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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탄생 300주년] 칸트와 그의 철학
1. 칸트의 생애와 대표 저작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옛 독일인 프로이센(Preußen) 왕국의 발원지인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1724년 4월 22일에 탄생하여 그 도시에서만 평생을 살다가 1804년 2월 12일에 별세하였다.
소박한 마구사(馬具師)인 아버지와 경건주의 신앙이 독실한 어머니의 아홉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난 칸트는 6세(1730)부터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특히 고전 작가와 라틴어에 심취해 있었다. 그 사이 어머니를 여읜(1737) 소년 칸트는 1740년(16세)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 수학, 자연과학을 폭넓게 공부하였다. 1746년(22세) 그의 부친마저 세상을 떠난 직후, 그는 “활력의 참측정에 대한 견해들”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9년간 쾨니히스베르크시 근교의 세 가문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1755년(31세) 7월에 학위 논문 “불에 관하여”를, 같은 해 9월에 교수자격 취득을 위한 마지막 논문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일 원리에 관한 새로운 해명”을 제출하고, 사강사(私講師)가 되어 철학, 자연과학, 자연지리학, 신학, 인간학 등을 강의하였다.
1764년(40세)에 ‘시학’ 교수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자기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고, 그 대신에 1765년에 겨우 왕립도서관의 부사서직을 맡아 생전 처음으로 고정 급여(연봉 62탈러[1])를 받게 되었다. 1769년에 에를랑겐(Erlangen)과 예나(Jena) 대학으로부터 정교수 초청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기다렸다가, 1770년(46세) 마침내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형이상학과 논리학’ 강좌의 정교수가 되었다(연봉 220탈러). 이때 그는 교수취임논문 “감성세계와 예지세계의 형식과 원리들에 관하여”를 발표하였다. 이후 거의 모든 사교생활에서 물러나 1781년(57세)에 대저 『순수이성비판』을 출간하고, 이어서 『형이상학 서설』(1783), 『윤리형이상학 정초』(1785),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793), 『영원한 평화』(1795), 『윤리형이상학』(1797) 등 역저를 잇따라 내놓음으로써 철학사의 중심이 되었다.
그 사이 그는 1786년과 1788년 두 차례 대학 총장을 역임하였고(연봉 620탈러), 1787년(63세)에는 마침내 자기 집을 소유할 만큼 가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결혼 적령기를 넘겨서인지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1804년 80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유해는 처음엔 쾨니히스베르크 대사원의 교수 묘역에 묻혔으며, 1880년에 인근 교회 묘지로 이장되었다가, 탄생 200주년이던 1924년에 쾨니히스베르크 대사원의 ‘칸트 주랑(Stoa Kantiana)’, 현금의 장소에 안치되었다.
1904년 그의 100주년 기일에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이다”(KpV, A288=V161)라는 그의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 첫 구절을 새겨 넣은 기념 동판을 쾨니히스베르크 성곽에 부착하여 그를 기렸는데, 원래의 동판은 1945년에 유실되었고, 1994년 허물어진 쾨니히스베르크 옛 성곽의 모서리에 독일어-러시아어로 같은 글귀가 새겨진 현재의 동판이 부착되었다. 독일인 칸트는 생전에도 쾨니히스베르크가 러시아에 의해 점령당했던 수년 동안 러시아 신민이었는데, 현재 사람들은 그의 묘소와 기념품, 기념관을 러시아 영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라는 러시아 땅인, 남쪽의 폴란드와 북쪽의 리투아니아 사이 동해(발틱해) 연안의 항구 쾨니히스베르크는 13세기에 독일 기사단이 세운 도시로, 여기서 프로이센 1대 왕 프리드리히 1세(재위: 1701-1713)가 즉위하여 왕국을 열었으니 장차 독일 통일의 대업을 이룬 프로이센 왕국의 발원지라 할 것이다. 칸트가 강사로 교단에 선 1775년에 건립 5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한 이 도시의 주민 수는 1800년에 약 6만 명[2]이었지만, 동해의 중심 해상 무역항으로 영국, 스페인, 노르웨이, 아메리카 등지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상선도 드나들었다. 1544년에 개교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Albertus-Universität Königsberg)은 칸트 당대 교수 수 30-40명, 학생 수 800명을 넘지 않는 정도여서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각지에서 온 적어도 9개의 서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학생과 교수들이 구성한 그 당시 최신 학문의 전당이었다. 이 대학에서 칸트는 매주 16시간 이상(어느 학기에는 26시간)의 강의를 하는 한편, 그의 학문 활동 57년간(1747-1803)에 걸쳐 70편의 논저를 세상에 펴내 세계인과 교류하였다(Dörflinger/Fehr/Malter 2009 참조).
2. 칸트철학의 주제와 대강
‘나’ 바깥에 자연법칙이, ‘나’ 안에 도덕법칙이 있다. — 자연과 인간 안의 상이한 법칙 원리, 그리고 이 두 법칙의 합일을 해명하는 일을 칸트는 철학의 과제로 보았으며, 그 과제를 인간의 본질속성을 통찰하고 이성 능력을 비판하면서 풀어나갔다.
통상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 정의되거니와, 그렇기에 인간 고찰에서는 인간의 ‘이성적임’과 ‘동물임’이,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관계가 늘 시야에 든다. 칸트 역시 이를 주시하는데, 다만 그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질이 ‘이성적임’에 있다는 견지에서 인간 이성의 주요 관심사를 철학의 주요 주제로 삼는다.
“나의 이성의 모든 관심(즉, 사변적 관심 및 실천적 관심)은 다음의 세 물음으로 통합된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KrV, A805=B833)
인간 이성의 모든 관심사를 수렴하여 일단 이렇게 세 물음으로 정리한 칸트는 이것들에 이어 “4. 인간은 무엇인가?”(Log, IX25)라는 물음을 덧붙이고, 앞의 세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 이 마지막 물음의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물음은 “순전히 사변적”인, 곧 ‘진리’에 대한 것으로, 이 물음에 대한 탐구가 『순수이성비판』과 『형이상학 서설』로 결실하여, 인간의 참다운 대상 인식(자연과학적 지식)의 가능 원리인 인간의 선험적 의식의 초월성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흔히 ‘실재하는 것’을 ‘우리 인간의 위치와 상관없이, 인간이 보든 말든, 인간이 알든 모르든 간에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이를 칸트는 무의미한 언사로 간주한다. 우리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모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 것, 이름하여 ‘대상(객체/객관)’이다. 그래서 ‘대상’이 이제까지 ‘존재자’로 지칭되고 ‘기체(基體)’ 역할을 하던 것의 새 이름이 되고, ‘주체’의 자리에는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규정하는 자, 인간의 주관이 놓인다. — 이것은 주객전도(主客顚倒)로서, 이것이야말로 “사고방식의 변혁”이다. 칸트가 종래의 천동설에 대한 지동설을 비유하며 천명하는 이러한 ‘사고의 변혁’을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일컫는다(KrV, BXVI∼BXVIII 참조).
대상이란 주관에 의해 ‘어떠어떠하게 있는 것’으로 규정되는 것인데, 주관은 오직 자기를 감각적으로 촉발하는 것을 고유의 공간·시간이라는 질서 형식에 따라 수용할 수 있고, 이렇게 수용된 것을 “∼은 ∼이다[하다]”라는 고유한 사고 형식(범주)에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이 곧 대상 인식이며, 이렇게 인식된 것이 존재 세계이다. 이 세계를 일컬어 ‘자연’이라 하니까 자연 세계란 인간이 인식한 대상들의 총체를 말한다. 이러한 자연만이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자연에 대한 지식만이 참지식이라 할 것이다. 자연(自然, physis), 곧 ‘저절로 그러한 바’란 실상 인간에 의해 그러하다고 인식된 것이다.
둘째 물음은 “순전히 실천적”인, 곧 그 자체로 ‘선’한 것에 대한 것으로, 칸트의 도덕철학 3부작인 『윤리형이상학 정초』, 『실천이성비판』, 『윤리형이상학』의 제2편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는 이 물음에 대한 탐구의 결과를 담고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이 존엄한 근거인 인간 실천이성의 자율성을 천착한 것이다.
칸트 도덕철학은 ‘자유’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自由)’가 문자 그대로 ‘스스로 비롯함’ 곧 ‘최초의 원인’을 말하는 한, 그러한 자유를 자연 안에서 찾을 수는 없다. 자연 안에서 발생하는 것은 모두 그 원인이 그것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를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초월적 이념”(KrV, A448=B476)이다.
무릇 인간은 누가 한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다. 그런데 책임은 자의(自意)로 행위한 자에게 지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을 자유의사에 따라 행위한 자, 행위 주체로 간주하고 있다.
아무런 “귀책능력이[책임질 역량이] 없는 사물”을 “물건”이라고 한다면, “그의 행위들에 대해 귀책능력이 있는 주체”를 일컬어 “인격”이라 한다(MS, RL, AB23=VI223 참조). 인격이란 자연법칙대로 운동하는 자연 사물이 아니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해야만 하고, 그것을 책임지는 주체이다. 그런데 마땅히 행할 바의 규정, 곧 당위의 법칙들, 예컨대 법과 도덕은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이 그 자신에게 부과한 것이다. 인간의 당위 법칙들은 말하자면 자율이다.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자인 것이다.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자율적으로 당위 규범을 준수함으로써 인격이 된다. 이러한 인격으로서의 인간만이 한낱 가격을 갖는 물건, 그래서 같은 가격의 다른 것과 교환될 수 있는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그래서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목적적 존재자이다(GMS, B65=IV428 참조).
셋째 물음은 ‘무릇 내가 행해야 할 것을 행한다면, 나는 그때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를 묻는 것이거니와, 이 “물음은 실천적이면서 동시에 이론적”이다. 내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윤리적으로 선행한 자가 자연 세계 안에서 행복을 누림, 곧 ‘최고선’이다. 그러나 이는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이 합일하는 곳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의 합일은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곧 신의 조력이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 물음은 “종교”의 문제가 되는바, 종교의 참뜻은 지상에 신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으니, 그 길은 곧 “우리의 모든 의무들을 신의 지시명령[계명]들로 인식”(RGV, B229=VI153)하는 데에서 열린다. 그리하여 인간이 선한 원리에 따라 행해서 자연 세계인 지상에 ‘윤리적 공동체’ 내지 ‘덕의 나라’를 이룩함이 진정으로 성스러운 일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 점을 칸트는 그의 철학적 종교론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역설하고 있다.
철학적 탐구가 넓어지면서 칸트는 이상의 세 가지 가치, 곧 진리[眞], 선[善], 성[聖]의 가능 원리 외에 미[美]와 인류의 평화[和]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밝히고 제안하기에 이르는데, 이 두 원리는 인간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고, 그러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학적 사실에 터하고 있다. 이제 ‘인간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의 해답은 앞의 세 물음에 대한 답 외에 최소한 이 두 가치의 원리가 더 해명되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진리가 인간의 인식 판단에서 드러난다면, 미는 미감적 판단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인식 판단은 객관적인 반면에 미감적 판단은 순전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미감적 판단 역시 보편적인 “자기자율”(KU, BXXXVII=V185)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인 만큼 그 보편타당성을 주장한다. 이쯤에서 칸트는 앞의 둘째와 셋째 물음 사이에 또 하나의 물음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를 상정했음 직하다. 그리고 그 해답을 『판단력비판』을 통해 제시한다.
나의 감정이 어떤 것에서 흡족함을 느끼거나 부적의함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합목적성’에 부합하는지 어긋나는지에 달려 있고, 이를 판정하는 능력이 반성적 판단력이다.
상상력과 지성의 합법칙성이 합일할 때 반성적 판단력은 미감적으로 작동하여 객관이 합목적적이라고 판정하고, 그때 쾌의 감정이 생긴다. 이 판단력의 반성 작용에서 원리로 작동하는 ‘합목적성’은 객관적으로 자연에 지정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력이 단지 주관적인 관점에서 그 자신에게 지정하는 “자기자율”이다. 이 자기자율에 따라 생기는, 예컨대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미적 판단은 감성(시각)에 의존해 있으면서도, “이 장미는 붉다”라는 인식 판단처럼 객관의 속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에게는 지식[과학]이나 당위[도덕]와는 전혀 다른 미[감정]의 세계가 열린다.
말년의 칸트가 내놓은 철학적 구상은 인류 세계의 ‘영원한 평화’ 이념을 담고 있다. 그것은 평화 안에서만 인간의 인간다움,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곧 “인권”이 지속적으로 펼쳐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덕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인간의 권리 곧 인권(Menschenrecht)을 갖는다. 인권이란 “자기 자신의 인격에서 인간성의 권리”(MS, RL, AB43=VI236) 곧 인간임[인류]의 권리(Recht der Menschheit)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낱 수단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살고 대우받을 권리를 일컫는다.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자”(OP, XXI67)이다. 이러한 “인격 안의 인격성의 권리들 및 인간들의 권리 외에 세상에서 신성한 것은 없다. 신성성은 우리가 인간들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는 데에 있으며, 그러한 사용의 금지는 자유와 인격성 안에 있다”(Refl 7308, XIX308).
인권은 “모든 인간에게 그의 인간성의 힘으로[그가 인간이라는 바로 그 힘으로] 귀속하는 […] 근원적인 권리”(MS, RL, AB45=VI237)로서, 그러한 “보편적 인권의 원리들”은 곧 자유, 평등, 안전이며, 인권의 토대는 다른 것이 아니고 인간이 법적 주체가 되는 일이다(MS, RL, AB43=VI236 참조).
무릇 인권의 으뜸은 “자유”의 권리로, 여기서 자유란 “타인의 강요하는 의사로부터의 독립성”이며, 그것은 “모든 타인의 자유와 보편적 법칙에 따라서 공존할 수 있는 한”에서 보장되어야 한다(MS, RL, AB45=VI237 참조). 이 자유는 무엇보다도 각자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TP, A235=VIII290)할 수 있는,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 행복하게 지낼”(MS, TL, A126=VI454) 권리를 핵심 요소로 갖는다.
그런데 이러한 인권의 보장은 법치 국가에서만, 그리고 더 나아가 국제적으로는 “보편적인 국가연합”(MS, RL, A227=B257=VI350)을 이룸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ZeF, A104=B112=VIII386 참조). 이것이 칸트가 『영원한 평화』와 『윤리형이상학』의 제1편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에서 역설하는 바다.
타인과 공존하는 “시민적 상태”에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자립성”이다. 그래서 “행위가 또는 그 행위의 준칙에 따른 각자의 의사의 자유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는 각 행위”만이 “옳다”는 것이 칸트에서 법의 “보편적 원리”이다(MS, RL, AB33=VI230 참조). 이 원리는 한 국가 안에서뿐만 아니라 국가들 사이에서도 타당하다. 칸트의 법사상은 인간 각자는 자립성을 갖되, 더불어 삶에서는 화합해야 한다는, 말하자면 ‘부동이화(不同而和)’의 원리 위에 있다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칸트철학의 주제는 인간과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대표적 다섯 가치, 곧 진(眞) ‧ 선(善) ‧ 미(美) ‧ 성(聖) ‧ 화(和)라 하겠다. 이것들은 근대 철학의 가장 논쟁적인 주제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한 당대의 거의 모든 철학적 쟁점을 칸트는 전래의 그리스-로마 사상, 기독교 정신, 근대 시민사회 이론, 근대 수학적 자연과학 사상을 염두에 두고서, 비판적으로 고찰했으며, 그의 사유는 대개 변증법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변증법적 사유의 귀결은 이어질 논의의 배아를 벌써 함유하는 것이 보통이다. 1900년에 개시하여 현재까지 29권 35책이 간행된 ⟪칸트전집(학술원판)⟫을 1890년대에 최초로 편찬 기획하고, 칸트협회를 설립한 독일 학자들은 칸트의 철학사적 위상을 평가하여,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이 칸트에 모여 있고, 칸트 이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고 말했는데, 이는 사실에 크게 어긋남이 없는 말이라 할 것이다.
3. 칸트의 휴머니즘과 그 영향
‘칸트를 추종하거나 반대하면서 철학할 수는 있어도, 칸트를 모르고서는 할 수 없다’라는 세평이 칸트철학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그는 ‘존재’ 개념을 공간·시간의 지평 위에 국한함으로써 존재 형이상학을, 따라서 영혼론과 신학을 이론철학에서 배제하고, 형식 논리학에 대해 인식 논리학(초월논리학)을 세움으로써 논리학(사고)=존재론(존재)으로의 길을 열었으며, 미적 판단의 보편타당성을 논변함으로써 미학을 학적으로 정초하였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사유의 대혁신을 이루었다. 그러나 칸트철학의 불멸성은 무엇보다도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대고, 인간 품격의 고양을 촉진하는 휴머니즘에 있다.
칸트는 인간을 인격으로 보거니와, 그것은 곧 인간이 인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자연적(기계적) 성벽을 물리치고 당위를 행하려는 자유의지를 가짐을 납득하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인간은 그 자신의 인격에서 인간성에 대한 책임이 있”(MS, RL, AB96=VI270)을 뿐만 아니라, 또한 타인을 인격으로 대할 책무를 갖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기는 해도, 그렇다고 자신을 임의대로 처분할 수 있는 “그 자신의 소유자일 수는 없으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의 소유자일 수는 더더욱 없다”(MS, RL, AB96=VI270). ‘나’든 ‘너’든 똑같은 인격이다. — 바로 이러한 통찰에 칸트의 인본주의, 휴머니즘이 있다.
인간을 이러한 인격이게끔 하는 것은 자율성이다. 자율(自律, αὐτονόμία)이란 스스로 수립한 율법 내지는 법칙을 말한다. 그런데 율법/법칙은 준수하지 않을 수 없는 규범이다. 그러니까 자율은 자기가 세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규범이며, 자율성이란 그러한 자기 규범 수립과 준수의 능력을 일컫는다. 그래서 본래적 의미에서 자율은 자기가 세운 규칙으로써 자신을 통제함, 곧 자기 통치(自治, ἐγκράτεια)를 말한다. 이러한 자치의 능력이 인간을 인격으로 만든다.
자율의 취지는 자치 곧 자기통제에 있다. 그러니까 자율성이란 통제의 필요를 자각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자의 속성이다. 통제의 필요를 자각하지 못하거나, 통제의 규칙을 스스로 세울 줄 모르거나, 규칙을 세우긴 하지만 준수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 자기통제, 즉 ‘자율’은 없다. 이런 경우 ‘자율’이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자율’의 의미 조건에 부합하는 존재자는 규범의식이 있으면서도 자주 규범을 어기는 경향성을 갖는, ‘이성적 동물’인 인간밖에 없다. 자율성은 인간 안의 이성성과 동물성의 화합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자율성에서 인간의 존엄함을 보는 칸트철학이 인류 문명 형성에 미친 영향은 칸트의 생시에도 지대했으며, 인간이 이성적 동물인 한 지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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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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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울바흐, F. (백종현 역), 2019, 『임마누엘 칸트: 생애와 철학 체계』, 파주: 아카넷.
Dörflinger, B. / Fehr, J. J. / Malter, R. (Hrsg.), 2009, Königsberg 1724–1804, Zürich · New York: OLMS.
Kant, I., 1900~, Kant’s gesammelte Schriften[AA], Hrsg. von der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ten u. a.,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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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L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Rechtslehre (VI)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법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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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F Zum ewigen Frieden (VIII) (백종현 역), 2013, 『영원한 평화』, 파주: 아카넷.
- [1]옛 독일의 은화. Taler는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Johaimsthaler(1518-1892 통용)는 은 1Unze(약 27.2g), Reichstaler(1566-1750 통용)는 은 25.984g을 함유했으며, 칸트 당대에 프로이센의 공식 화폐였던 Konventionstaler(1750-1871 통용)는 은 1마르크(약 235g)로 14탈러를 주조했다고 한다.
- [2]당시 왕국의 수도인 베를린(Berlin)은 17만 명, 또 다른 대도시인 쾰른(Köln)과 프랑크푸르트(Frankfurt/M.)는 5만 명, 뮌헨(München)은 3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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