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마치며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강준호

1. 『도덕 원리에 관한 탐구』를 번역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흄(David Hume)의 『도덕 원리에 관한 탐구』 영문판은 석사과정 때부터 늘 책장에 꽂혀 있었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에는 이래저래 펼쳐볼 일이 있었으나, 그 후로는 한동안 외진 구석에 곱게 모셔져 있었다. 그랬던 책을 어쩌다 다시 펼치게 됐을까?  

  철학사 탐구는 마치 개미지옥 같다. 한번 발을 허투루 들이면 헤어 나오기는커녕 결국 잡아먹히게 되는 구멍이다. 대학원 과정부터 줄곧 공리주의를 연구해오다, 10여 년 전 우연찮게 벤담(Jeremy Bentham)의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의 번역을 출간했다. 그것을 계기로 벤담에게 영향을 끼친 다른 영국 사상가들의 저술까지 슬쩍슬쩍 들춰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흄의 저술을 건드는 것에는 다소 부담이 느껴졌다. 20세기 들어 그의 철학사적 위상은 치솟았고 박학한 국내 전공학자도 즐비해 섣불리 책장을 넘기거나 키보드에 손을 올리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공리(utility)가 모든 덕의 기준이자 척도”임을 흄에게서 배웠다는 벤담의 말이 어디까지 진심인지가 너~무 궁금했다. 

  별 기대 없이 지원한 번역연구에 선정된 기쁨도 잠시, 다시 두려워졌다. 나름 흄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왜 지금껏 아무도 이 책에 손대지 않은 걸까? 이 책의 첫 우리말 번역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부담은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그럼에도 영국 근대 공리주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완결해보려는 주제넘은 계획에서 흄은 감히 건너뛸 수 없는 디딤돌로 보였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은 흄이라는 또 다른 개미지옥으로 나를 내던지는 계기가 될지 모르겠다. 

흄과 벤담

2. 이 책을 번역하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들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연작 영화는 후속편을 보기 전에 전편을 봐야 한다. 흔히 『도덕 원리에 관한 탐구』는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제3권의 개작이라 하지만 후속편의 성격도 가진다. 그렇기에 번역에 돌입한 후에라도 후자를 면밀히 살펴봤어야 한다. 양자를 나란히 놓고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진지하게 짚어봤다면, 작업의 즐거움만이 아니라 흄의 도덕철학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흄의 저서들

 

  서양 근대사상 연구는 참 많은 장비를 필요로 하는 듯하다. 본문은 그럭저럭 읽어내려 갔지만, 각주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라틴어 문장들과 서양 고대와 근대 역사이야기는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라틴어 낱말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아 대강 우리말로 꿰맞춰 보거나 인터넷으로 해당 문장의 영문 번역을 샅샅이 뒤져 확인하는 작업은 종종 한나절을 삭제시켰다. 또한 역사적 사례들이 해당 문맥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인지를 파악하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아쉬움과 곤혹스러움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고전 공리주의(classical utilitarianism)의 원류를 흄으로 보는 학자들의 생각을 수긍하게 된 것은 나름 큰 수확이었다. 또한 10년 넘게 주로 벤담을 연구하면서 쌓였던 묵직한 의문을 조금은 내려보낸 듯한 쾌감을 느꼈다. 얕은 앎 때문에 이제껏 서로 대립하거나 전혀 별개로만 봐왔던 사유의 전통들이 원래는 한 몸뚱이였음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3. 우리의 생각들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흄이 사용한 용어들의 우리말 번역어를 고민하거나 역자 해제를 쥐어짜는 과정에서 국내 연구물을 대충이나마 훑어볼 수 있었다. 살펴본 연구물은 하나같이 흄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당연하지 않나 싶겠지만, 생각과 생각, 그리고 마음과 마음은 이어져야 한다. 

  작업을 마치며, “공리가 모든 덕의 기준이나 척도”임을 흄에게서 배웠다는 벤담의 말이 에누리 없는 진심임을 믿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이어졌다. 마치 영역 동물처럼, 자신의 연구 영역을 벗어나지도 다른 누군가의 입장을 허락하지도 않는 것은 서양 근대사상의 거석들을 대하는 적절한 예절은 아닌 듯하다. 우리는 그들 각자의 독백이 아니라 그들의 대화를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들 각자의 말을 새겨들은 사람들끼리도 대화해야 한다. 

(좌)어니스트 올비의 책 표지 (우)프레드릭 로젠의 책 표지

 

* 본 연구는 대우재단의 2017년 학술연구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물은 2022년 10월에 56번째 대우고전총서로 발간되었습니다.

저자 소개

강준호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경희대학교 철학과에서 문학사,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철학과에서 문학석사, 퍼듀 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리주의와 존 롤스를 전공했으며 관련 논문을 여러 편 출판했다.