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학술도서
기본 정보
도서 소개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이 어느 정도 시들해진 요즈음 프랑스에서는 다시 베르그손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그의 강의록이 새롭게 완간된 것은 물론, 권위 있는 문화서평잡지인 ≪마가진 리테레르 Magazine lit raire≫가 특집호를 내면서 그를 재조명할 정도로 최근 그에 관한 연구가 부쩍 늘고 있다.
베르그손은 분명 새로운 것을 모색하려 할 때 항상 다시 찾지 않을 수 없는 현대 철학의 영감의 원천이다. 더구나 운동의 근원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지와 동일성의 연원을 잊지 않는 그의 균형감각은 철학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교과서적 모범이다.
베르그손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박홍규라는 철학자에 의해 플라톤과 함께 서양철학의 양대 줄기로 파악된 바 있다. 베르그손에 대한 본격적인 번역과 주석이 포함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하 『시론』으로 약칭)이 고전총서로 출간된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이 책은 베르그손이 자기 철학의 가장 핵심적 직관인 <지속dur e>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세상에 공표한 책이다. 지속을 모르고 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책은 그의 철학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이다.
질과 양을 혼동함으로써 질적으로 모두 다른 심리적 상태들을 양화하려는 정신물리학적 시도의 잘못을 비판하는 제1장은 심리상태마저도 물질적 개념구도로 파악하는 종래의 심리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며, 그러한 혼동이 시간과 공간의 혼동이라는 더 깊은 뿌리로부터 나오며, 진정한 시간은 공간과는 완전히 다른 지속임을 밝힌 제2장은 이 책의 핵심부분이다.
공간적 사유에 익숙한 우리는 지속을 자꾸 망각하거나 공간화하려 하고, 거기서부터 운동 자체와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을 혼동한 제논의 역설이나, 시간을 공간과 같이 동질적 형식으로 생각한 칸트적 인식론의 오류가 나온다는 것이다.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망각되었던 순수 지속을 붙잡음으로써 이제 정지와 공간 중심의 전통 형이상학은 극복되고 운동과 시간 중심의 전혀 새로운 형이상학의 길이 열린다.
그 하나의 적용례로 제3장은 지속의 입장에서 자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종래의 자유론과 결정론 모두에 공통적인 공간적 표상을 제거하면 문제 자체가 해소되어 버리고 자유는 의식의 직접적 사실로 드러남을 보여 준다.
지속을 파악한 베르그손의 철학은 이후 본질에서 기능으로, 형상에서 지속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닫힌 우주에서 열린 우주로, 형태에서 유전으로, 성년 중심에서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 중심으로, 도덕률에서 상황으로, 무감동에서 참여로, 등등 모든 전통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대변혁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서양 철학사가 겪은 가장 큰 지각변동이었다.
베르그손의 철학적 사유는 적용 영역이 넓은 다산성의 이론 체계로서 우리 인문학계에 소중한 지적 자산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베르그손의 생애와 철학을 집중 조명하면서 {시론}의 사상적 중요성을 밝힌 해제, 베르그손 연보와 참고문헌, 역자의 충실한 해설 등은 이 책의 학술적 가치를 더한다. 나름의 노력을 가지고 읽어나간다면 베르손 철학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