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마치며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백철

1. 집필의 계기, 혹은 배경은 무엇인가요?

  『사법품보(司法稟報)』는 일찍이 학계에 알려져 주목받던 자료로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덕성여대 역사문화연구소 등 유수의 여러 한국학 연구기관에서 『사법품보』의 기초자료연구, 온라인 DB구축, 역주사업 등을 수십년간 진행해왔다. 그러나 분량이 방대하여 현재까지도 완료되지 못하고 있다.

  기실 연구성과를 장기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적지 않았다. 기초자료의 정리가 아직 진행중이었으므로 심화연구 역시 희귀했을뿐 아니라 단편적 소재에 국한되어 19세기말-20세기초 사법행정의 변화를 살펴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사이 조선시대 전통법의 기초적인 연구목표가 일정부분 달성되었으므로 자연히 조선의 근대화과정에서 남긴 사법관련 공문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부득이 연구성과를 기다리던 주변인에서 직접 자료를 분석하는 당사자로 그 역할이 바뀌고 말았다.

  곧 조선전기 국법체계 형성사(『법치국가 조선의 탄생』)→조선후기 국법체계 재구축사(『탕평시대 법치주의 유산』)→고종시대 근대사법체계 도입사(『사법품보』가 그린 왕정과 인간』) 등으로 이어지는 전통법체계의 정착과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2. 『사법품보』가 한국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나 중요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司法稟報(甲)』卷117, 報告書(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사법품보』는 여러모로 기존 형정자료와 비교된다.

  첫째, 근대사법행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곧 갑오-광무개혁이후 관찰사-법부와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자료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관찰부(지방재판소)에서 법부로 보내는 「보고서」와 「질품서」를 기반으로 편찬된 공문서첩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시대 관찰사가 국왕(승정원)에게 장계를 올려 보고하면 승정원에서 형조로 이문한 뒤 국왕의 재가를 받아 처리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것이다. 곧 갑오-광무개혁으로 내각(혹은 의정부) 중심의 서무처리가 일반화되고 군주는 최종 재가권자로 변모하는 입헌군주제 모델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의 기초조사와 최종판결까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 자료는 중앙-지방의 양자관계가 문서의 토대를 이룸으로써 사건의 연속적인 추적이 가능하다. 종래의 조선시대에는 중앙의 심리기록과 지방의 옥안류(獄案類)가 별도로 남아있어 사건의 추적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셋째, 내우외환의 혼란기에 왕정의 백성관이 여실히 드러나있다. 무장봉기에도 불구하고 강도는 사형에 처했으나 의병-동학은 한결같이 관대한 처분이 내려져 양자를 구분하였다. 더욱이 조병갑사건의 반면교사로 민원이 제기되면 어김없이 군의 수령뿐 아니라 도의 관찰사까지 곧바로 중앙으로 체포해온 뒤 소명하도록 했다. 이는 전무후무한 극약처방이었다.

3. 저자로서 『사법품보』를 읽을 때, 기존 타연구와의 차별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기존에는 『사법품보』 연구 자체가 희소할 뿐 아니라 특수한 주제(여성, 동학, 종교 등)에 주목해왔으나 이 연구에서는 자료 전체(갑본-을본)를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단행하였고 그중에서 통계적 기법을 적용해서 비중이 높은 사건별로 집중적으로 분류하여 연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제별 연구에서 놓친 부분이나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많이 바로잡았다.

  여성사 연구에서 다룬 자료보다 훨씬 많은 사건이 존재하였고 관점 역시 가부장제하 일방적 피해자로만 그려지기에는 당대의 여성상은 훨씬 더 능동적이고 강인했다. 실례로 그동안 ‘과부보쌈’으로 알려진 사건은 재혼풍속이 전혀 아니었으며 특수범죄로 취급되어 여성본인을 비롯한 이웃이나 친척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고 관의 신속하고 강도높은 처벌이 보장되었다. 이는 일본제국의 관습법-민법조사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명화되지 못한 조선의 이미지 만들기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또한 동학 역시 조사된 사료보다는 더 많은 자료가 존재했는데 이는 이명표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종래에는 동학을 피탄압대상으로 이해해왔으나 실제로는 청일전쟁기 일본제국의 점령하 갑오정권정도만 비슷한 경향이 확인될 뿐이며, 대체로 주모자나 살인범이 아니면 단순가담자는 모두 풀려났을 뿐 아니라 연좌도 금지시켰다. 심지어 정부에서 별도로 고용하여 일자리를 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혼란기마다 다른 죄목으로 체포되기가 반복되자 동학도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확인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개항이후 여러 서방의 기독교나 일본의 불교 세력 역시 지방에서 외세를 등에 업고 각종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적 형벌을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도 그동안 단지 종교탄압이라는 이미지로만 왕정의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던 것도 실제 사료와 많은 차이가 난다.

4. 책을 집필하면서 생각한 '대중들이 집중해줬으면 하는 고종대의 면모'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역사학도라면 망국의 군주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은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장단점을 논하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비판적 시선은 대부분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경영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였다. 곧 망국은 외세인 일본제국의 군사적 침공이 아니라 조선(대한제국) 내부의 붕괴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의 낡은 전제이다. 오히려 정확한 망국요인을 찾기 위해서라도 공과에 대한 평가는 좀더 신중히 이루어져야 한다.

5. 책을 집필하며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나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요?

  대한제국기 고종을 전제군주로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미 국제법연구자들은 오래전부터 만국공법의 국가주권 요소를 준수하는 방식으로 「대한국국제」가 만들어졌음을 지적해왔다. 더욱이 고종이 말하는 ‘전제’는 독일의 비트포겔이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정복왕조를 개념을 전제로 만든 폭압적인 정치구조가 아니라 서양의 절대왕정이나 조선의 왕정체제를 지칭한다. 이는 갑오개혁기 내각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하도록 제도가 바뀌면서 군주의 직접 통치권을 제약했던 과정을 거친 이후에 등장한 반발의식의 발로였다.

  이런 표현 자체가 군주권이 가장 침해받고 있을 때 행한 역설적 표현이었다. 특히 만민공동회 강제해산 사건을 그 대표적 사례로 비판하고 있으나 군주의 만민공동회 연설노력은 외면하고 독립협회가 감행한 폭력시위나 경찰폭행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은채 강제해산만 언급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비판일지는 의문이다.

6. 향후 연구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아직 18세기후반-19세기중반 중앙과 지방의 판례기록이 산적해있다. 조선시대 중앙기록은 이미 많은 연구자가 분석을 진행하고 있으나 아직 지방의 옥안류는 거의 검토되지 못했다. 이에 일단 옥안류에 대한 연구를 앞으로 진행해보고자 한다.

7.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한국 근대(혹은 개화)의 실제 내용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서구제도의 수용과 근대는 반드시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근대 사법권 분화의 기원도 그리스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국공법≫에서는 로마법을 ‘만국공법’의 예로 지칭하였으므로 서구의 국제표준이 반드시 근대적일 수 없었다. 또한 유럽·일본은 봉건제인 상태에서 중앙집권국가를 근대에 처음 만들었으므로 ‘국가’·‘국민’·‘중앙집권화’가 ‘근대’의 요소였으나 한국·중국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개화관료들은 일본의 무조건적인 서구제도 수용에 비판적이었고, 근대국가로 도약하는 데 필요한 제도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였다.

  우리는 과연 19세기에 이미 개화관료들이 품었던 고민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 본 연구는 대우재단의 2019년 학술연구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물은 2023년 6월에 643번째 대우학술총서로 발간되었습니다.
 

저자 소개

김백철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부산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문학석사·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분야는 조선시대 법사학 및 정치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