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마치며

인문학자
한재훈

1. 집필의 계기, 혹은 배경은 무엇인가요?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퇴계 이황의 심성론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나는 2010년 퇴계의 예학(禮學)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학은 공자 당대부터 예(禮)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탄생하였기 때문에 실천 철학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퇴계의 유학 사상에 관한 연구는 이기론과 심성론은 물론 문학과 교육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지만, 그의 예학 사상에 관해서는 박사학위논문이 한 편도 제출되지 않은 실정이었다. 이러한 연구의 공백을 메워 학계에 기여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퇴계의 예학 사상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해 여름 나는 『퇴계선생상제례답문』(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복사본을 들고 경기도 가평의 작은 암자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여름 두 달을 이 책과 씨름하면서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생소했던 예학 용어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파악되지 않던 질문과 답변의 내용들이 차차 잡히기 시작했다. 또 읽고 읽었다. 그러자 이 책의 전체적인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았고, 퇴계 예학의 특징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학교로 돌아온 나는 이렇게 공부한 결과를 학술지에 논문으로 발표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2012년 2월에는 학계 최초로 퇴계 예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나는 『퇴계선생상제례답문』의 초벌 번역을 해두었었다. 그것은 당장의 공부를 착실하게 정리하려는 의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젠가 이 책의 번역본을 내겠다는 막연한 계획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번역 작업을 진척시키지 못하다가, 2020년 말 대우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번역에 매진할 수 있었다. 

2. 번역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상례와 제례에 관한 다양한 내용들을 알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고, 퇴계와 문답을 주고받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어떤 고민을 하였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밟아갔는지를 알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이렇게 예학적으로 높은 식견을 가진 퇴계가 왜 예서(禮書)를 편찬하거나 저술하지 않았을까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퇴계가 예서를 편찬하거나 저술하지 않고 그저 단편적인 관련 문답이 남아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우리나라 학계가 조선시대 유학사를 기술하는 데 커다란 착시현상을 초래했다. 예컨대 조선시대 유학사에서는 16세기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등으로 인해 조선의 성리학은 심화되었고, 조선의 예학은 그보다 한 세대쯤 뒤인 17세기에 이르러 한강 정구와 사계 김장생을 통해 발전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퇴계의 예학적 수준과 그것이 어떻게 한강이나 사계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등에 관한 면밀한 분석이 결여된 피상적인 접근일 뿐만 아니라, 퇴계가 예서를 내놓지 않은 근본적 문제의식에 대한 이해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 책은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3. 대중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는 퇴계 예학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퇴계 예학의 특징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해석에 융통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원칙은 어떤 이론이나 규범에서 그것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그 원칙을 부정하려 한다면 그런 이론이나 규범은 폐기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을 존속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것의 존재 이유인 원칙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원칙이 적용되는 시간과 공간의 장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해당 원칙이 제정된 옛날과 그것이 시행될 오늘은 여러 면에서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미처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이 새롭게 제기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한다. 따라서 이 새로운 조건에 어떻게 원칙을 작동하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지혜로운 해답을 찾아야 한다. 원칙과 현실 모두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양자의 간극을 직시하는 고민, 그 간극이 단절로 끝나지 않고 연결로 나아가도록 융통성을 발휘하는 해답 그 사이에 해석이 자리한다. 퇴계는 당시 최고 수준의 예학적 식견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원칙의 내용과 범위를 확인하였고, 이를 융통성 있게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예학을 대하는 이러한 퇴계의 진지하면서도 유연한 자세는 우리가 어떤 문제상황에 직면했을 때도 반드시 견지해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4. 향후 연구 계획은 무엇인가요?

  향후 연구 계획은 예를 주제로 하는 대중 인문서를 집필하는 것이다. 다만 예를 개인이나 사회가 준행해야 하는 의식이나 절차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해당 예가 만들어진 본질적 이유와 그것이 갖는 인문학적 의의를 소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인식의 의미로 행해졌던 예가 ‘관례(冠禮)’이다. 관례의 의식과 절차는 성년이 되는 사내아이가 댕기머리를 올려 상투를 짓고 그 위에 관을 쓰는 것이다. 내가 계획하는 책은 이런 것을 소개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관례에서 내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자(字)’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불렀던 이름이 있음에도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의식과 절차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고, 그것을 통해 한 명의 어린아이가 어떻게 어른이 되도록 배려했는지에 관한 섬세한 염려와 의도를 소개하는 것이 내가 계획하고 있는 책이다. 

5.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요즘 우리 사회는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뒤에는 크게 몸살을 앓는다.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이 회자되는가 하면, 심지어 명절 후에는 이혼률이 증가한다는 말도 들린다. 예는 그야말로 현대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구습일 뿐인가? 그래서 청산되어야 할 전통의 잔재일 뿐인가? 혹시 우리가 그것이 간직하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추장스러운 형식에만 주목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싶다.

* 본 연구는 대우재단의 2020년 학술연구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물은 2024년 6월에 60번째 대우고전총서로 발간되었습니다.

저자 소개

한재훈
인문학자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23년부터는 강남서당 뇌화재(雷花齋)에서 다양한 동양고전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