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마치며

충북대학교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
문광훈

1. 집필의 계기, 혹은 배경은 무엇인가요?

  인문학에 관한 한, 문학이든 예술이든, 철학이든 역사든, 당사자 자신의 실감이 배어있지 않는 언어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책임있는 언어도 아니고, 신뢰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인문학은 간단히 말하여 인간과 그 삶에 대한 것이고, 그러니만큼 대상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논의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당사자 자신의 직간접적 개입이 없을 수 없고, 그러는 한 그만의 실존적 느낌과 이해와 가치가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 부득불 스며들게 마련이다. 

  그렇게 스며든 것은 그 사람의 자의식 –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대한 느낌과 생각, 즉 살아있다는 의식이고, 이렇게 살아가는 한 ‘잘’ 혹은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다. 이러한 자의식의 여부는, 사상사라는 더 큰 맥락에서 보면, 그 중요성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자의식에는 인간의 인간다움과 그 품위, 나아가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자기존재에 대한 이 존엄한 자의식은 그 자체로 ‘근대적(modern)’이다. 자기 존재가 갖는 독립성으로 하여 인간은 참으로 깊은 의미에서 자기의 유일무이한 삶을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 

  모든 문학이나 예술에는, 그것이 훌륭한 것이라면, 적어도 이런 자의식이 들어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자의식이 잘 드러나는 문학이 ‘자서전’이라면, 그런 자의식이 잘 표현된 회화가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자서전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장르가 ‘고백록’이다. 나는 이런 자서전이나 자화상 혹은 고백록을 아주 사랑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자서전이나 고백록은 하나도 빠짐없이 읽고, 세상의 모든 자화상을 죄다 감상하고 해명해보고 싶은 게 나의 학문적 한 욕망이기도 하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자서전이나 자화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왔기에 언젠가 유종호 선생님으로부터 “알렉산드러 게르첸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혁명가”이고, 그의 자서전 『나의 과거와 사상』은 “19세기 최고의 자서전의 하나”라는 평가를 우연히 들었을 때, 이 말은 잊혀질 수 없었다. 2016년이나 2017년 즈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매주 토요일 있었던 네이버 열린 연단 자문회의에서였다. 나는 다른 몇몇 분들과 더불어 이 강연 시리즈의 자문위원이자 간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이 일은 그 후 8년 동안 이어졌다. 

  그 후 나는 Constance Garnett이 번역한 영어판 『My Past and Thoughts』를 구입하였다. 아마존에서 산 중고판으로 720쪽 되는 분량이었다. 이것을 서너 개월에 걸쳐 조금씩, 마치 곶감을 빼먹듯이 아껴서 읽었는데, 아주 좋았다. 나의 독서경험에 의하면 좋은 책은 밑줄 그을만한 대목이 10-20군데 정도인데, 이 책은 무려 70-90군데 이상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 대목들은 정말이지 너무도 다채롭고 흥미진진하였다. 때로는 정확한 서술이 있고, 때로는 세심한 관찰이 있으며, 곳곳에서 깊은 통찰이 배인 거시적 안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에 대해 좀더 자세히 논평해보고 싶지 않겠는가? 게르첸의 놀라운 인생 경험을 내 식으로 정리해보고 싶은 충동에 나는 오랫동안 가슴이 설렜다. 그리하여 그의 책은 네이버 강연에서 한 번 다루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고, 결국 단행본의 형태로 논평하여 출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두 권의 책

2. 게르첸이라는 인물을 다루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한 사람이 써놓은 글에는 많은 것들 – 그의 느낌이나 생각뿐만 아니라, 기억과 회상, 관찰과 논평, 고백과 회한 등등이 들어있다. 게다가 그 내용은, 그가 뛰어난 사람일수록, 더욱 다채롭고 광범위하다. 이 다채로움은 어떤 경우 자유자재의 논평 속에서 무한정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 
게르첸은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 사람이 귀족이건 농부건, 황세자건 친구건,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거의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이렇게 기록된 것에는 그만의 독특한 느낌이 들어있고, 이 느낌은 명료한 사고에 의해 정리되어 있으며, 이런 감정과 사고는 적절한 언어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그의 느낌과 사고 그리고 언어에는 일정한 연속성이 있으며, 이 연속성은 일정한 수준에 닿아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쓴 글의 어느 구절 어느 단락에서도 그의 동시대 현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는 오늘의 세계와 현실과 삶에 대한 훌륭한 성찰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지금 감정과 사고와 표현에 대해 간략히 썼지만,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예를 들어 세심한 감성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만약 이것을 타고났다면, 그것은 크나큰 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세심한 감성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그것만 있으면 혼란스럽기 쉽다. 따라서 감정은 사고에 의해 정돈되어야 한다. 감정이 사고와 연결될 때, 그래서 느낀 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감성의 내용은 좀더 믿을 만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사고의 내용은 그것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언어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그럴 때 좀더 분명한 윤곽을 갖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렇게 표현된 내용은 주체가 행동할 때 일정한 생활의 지침이자 원리가 된다. 결국 감정은 사고로 이어지고, 사고는 표현으로 연결되면서 행동을 위한 쓸모있는 바탕이 된다.

  이 모든 것 – 감정과 사고와 표현이 모여 한 사람의 세계관을 이루고, 그는 이 세계관을 근거로 자기 삶을 살아간다. 한 사람의 감정과 사고와 언어가 그 사람의 세계관을 구성한다면, 결국 게르첸에게서 내가 놀라는 것은 그의 세계관적 깊이와 넓이가 될 것이다. 그의 세계관에 기대어 우리 사는 현실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선하고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3. 책을 집필하며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나 발견한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의 하나는 러시아라는 나라의 영토적 광대함이다. 이 영토적 광활함은 단순히 지리학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감정적 인식적 넓이에 이어진다. 

  19세기 러시아 지성사는 잘 알려져 있듯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수많은 작가와 사상가, 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종교인이 그 당시에 활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 시대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매우 넓고 다채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과 이념과 사상과 사건이 1800년대 러시아에 있었던가? 이것을 한반도 – 오늘의 한국 현실에 대입해보면 어떤가? 

  이를테면 게르첸이 청년 시절 유형을 가야 했을 때, 그 거리는 최소 1000-2000km 정도이고, 길면 5000km 이상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사할린으로 유형을 가야 하면, 그것은 10000km도 넘었다. 마치 오늘날 인천공항에서 유럽의 어느 공항으로 날아가듯이 그것은 지구를 횡단하는 거리였다. 워낙 땅이 넓고 사람도 많으므로 새로운 유형지를 다스리는 도지사(governor)도 사정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선량한 도지사가 있는 곳이면, 우리의 조선조 경우에서처럼 위리안치(圍籬安置) 식으로 무조건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생활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도 내게는 아주 흥미로웠다. 게르첸의 경우에도 그랬다. 그는 유형지에서 도지사의 배려로 관보제작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시대와 삶을 상상하는 것 만큼이나 자주 구글 지도를 검색하면서 그가 살거나 지나갔던 도시와 산과 강의 위치를 확인하곤 했다.

  이렇다고 해도 러시아의 현실정치적 차원이 늘 모범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날 스탈린 전체주의가 그랬고, 오늘날의 푸틴 체제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는 것은 영토적 광활함 자체가 이념적 관대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좁은 지역에 살아도 사고가 열릴 수 있고, 넓은 지역에 살아도 사고가 협소하여 편견에 차 있을 수도 있다. 삶에서는 어느 것이나, 또 무엇이나 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사회의 다른 현상은 우리 사회를 여러 차원에서 돌아보게 한다. 게르첸의 세심한 감정과 깊은 사고 그리고 드넓은 세계관은 이념적 대립이 ‘아직까지도’ 극심한 오늘의 한국사회에 좋은 참조틀이 될 수 있지 않나 나는 생각한다. 

4. 집필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했나요?

  집필 과정에서 특별히 어려웠던 것은 없다. 나의 글쓰기 작업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어떤 의무감이나 사명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 물론 그런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드물었고 -, 대체로는 나의 호기심과 관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호기심과 관심은 그 자체로 일을 추진하는 지속적인 에너지가 되었다. 그래서 별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하루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들녘에서 뛰어놀던 아이처럼 시간을 잊은 채 이 책을 쓰는 데 골몰하였고, 그리고 그렇게 쓰는 시간 내내 행복했다.

5.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신가요?

  우리는 왜 톨스토이나 게르첸을 읽는가? 우리가 플라톤을 ‘연구’하고 셰익스피어를 ‘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연구나 해석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탐구하는 대상에 어떤 의미 –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지금 여기의 생활에 타당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인물탐색이든 저술해석이든, 결국 남는 것은 그렇게 탐색하고 해석하는 지금 여기의 연구자 – 나 자신의 삶이다. 나는 내가 읽고 쓰는 모든 것이 나의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 책을 읽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고, 사람마다 그 이유는 다를 것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나의 판단으로는, ‘삶의 어떤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떤 가능성인가? 가능성이란 아직 우리 눈앞에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상태다. 그러니 어렴풋이, 그저 상상이나 희망으로만 있는 것이다.

  인간은 고작해야 60년 혹은 80여 년의 생애를 살 뿐이다. 이렇게 산다고 해도 하루하루의 밥벌이와 주거의 안정, 나날의 생계와 가족의 건강과 친인척의 화목을 걱정하지 않는 날은 없다. 우리가 갖는 느낌과 생각은 대개 자신이 경험한 것의 틀 안에서 마련된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안경을 끼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 외의 가능성은 알기 어렵다. 결국 우리는 돈과 일과 생계에 쪼들린 채 자신에게 주어진, 잔혹하리만큼 얇고 좁은 인생의 시간을 고갈시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밖의 삶은 없는가? 문학이 알려주는 것은, 더 넓게 보아 예술이나 철학이나 인문학이 알려주는 것은 이런 생계의 현실보다는 더 깊고 더 넓은 삶의 미지적 가능성이다. 게르첸의 『나의 과거와 사상』에는 이런 깊고 넓은 삶이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로 구현되어 있다.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삶 역시, 그것이 러시아 지성사에서 주류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또 그의 책이 러시아 지식인 지도에서도 오랫동안, 아니 최근에까지도 외면되었다는 점에서, ‘실패’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소설 작품 한 권이 번역되었을 뿐, 그를 다룬 논문조차 없다.

  그러나 뛰어난 학자나 작가 혹은 사상가 가운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가 과연 몇인가? 그들은 거의 대부분 살아있는 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죽어서도 오랫동안 잊혀진다. 그것이 사상사 혹은 지성의 역사가 증거하는 바다. 그리하여 뛰어난 인물은 언제나 1회적 현상으로서 예외적으로 자리할 뿐이다. 게르첸도 다르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게르첸의 경우가 인간 삶의 모범 답안지라고 물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남긴 훌륭한 저작이 있다는 것, 그런 저작을 쓴 사람이 실제로 이 지구 현실의 땅 위에서 살았다는 것은 지성사에서 놀랍고 경이로우며 주목에 값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책을 통해 독자들이 무엇인가 배우기를 바란다기보다는, 그냥 한번 읽고 잠시 생각하게 되었으면 한다. 그런 후에도 남은 힘이 있다면? 그러면 그 생각을 자기 삶에 한 번 적용해 보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가 싶다. 게르첸에게는 한국의 지성사에서뿐만 아니라, 서구의 어느 지성사에서도 보기 힘든 성찰적 크기와 넓이의 잠재력이 곳곳에 배어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6. 이후의 연구 계획은 무엇인가요?

  모든 예술작품에는, 그것이 시든 소설이든, 회화든 음악이든 건축이든, 아니면 영화나 연극이든, 삶에 대한 예술가의 깊은 고뇌와 통찰이 들어있다. 이 소중하고 무한한 잠재력을 나는 나의 색채와 개성, 언어와 성격으로 풀어내고 싶다. 그렇게 풀어내어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에너지로 만들고 싶다. 그것이 나의 문제의식이고 나의 글쓰기 작업이다. 여기에 무슨 대단한 소명의식이나 사명감은 없다. 단지 나는 이런 일을 좋아하고, 나아가 이 일이 삶의 허망함을 견디는 유일하게 의미있는 일로 보이는 까닭이다. 

  이런 일은 한두 권의 책이나 원고지 몇 천 매의 글로 될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좀더 체계적이어야 하고, 시리즈 형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나에게 이 작업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 있이다. 하나는 ‘한국 미학’에 대하여 여러 각도에서 서너 권의 책을 이어 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좀더 넓은 관점에서 ‘한국 인문학’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싶다. 결국 하나의 분과학문적 논의를 제대로 하려면 그 분과를 에워싼 서너 분과라는 더 큰 틀 – 인문학적 위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어떤 글에서나 지금 여기 나의 실존 – 나의 느낌과 사고와 체험에서 출발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생생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지각하는 것이 모든 글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러한 한국적인 것이 그러나 세계적으로 통용되려면 정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열려 있어야 하고, 나아가 더 넓은 지평으로 이어져야 한다. 구태의연한 상투어로 점철된 것이 아니라, 매 문장이 신선해야 하고, 그런 문장으로 이뤄진 단락이 사고적으로 단단해야 하며, 이렇게 단단한 사고의 단락이 하나의 온전한 풍경을 보여줄 수 있어야 마침내 한 권의 훌륭한 책이 쓰여질 수 있다. 
‘껍데기는 가라’라고 질타하던 한 시인의 구절처럼 ‘진부하고 상투적인 문장은 가라’! 이것이 20대 청년시절 이래 나의 변함없는 모토였다. 실감없는 문장은 단 하나도 쓰지 않겠다는 것, 내가 쓴 것이라면 내 스스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온 것만을 쓰겠다는 것, 그리하여 내가 쓰는 모든 단어와 구절과 문장에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지금까지 20여권의 책을 써왔다. 그럼에도 부실하고 미흡한 책은, 참으로 아쉽게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나의 한계다. 이런 한계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어쩌겠는가? 최선의 노력 후에도 찌꺼기처럼 남는 미흡감은 내가 아무런 불평 없이 안고 가야 할 불가피한 몫이라고 체념하며 받아들인다. 단지 이 체념 앞에서 내가 내 삶의 의욕마저 무릎꿇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어떤 글을 쓰든 간에 나는 실감 있는 느낌을 실감 있는 언어에 담아 지금 여기의 내 실존과 오늘의 우리 현실을 증거하고 싶다. 그러면서 더 넓고 깊은 삶의 가능성으로 열리는 어떤 사례를 기록하고 싶다.7.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누구를 읽는가’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읽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단순히 읽는 대상을 예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읽은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는 더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읽은 것을 지금 여기로, 지금 여기의 나로 돌려놓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경험은 별 쓸모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서전과 반성적 회고』가 출간된 이후 생겨난 독자의 관심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어도, 내게 중요하다. 내가 청주지역의 한 독서모임에 기꺼이 초대를 받아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사진 참조) 30-60대 사이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일곱여덟 분으로 구성된 이 모임에서 나는 그날 내 책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하였고, 이분들은 각자의 읽은 느낌을 말하였다. 게르첸에 대한 질문도 있었고, 이 책을 토대로 자유로운 토론도 이어졌다.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대규모도 아니고 일정하지도 않지만, 우연하고 느슨하게 일어나는 이런 작은 형태의 독서모임이 소중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 소개

문광훈
충북대학교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 가지 방향에서 글을 쓴다. 독일문학·예술학·철학 분야와 한국의 문학·비평·문화 분야, 그리고 자기 이름을 걸 수 있는 예술론과 미학 분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