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지평

기획특집

혐오의 정치를 넘어서는 민주적 시민성

36호 - 2024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주형

1. 머리말

  20세기 후반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을 이끈 핵심어는 ‘이행’, ‘공고화’, ‘심화’, ‘확산’ 등이었다. 권위주의 국가의 민주화와 민주화된 국가에서 민주주의의 정착 및 발전을 위한 조건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국제질서도 민주화의 흐름에 대체로 우호적인 여건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와 매우 대조적으로 최근 민주주의와 가장 빈번히 결합되는 단어는 ‘위기’, ‘퇴행’, ‘침식’ 등으로 보인다. 세계 각국에서 포퓰리즘, 정치적 양극화, 극단주의의 확산 등에 대한 우려가 심각한 수준이다. 권위주의화 내지는 독재화(autocratization)의 세계적 물결을 말하기도 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현 상황과 전망에 대한 분석도 낙관적이지 못하다. 승자독식의 원리로 오랫동안 운영된 정치과정은 정치적 대표체계의 왜곡과 편향을 고착화했고, 진영논리에 갇혀 타협과 조정 기능을 상실한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기후위기, 인구감소, 지방소멸, 젠더와 세대 갈등, 연금고갈 등 중장기적인 비전과 사회적 합의 형성이 필요한 난제들을 정치권에서는 제대로 의제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와 악마화를 부추기는 정치문화의 확산은 정치의 기능 회복에 대한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민주주의 침식의 중요한 징후로 간주되는 정치적 양극화, 포퓰리즘, ‘팬덤정치’는 모두 이렇게 혐오의 정서와 문법을 바탕으로 한다.

  이 글은 혐오의 정치에 대한 이해와 극복 방안 모색을 위한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우선 현상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제공한다. 이어서 기존의 연구와 담론에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주제로서 시민성(citizenship)의 문제를 의제화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이 관점이 혐오의 정치를 더 깊게 이해하는 하나의 진입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증오와 배제적 형태의 대중 동원에 기대는 ‘세력화’와 정치적 역량 강화의 재귀적 과정에 주목하는 ‘주체화’의 동학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특히 민주적 시민성의 다층적 이해를 위한 이론적 탐색을 통해 기존의 표준적 대의제 정치과정에서 누락 또는 주변화되는 시민성의 양상으로서 ‘형성적’ 시민성과 ‘파열적’ 시민성을 강조한다.

2. 혐오와 양극화의 정치

  현재 여러 나라에서 관찰되는 민주주의의 퇴행 혹은 침식 현상은 많은 경우 그 과정이 점진적이고 비가시적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김현섭 2023; Gershewski 2021). 군사 쿠데타 등과 같은 파국을 통한 체제의 전격적 붕괴(breakdown)가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교묘한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질을 악화시키는 흐름이다. 심지어 미국과 같이 오랜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진 국가들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사법부, 검찰, 선거관리위원회 등 정치경쟁의 심판 역할을 담당해야 할 기관들이 권력 유지와 확장의 수단으로 타락하고, 언론이나 시민사회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이들의 비판적 감시 기능이 훼손되는 패턴이 자주 관찰된다. 정권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는 극단주의 세력이 확산하여 배제적인 형태의 정체성 정치가 정치 담론과 과정을 장악하는 모습도 보인다. 유럽 등에서는 극단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부 세력이 반체제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지지세를 키워가기도 한다(무데 2021).

  민주주의 퇴행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복잡하고 논쟁적이다. 세계화로 대변되는 사회경제 질서의 변화가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정치 제도와 리더십이 이 문제를 해소하는 데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누적된 불만과 분노가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는 해석이 많다. 이와는 다소 초점을 달리하여 심화하는 문화적, 종교적 갈등 등 정체성의 문제에 주목하는 연구도 많고, 빠르게 발전하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가짜뉴스의 확산과 확증편향의 강화 등에 기여한다는 분석도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이처럼 우려스러운 흐름의 공통분모로 바로 혐오의 정치를 들 수 있다. 상대 진영을 공존과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이다. 심지어는 정당 내부에서의 분파 싸움에서도 이런 경향이 자주 관찰된다. 권력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할 시민사회와 언론이 진영논리에 휘말리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이렇게 되면 정치인과 시민의 태도에서부터 제도의 작동에 이르기까지 대화가 아닌 전투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국내에서는 혐오 정치의 비타협적이고 배제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정치적 부족주의’ 혹은 ‘팬덤정치’와 같은 용어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대남’, ‘꼴페미’, ‘한남충’, ‘개딸’ 등의 날 선 언어가 직관적으로 이런 흐름을 대변하고 있다(박상훈 2023). 서구의 연구에서도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규범의 훼손에 대한 경험적 증거가 누적되고 있다(레비츠키·지블랫 2018; Helmke, Kroeger, and Paine 2022).

  혐오와 양극화의 정치는 일반적으로 대의민주주의가 정상적인 경로를 이탈한 오작동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러한 흐름에 대한 처방도 건강한 대의제 정치과정의 복원에 초점이 맞춰진다. 권력 기관 사이의 수평적 책임성 메커니즘과 미디어의 비판적 기능을 복원하고, 공공정책에 대해 경쟁적으로 비전을 제시하면서 경합하는 정당체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정치권의 반응성과 책임성을 확보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민주주의 정치과정의 부드러운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관용과 제도적 자제 등의 정치 규범을 복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강원택 2021; 레비츠키·지블랫 2018; 뮐러 2022; 최장집 2020).

3. 시민성의 의제화: 주체화와 세력화

 그런데 이 글에서는 민주주의 침식에 대한 일반적인 진단과는 다소 각도를 달리하여 기존의 연구와 담론에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한 측면을 부각하고자 한다. 바로 ‘시민성’의 문제이다. 앞서 보았듯이 지금까지 분석의 초점은 대체로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법, 제도와 이를 뒷받침하는 규범의 문제에 놓여 있다. 이 문제들은 당연히 중요한 것이고 시민성의 발현 또한 한 정체를 구성하는 법, 제도, 규범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시민성의 문제는 이러한 요인들이 형성하는 일종의 증상 내지는 징후로 다뤄지는 경향이 강하고, 그 자체로서 의제화되는 경우가 썩 많지 않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의 시민성은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에서 시민성의 문제가 이 글을 연 혐오와 배제, 양극화 현상과 연결된다. 사실 한국인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체제가 이 에너지를 긍정적이고 지속가능한 형태의 참여로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는 큰 이론이 없다. 그 양상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먼저 ‘시민사회의 전장(戰場)화’를 들 수 있다. 정치적 공론장이 마치 전쟁터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는 말이다. 이기고 지는 결과만 중요하지, 싸움의 과정과 절차는 지엽적인 문제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이어서 ‘시민성의 양극화’도 중요한 문제이다. 경제나 문화, 성별 등의 양극화와 관련된 논의가 많고 정치 영역에서도 양극화가 중요한 화두이지만, 정작 시민성에서도 양극화 양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정치적 자원, 태도, 행태에서 매우 적극적, 참여적인 시민들과 소극적, 냉소적 시민들의 분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열정이 다른 한편으로는 무기력과 냉소가 동시에 관찰된다.

  이상에서 언급한 현상들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시민성의 양상을 ‘주체화 없는 세력화’라고 부를 수 있다.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진영논리에 갇히고 무분별한 대중동원에 취약해진 상황을 가리킨다. ‘주체화’가 결여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형태의 참여와 동원이 정치적 자력화(political empowerment)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세력 결집에 수단으로 활용될 뿐, 그 과정이 얼마나 민주적이고 비판적인지, 또 중장기적으로 참여자들의 정치적 역량 강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의 문제에 무관심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동원은 당면한 과제에 몰두하면서 내부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도외시하기 쉽고,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취약할 우려가 크다. 물론 대중동원을 통한 세력화의 논리를 빼고 민주주의 정치과정을 이해할 수는 없다. 특정 정치 지도자가 국민의 주목을 받고 입지를 다져가며 권력 경쟁에 참여하는 모든 과정은 필연적으로 조직화와 동원을 매개로 한다.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그 과정의 질적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병리적인 양상의 대중동원이 ‘참여’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주체화 없는 세력화가 특정한 이념 지향 내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도 언급되어야 한다.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적 성향이 강한 일부 시민들이 권력의 중심부로부터 하향식으로 전달되는 메시지에 결집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익숙한 패턴이다. 하지만 유사한 동학은 통상 진보로 분류되는 정치세력의 경우에도 관찰된다. 부패한 기득권에 저항하는 주권의 행사라는 명분 아래 국민의 조직된 힘을 형성하여 위력을 보여야 한다는 메시지는 한국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다. 양 진영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흐름은 ‘적’과 전선을 긋고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는 화급한 목표가 참여와 동원을 눈앞의 정치 투쟁을 위한 수단으로 환원하는 경향이다. 그러나 특정 정치적 국면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더라도 취약하고 불안한 개인들의 산술적 합으로 일시적으로 결집한 집합체가 지속가능한 형태의 정치참여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이상의 관찰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주체로서 시민이 과연 누구이며 그들이 공적 공간에서 어떻게 행위하는가의 질문을 다시 한번 날카롭게 제기한다.

4. 민주적 시민성의 윤곽

1) 시민성의 양상

  ‘시민성’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시민들이 지니는 권리와 의무, 역할과 기능, 힘과 한계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Bellamy 2008). 그런데 여기서 시민성이 규범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 역할과 기능이 어떠해야 하는지, 개인으로서의 삶과 시민으로서의 삶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의 문제는 누군가가 중립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시민성에 대한 이해는 해당 사회의 운영 원리와 그에 걸맞은 구성원의 모습에 대한 판단과 연동된다. 즉, 좋은 시민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과연 어떤 정치공동체를 지향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전제한다.

  바꿔 말하면 시민성의 문제는 정치적 공간에서 일인칭 복수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감각되고 호명되는지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국의 학계와 정치적 공론장의 담론 지형은 다소 정형화된 모습이다. 통상적인 용례에서 시민 개념의 내포와 외연은 다음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선회한다. 첫째는 ‘형식적-절차적 시민성(formal-procedural citizenship)’으로, 공식적인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유권자와 법체계 내에서 권리 및 의무의 담지자로서 정체성을 가리킨다. 정치공동체의 기존 문법 아래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구성원의 모습이다. 둘째는 ‘결사체적 시민성(associational citizenship)’으로, 이익집단이나 NGO 등 대의제 정치과정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두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시민사회라고 불리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시민성은 각각 공식적, 비공식적 정치과정의 근간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는데, 민주주의가 제도화되는 방식도 이 두 층위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최근 민주주의의 진화는 형식적-절차적 시민성과 결사체적 시민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른 경로들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아래 남은 지면에서는 그러한 경로 중 둘을 ‘형성적 시민성(formative citizenship)’과 ‘파열적 시민성(disruptive citizenship)’이라는 개념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다시 강조하게 되겠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시민성의 네 양상은(형식적-절차적, 결사체적, 형성적, 파열적 시민성) 반드시 서로 상충하는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반대로 복수의 양상들이 구분되면서도 서로를 뒷받침하는 다중적(multi-modal) 시민성을 개념화하고 제도적으로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2) 형성적 시민성

  먼저 형성적 시민성은 전통적인 방식을 넘어서는 형태로 심화 및 제도화된 정치참여의 계기가 만들어내는 시민성의 모습으로서, 최근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갈래로 진행되는 ‘민주적 혁신(democratic innovations)’의 흐름과 직결된다. 민주적 혁신은 “시민참여의 확대와 심화를 통해 전통적 대의제 정치를 쇄신하고 재구성하려는 제도, 과정, 운동”을 가리킨다(김주형·서현수 2021, 2023).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한 다층적인 도전과 한계에 대한 대응으로서, 표준적인 대의제 정치과정의 복원이나 기능 회복을 넘어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숙의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이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대의제 정치를 보완 및 쇄신하고, 중장기적으로는 공동체의 집합적 정치역량을 강화하고자 한다. 민주적 혁신의 핵심적인 세 유형으로는 참여예산제·타운홀 미팅 등과 같은 민회(popular assemblies), 시민의회와 공론조사 등을 포함하는 미니공중(mini-publics), 시민투표·시민발의 등의 직접입법(direct legislation)을 들 수 있다.

  민주적 혁신의 시도는 시민성의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진다. 기존의 대의제 정치에서는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에서 대표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다음 선거에서 사후적으로 책임성을 묻는 ‘유권자’로서 시민의 정체성이 가장 우선된다. 이에 비해 민주적 혁신은 다양한 시민참여 포럼을 통해 정치과정 내부와 경계에 직접 관여하며 중요한 정치적, 정책적 사안의 의제 설정과 결정 과정에 형성적 힘을 행사하는 적극적 정치주체로서 시민의 위상을 특히 강조한다. 심화되고 다각화된 참여의 계기를 통해 정책적 변화를 이끌고 시민들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참여 포럼의 위상과 역할을 건설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여러 차례 시도된 한국의 공론화위원회에서도 그런 경향이 관찰되지만, 참여 포럼이 공식적인 정치과정 및 넓은 사회적 토의와 긴밀히 연계되지 못한 채 고립된 시도로 머무르면서 별다른 효과성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관 주도로 기획 및 운영되면서 정책의 수용성이나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정치적 책임회피를 위해 시민들을 들러리로 내세운다는 날 선 비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당면한 갈등의 해소나 문제 해결 등 실용적 가치에만 천착할 것이 아니라, 참여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성의 함양이라는 긴 안목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적 혁신의 여러 계기를 공식적인 정치제도와 비공식적인 사회적 숙의를 아우르는 넓은 정치과정 속에서 다층적이고 창의적으로 제도화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아일랜드와 캐나다의 시민의회, 핀란드의 시민발의, 미국의 시민발의리뷰 등 해외의 경험이 좋은 지침을 제공해주고, 지금도 프랑스, 벨기에, 스코틀랜드 등에서 기후위기 등 중대한 현안에 대한 지혜와 의지를 모으기 위해 다양한 시민참여 포럼이 시도되고 있다. 그중 일부는 준상설기구로 자리 잡아 가는 흐름도 보인다. 이처럼 민주적 혁신이 기존의 정치과정과 시민성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 더 많은 실험, 연구, 토론이 필요하다. 특히 이러한 참여의 경험이 무분별한 세력화의 논리와는 다른 정치문화를 확산할 수 있을 것인지에 주목해야 한다.

 

3) 파열적 시민성

  이처럼 형성적 시민성은 표준적인 대의제 정치과정과 일정 정도 긴장 관계를 형성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그것을 전제하고 또 쇄신하려는 목표를 갖는다. 비교적 성공적인 해외의 사례들을 보더라도 시민참여 포럼은 공식적인 정치과정과 긴밀히 연계될 때 효과성과 지속력을 갖는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급진적인 양상의 정치참여와 시민성도 대안적인 정치적 상상을 확보하고 민주주의의 활력을 유지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를 ‘파열적 시민성’이라고 불러볼 수 있는데, 기존 질서에서 배제되거나 비가시화된 문제를 의제화하기 위해 제도화된 정치과정 외부에서 도발적으로 전개되는 정치적 실천을 가리킨다.

  정치철학자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파열적 시민성을 개념화하기 위한 좋은 이론적 자원을 제공해준다. 그는 일상적인 용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politics)’와 ‘치안(police)’을 구분한다. 랑시에르(2015: 33)에게 ‘치안’은 “집단들의 결집과 동의, 권력의 조직, 장소들 및 기능들의 분배, 이러한 분배에 대한 정당화 체계가 이루어지는 과정들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부르는 일련의 활동과 과정을 치안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다. 대신 ‘정치’는 바로 이렇게 이해된 치안이라는 “짜임과 단절”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인데, 랑시에르(2015: 34)는 이렇게 이해된 정치를 민주주의와 사실상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정치와 민주주의의 요체는 기존의 질서가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각자의 자리와 기능을 거부하는 ‘불화’와 ‘계쟁’에 있게 된다. 랑시에르 스스로의 표현으로는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요구하는 행위, 혹은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짜임’을 거부하는 파열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반 행위의 의미가 통상적인 정치과정의 언어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예시하기 위해 비교적 최근 한국의 공론장을 뜨겁게 달군 전국장애인차별연대의 지하철 타기 운동을 생각해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 이 단체는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익집단으로, 그들의 시위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확보하기 위한 집합행동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보면 지하철 타기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존의 복지 패러다임을 장애인 친화적인 방향으로 확장하는 정책적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된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 시위의 주장과 수행성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이미 확립된 질서와 권리체계를 확장하는 데에서 시위의 취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 이해하는 것이다. ‘대중교통’이라는 공적인 공간이 다수의 비장애인들에게 편의성과 정시운행을 보장하기 위해 특정한 신체적 조건을 가진 시민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설계 및 운영되어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을 극적으로 상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 지하철역은 우리 사회 공공성의 현황을 보여주고 그것이 도전받는 무대가 되고, 시위에서 수행되는 신체들의 움직임과 발화되는 주장은 우리가 공적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도발이 된다. 그간 셈에서 누락되었던 자들이 복지정책의 수혜자가 아니라 정치주체로, 이들의 문제제기가 소음이 아니라 목소리로 다시 셈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책의 문제이기 이전에 감각의 문제이고, 이들의 행위와 발화는 국가를 향하는 것만큼이나 동료 시민들을 향하고 있다.

  언뜻 이러한 파열적 시민성은 통상 ‘사회운동’이라고 불리는 범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는 파열적 시민성의 양상이 앞서 언급한 세력화의 논리와 다르다는 점이다. 인구학적으로 규정된 특정한 정치세력의 기획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공유된 이해관계에 의해 결집된 조직과 정체성의 논리와 구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상연되는 위반 행위와 급진적인 정치적 저항의 의미를 계획, 대안, 정책 등 표준적인 정치과정의 틀에 가두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비록 정교한 대안적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제도화로 안착되지 못하는 경우에도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공동체의 정치적 상상과 인지 지도(cognitive map)를 바꾸는 데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Arditi 2015). 파열적 실천의 직접적인 효과나 성패 여부만 따져 물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와 시민성의 문제가 곧 해방과 변혁을 위한 투쟁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치안’의 문제는 당연히 중요하고, 그 질적 차이를 따지는 것은 더 나은 집합적 삶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기존의 질서에 급진적으로 도전하는 파열적 시민성은 정치공동체의 민주적 상상과 활력을 유지하고 더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촉매의 역할을 담당한다.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의 표현을 빌리자면, 투쟁 일변도의 정치적 실천이 무정부주의에 의한 파국을 가져온다면, 파열적 시민성이 소멸된 민주주의는 전진을 위한 동력을 상실한 ‘정치의 프로그램화된 죽음’을 초래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발리바르는 ‘반란의 정치(insurrectional politics)’와 ‘헌정의 정치(constitutional politics)’라는 두 계기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하면서, 그 긴장과 갈등이 바로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추동하는 동력이라고 본다(Balibar 2015).

5. 맺음말

  사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시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에 생각보다 익숙하지 않다. 
시민보다는 통치자 혹은 행정가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실상 언론의 정치 관련 보도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도 권력의 중심 내지는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과 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거 결과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도 철저히 권력의 상부에 집중된다. 대학의 정치학 교육과정 구성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좋은 정부와 통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교과목은 넘쳐나지만, 좋은 시민이 누구인지에 천착하는 내용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정치학이 ‘제왕의 학문’이라는 부풀려진 자기 이해도 이런 관점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 글은 초점을 달리하여 시민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의제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주주의는 다른 정치체제와 달리 시민들이 훌륭한 만큼만 훌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소의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민주주의는 좋은 정치인과 사기꾼을 분간하는 임무를 시민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더 넓게는 시민들이 공동체의 운영 원리와 방향성에 형성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체제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 글은 시민성의 외연을 확장한 다중적 접근을 제안하였다. 통상적인 형태의 형식적-절차적 시민성과 결사체적 시민성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세력화의 논리에 취약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로 좁혀 보더라도 지금까지 한국의 지배적인 정치참여 양상에서 세력화의 동학이 강하게 작동하면서 배제적이고 억압적인 동원의 논리가 된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세력화와 구분되는 주체화의 문제에 더 천착할 시점이 되었고, 이러한 목표를 위해 형성적 시민성과 파열적 시민성의 내적 동학과 제도화 방안에 주목하는 것이 좋은 출발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렇게 여러 경로의 시민성이 서로 경합하면서도 보완적인 관계를 이룰 때 혐오에 기대면서 양극화를 추동하는 병리적인 형태의 대중동원과는 다른 방식의 정치참여가 정착할 수 있다. 이 시민들은 때로는 기존의 법과 제도의 형식성을 뛰어넘으면서도 공적 공간의 문법을 만들고 지키는 계기를 스스로 구성하는 자기제약적 존재일 것이다. 또 세력화의 수동적 대상이 되는 미분화된 덩어리에 머무르지 않고 내부의 이질성, 다원성, 모순에 민감한 방식으로 공동행위의 역량을 구축하는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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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강원택, 2021, “한국 정치의 위기와 대의민주주의,” 『지식의 지평』 30: 73-86.

    김주형·서현수, 2021, “민주적 혁신의 개념과 유형: 민주주의의 회복과 재발명 사이에서,” 『현대정치연구』 14(3): 5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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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김주형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양 근·현대 정치사상과 민주주의 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시민참여를 통한 ‘민주적 혁신’과 시민교육, 한국 현대 정치사에 대한 이론적 분석 등으로 관심을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