었다. 그것은 신성을 깨닫고, 신성의 기운이 심신에 충일하도록 돌보되, 그것을 일상의 삶에서 끊이지 않도록 늘 가꿔가야 하는 지속적인 수행의 길이었다. 그런 점에서 수운이 말한 모심은 찰나적인 한 번의 모심이 아닌, 영원한 모심[永侍]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을 지키고 기운(몸)을 바르게 하는, 동학의 수심정기(守心正氣)야말로 시천주를 영속화하는 실천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수운이 일깨운 하느님은 민중을 구제하는 ‘초월적인 신’이면서도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내재적 신성’으로도 이해되었다. 이렇게 초월성(transcendence)과 내재성(immanence)을 겸비한 동학의 신관을 흔히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 일컫기도 한다. 동학의 신은 만물에 내재하면서도 만물을 초월하는 생성·순환의 힘을 견지하고 있으므로 범신론과도 유신론과도 변별된다. 동학의 하느님이 지닌 초월과 내재의 양면성은 시천주를 통해 절충되면서 동학 특유의 신학(theology)과 인간학(anthropology)을 배태했다.

  시천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운과 그 이후에 전개된 초기동학은 시천주의 이중적 의미가 변주를 일으키며 사상적 심화와 전환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시천주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모시라’는 당위적인 윤리명령으로 이해되었다. 이기심 가득한 미약한 인간이 곧바로 절대적인 신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신의 입장에서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임을 긍정해준다 해도 아직 인간의 한계를 성찰하지 못했다면 극단적인 오만에 빠지고 말 뿐이다. 당연히 자신만을 챙기는 위아(爲我)의 오염을 걷어내고 하느님을 위하고(爲天主) 공경하는(敬天) 질적 전환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입장에서 주목되는 것은 시천주의 대상이 되는 신과 신학이었다. 수행자로서는 신과 인간의 거리를 좁히다가 끝내 합일을 이루는, 신인의 합덕(合德)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둘째, 시천주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로도 이해되면서 신성을 내재한 존재의 가치와 존엄성을 되새기게 했다. 하느님도 위대하지만, 그러한 위대한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인간도 결코 사소한 존재로 여겨질 수 없었다. 오만은 금물이지만,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로서의 자존감은 보장받는 게 마땅하다는 입장이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존재라도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성도 아이도 모두 시천주의 존재이므로 저들을 괄시하는 것은 저들이 모시고 있는 하느님을 모욕하는 일이 된다. 하느님에게 그랬듯이 이제 인간도 그렇게 대우하라는 가르침의 도출은 자연스러웠다. 다시금 주목하는 것은 시천주의 주체가 되는 인간과 인간학이었다. 수운의 제자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도출해낼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천도교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종지에 이르렀던 것도 그 연장이었다. 수행자로서는 신인 간의 거리를 좁혀 합덕을 이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거리가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즉 신인 동덕(同德)의 각성이 관건이었다.

5. 영성에서 사회변혁으로

  경신년 동학은 수운의 체험과 각성을 통해 하느님을 재발견하고 그를 모시는 영성공동체로 출발하였다. 그 과정에서 신성이 깃든 인간의 가치를 자각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이는 갑오년의 사회적인 변혁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위대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를 모시라고 선언하며 영성을 자극하였지만, 점차 그러한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인간을 위대하게 여기며 존중하도록 권유한 것이다. 신을 거부하며 인간의 주체성을 확보한 게 아니라 신을 모심으로써 인간의 존엄성도 발견한 셈이다. 외부로부터 인권사상을 배워오거나 민권사상을 수입해 들여와서가 아니라 신을 모시고 있는 평등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자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신학의 발견으로 인간학을 응집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경신년 동학이 발명한 시천주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을 죽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신을 살려내면서 결국에는 인간의 가치까지도 고무했던 것이 수운이 걸어온 길이었다. 여기에 갑오년을 낳게 한 원천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전근대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잔반 처리되듯 잊힐지도 모를 민중이었지만, 수운을 계기로 그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하느님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마음(민심)은 하느님의 마음(천심)이 될 수 있었고, 급기야 역사 속에서 폭발적인 힘을 분출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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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달레, 샤를르 (안응렬·최석우 역), 1980, 『한국천주교회사(중)』,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종성, 2009, 『동학의 테오프락시』, 서울: 민속원.

    _______ 2018, 『한국 종교문화 횡단기』, 서울: 이학사.

    _______ 2019, “동학산행(東學山行): 산으로 간 동학의 기록들,” 『종교학연구』 37: 1-37.

    최종성·박병훈 역주, 2020, 『시천교조유적도지: 그림으로 읽는 또 다른 동학사』, 서울: 모시는사람들.

    法部 편, 1895, 『全琒準供草』(규17285).

    村山智順, 1935, 『朝鮮の類似宗敎』, 京城: 朝鮮總督府.

    Lincoln, Bruce, 1989, Discourse and the Construction of Socie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저자 소개

최종성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종교학회장을 역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